# 81
회귀빨로 지존 헌터
- 4권 9화
그림은 스스로가 빛을 잃지 않고 꾸준하게 힘을 뿜어냈다.
허공에 그려진 그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생성되는 모습이 보였다.
울렁.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푸른 작은 모양의 공이 허공에 그려졌다.
푸른 구체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가운데는 조금씩 이곳이 아닌 다른 공간에 연결이 이뤄지고 있었다.
* * *
세계적으로 집계된 포탈의 숫자는 약 10만 개.
물론 지금도 어딘가에서 생성되는 포털도 있을 것이고 사라지는 포털도 있다.
숫자는 일정하게 유지가 되는 것이 마치 항상성을 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만약 중국의 포털 숫자가 일시적으로 감소했다면 그만큼 다른 나라에 포털 수가 증가할 경우도 많았다.
대한민국에서 단번에 줄여 버린 숫자 덕분인지, 일본에는 급격하게 포털이 늘었다는 신고가 이뤄졌다.
아직 안전지대도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는데, 자꾸만 늘어만 가는 포털 숫자 때문에 태욱은 더욱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안전지대 구축 예정지에 포털을 발견했다는 정보입니다."
물론 일본 내부의 자위대 병사들의 화력만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작은 포털은 여기까지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포털들만 이곳에 올라오는데, 잠시라도 그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치익, 안전지대 구축 C-27 구역 커다란 포털이 나타났음."
쉬지 않고 무전이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욱과 다른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 온 신경을 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원이 드워프 마을에서 만들어 온 지능이였다.
닥치는 대로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움직일 때는 인공지능이 필요가 없었다.
그저 보이는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우선순위를 두고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이젠 인공지능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아무리 태욱이라도 과거의 모든 상황을 기억해 내기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더구나, 타국에 있는 작은 사건들까지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다.
커다란 사건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한다며 움직이기도 했지만, 작은 사건들까지는 모두 기억하기 힘들었다.
최우선순위를 두고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한 이후, 바로 인공지능을 일본으로 데려왔다.
물론, 일본 사람들은 인공지능인지 모른 채, 그저 한 명의 사람이 더 추가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제공받은 정보량이 부족합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최대한 객관적이고 확실한 정보가 있어야 했다.
작은 정보들을 모아 처리하고 현장 상황에 맞춰 파견팀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이곳에서 그 모든 정보를 얻기는 힘들었다.
단순하게 어디에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정보를 얻기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의 음성 시스템은 절로 제공되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달고 있었다.
부족한 정보 가운데 추려 낼 수 있는 최소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곳들을 선정해 냈다.
"이번 출정 지역은 도쿄 C-21 구역입니다."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정보는 인공지능이 접수를 하고 가장 효과가 커다란 곳으로 출정 명령을 내린다.
인공지능의 판단에 의구심을 가질 만했지만, 아무도 그 판단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기계는 기계 나름의 판단을 한다.
확률이 1퍼센트라도 높은 곳을 비교하고 추려 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에 인공지능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은 영리였다.
"어떻게 기계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가 있어요?"
"영리야, 그건 있잖아......."
"맞잖아요. 기계는 기계일 뿐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어요."
영리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곳에 있는 따뜻함을 저 인공지능이 알 수 있을까요?"
울먹이듯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져 나올 듯했다.
"그렇지, 인공지능에게는 인간의 따뜻함이 없을지 몰라. 하지만, 누구를 살리고 살리지 않고가 중요한 것인가?"
"훌쩍, 네?"
눈물을 훔치며 지원의 물음에 영리가 되물었다.
"우리가 살려 낼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한계가 있어. 당장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도 어떤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을지 상상조차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어떻게 인공지능을 믿느냐구요."
영리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들을 그대로 놔둔 채로 떠날 수가 없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판단과 결정을 따라 움직이면 눈앞에 있는 사람 1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구출할 수 있는 곳에 힘을 쏟는 것이 좋은 판단이라는 것이다.
"일단은 지능이가 분석한 결과를 믿고 움직이자고."
태욱은 인공지능의 능력을 믿었다.
그가 바라봤던 회귀 전의 세상에서는 인공지능이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인공지능이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이 0%에 수렴했을 때 세상은 멸망했다.
아니, 멸망할 뻔했다.
태욱이 회귀해 미래를 바꿔 가고 있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태욱은 인공지능을 신뢰했고 믿었다.
경험이 쌓여야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지금부터 조금씩 데이터베이스를 쌓아가야 하기에 태욱은 인공지능이 하자는 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진짜, 괜찮을까요?"
