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어로 메이커-55화 (55/240)

“허억!!”

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얗게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시렸다. 황급히 손으로 빛을 가렸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다. 생각이 정돈되지 않았다.

“베, 벨포드 씨!!”

그때, 다급한 음성과 함께 누군가 덥석 안겨 들었다.

말랑말랑한 느낌.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살폈다. 머리카락이 조금 짧아지고 얼굴이 탔지만 분명 라라였다.

“라라?”

“일어나셨군요! 정말 걱정했어요!”

“끄응. 여기는 어디지? 어떻게 된 거야?”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어울리지 않게 빈혈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게다가 몸에 힘이 전혀 안 들어갔다. 푹 늘어진 것이 며칠이고 굶으며 사막을 횡단하고 난 뒤 같았다.

라라가 황급히 몸을 부축했다.

“아, 아! 움직이지 마세요. 그 동안 계속 누워만 있어서 제대로 힘이 안 들어 갈 거예요.”

“그 동안?”

“기억 못 하시는 거죠? 그날 그렇게 쓰러지고 난 다음에 벌써 스무날이 넘게 지났다고요.”

“스무날……? 그렇게나 오래 기절해 있었다는 거냐?”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때, 엉성하게 짠 천막을 걷어내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이혼. 복장은 바뀌었지만 분명 그였다. 그리고 이내 루루와 란도 안으로 들어왔다. 라라와 마찬가지로 둘 다 머리가 조금 짧아져 있었다. 살도 조금 타고. 스무날이 지났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경비대장과 싸운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 벌서 스무날이 지났다는 겁니까?”

“네. 추격대를 따돌리고 간신히 합류를 했는데, 은인께서 죽은 듯 쓰러져 있더군요. 상처가 심하고 출혈이 상당했습니다. 사실 죽었다고 생각을 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어요. 놀라운 속도였죠.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광경이었어요.”

세이혼의 말을 라라가 받았다.

꽤 탄복한 얼굴. 신의 위업을 확인한 것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쓰러져 있는 은인을 업고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은인께서 상대한 자가 무리의 리더였는지 초반과 같이 짜임새 있는 포위망이 만들어지지는 않더군요. 어렵지 않게 한 곳을 돌파하여 도망 칠 수 있었죠.”

“그럼 여기는……?”

“유타 평원입니다. 야만인들과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추적자들이라 해도 쉽사리 찾아 올 수 없는 곳이죠.”

야만인은 공화국 측에서 낮춰 부르는 지역 토착민을 의미한다.

갈라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한 이들로, 지금은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개별적인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다.

쿤이 점점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 한 뒤 몸을 일으켰다.

“끄으응……”

“조, 조심하세요.”

라라의 부축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설 수 있었다.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갔다. 스무날이 넘도록 누워만 있었으니 당연한 일. 그러다 보니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 동안 내 수발은 누가 들어 준 겁니까?”

“기본적으로는 제가 했지만……”

세이혼이 뒷말을 점점이 삼켰다.

쿤이 뜨악한 표정으로 라라와 루루를 돌아봤다. 둘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에.’ 경악이 속에서 맴돌았다. 알몸을 보여 준 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정신이 없이 스무날이면 식사와 대소변을 다른 사람이 모두 처리했다는 말이 된다. 황녀인 둘이 그걸 손수 했다는 말인가? 믿기도 어렵거니와 무언가 쿡 하고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정말 둘이 한 거야?”

“그,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세이혼 씨는 사냥을 나가고 그랬어야 하니까……”

“벨포드 씨도 우리를 도와주었잖아요! 우리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요!”

“아……음. 고맙다. 못 볼꼴을 보이고 말았네.”

많은 말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쿤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두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지금에야 담담하지, 황녀. 아니, 그렇지 않다 해도 귀족가의 자녀로 자라 온 두 소녀가 외간 남자의 대소변을 처리한다는 것이 쉬울 리 있겠는가? 가족사이라도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셈을 하여 득실을 우선시 하는 쿤이라지만 적잖이