영리는 걱정하는 기색이 영력했다.
아무래도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하는 것이 마음 한편으로는 영 내키지 않았다.
'진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돌아갈 수 있을까?'
실제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쉽게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모습이었다.
지원은 과학자라는 그녀의 특성 때문인지 효율성을 강조했고, 은비는 이미 눈앞에서 죽어 나간 사람을 많이 봤다.
그러다 보니 절로 무뎌진 것이었다.
만약 그녀들에게도 경험이 없었다면 영리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토닥토닥.
어느새 영리의 곁으로 다가온 은비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 줬다.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래,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은비의 목소리에는 애잔함이 담겨 있었다.
깨끗했던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자자, 일단은 출발하자."
태욱은 동료들을 데리고 함께 도쿄 C-21 지역으로 출발했다.
Chapter 3
"캬아아아아악!"
거친 고성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체는 바로 몬스터였다.
괴성의 목소리를 내지르는 녀석은 사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등에는 몸 전체를 감쌀 수 있는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핀인가?"
태욱은 형체를 보고 바로 몬스터를 파악했다.
"시기상 조금 빠른 것 같은데."
그의 기억상 그리핀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적어도 2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미래를 예측하고 움직이는데, 더욱 빠르게 녀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몬스터를 처치하거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과 달리 점점 시기가 빨라진다는 것을 조금씩 느꼈지만 오늘처럼 확실하게 마음에 와닿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그리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단 저 높은 하늘에 있는 녀석들을 바닥으로 끌고 내려와야 했다.
"그리핀을 끌어내려야 되는데."
태욱은 주위를 살폈다.
높게 솟은 빌딩들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건물의 높이 가지고는 턱없었다.
만약 옥상 정도의 높이에서 비행을 하고 있었다면 추락시키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 옥상보다 더욱 높은 곳에 있는 녀석들을 끌어내리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영리야."
"네, 말씀하세요."
영리는 태욱의 부름에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바로 대답했다.
"옥상으로 같이 올라가자."
"네? 옥상이요?"
영리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나머지는 몬스터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뒤처리 좀 부탁해."
은비는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리 둘러봐도 몬스터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저 높은 하늘을 보는 순간 푸른 하늘에 거무죽죽한 점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몬스터? 설마? 저 하늘 높이 있는 녀석을 말하는 거야?"
태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내려오게 만들려고?"
"그건 다 생각이 있으니까, 여기 영리도 있으니, 괜찮아."
"일단은 만발의 준비를 해야겠군."
"되도록이면 귀를 잘 막을 수 있는 것들로 준비해 두면 좋을 거야, 저 녀석들 꽤나 목소리가 크거든."
"그건, 여기 밑에서 듣고 있어도 알 수 있어."
은비는 태욱이 어떤 의미로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미 재대로된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그리핀들의 울음소리는 굉장했다.
높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바닥으로 전달되어 엄청나게 컸다.
하피와의 전투경험으로 인해 그리핀 녀석들이 엄청나게 커다란 성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통밥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잘 부탁할게."
태욱은 지원과 은비 그리고 금강철인을 아래에 두고 높은 건물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전기가 끊어진 지 오래됐는지,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다.
"후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으니, 계단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나?"
태욱이 건물 내부로 들어가 옥상으로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밖에서 뛰어 올라가면 빠른 속도로 옥상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쏜살같이 쏟아지는 녀석들의 사냥 본능을 피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유리한 전투 구역을 만드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물론, 대응을 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태욱과 나머지 일행은 전력의 가장 주축을 이루는 요소였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자원이다. 누구 한 명이라도 부상을 당하면 아직 위험에 빠지지 않은 사람 혹은 큰 몬스터의 위협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전투는 조심스럽게 펼쳐야 하고, 태욱은 안전하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전장을 정리할 수 있는 방향을 항상 모색한 것이다.
"조금 어두운데, 괜찮을까요?"
태욱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옷깃을 살짝 잡는 영리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쓰담쓰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비벼 댔다.
'귀엽네.'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언제나 전투를 함에 있어서 씩씩한 모습을 보이던 영리였다.
그녀가 자신의 옷깃을 살짝 잡는 모습이 어린 여동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태욱은 자연스럽게 행동이 튀어나왔다.
"괜찮아. 건물 안이 몬스터들이 상주하기에는 썩 좋은 환경은 아니니까."
"그런가요?"
"그리고 여기 몬스터는 그리핀이 주류를 이룬다고 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태욱은 밝게 웃으며 영리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의 기감은 온통 주위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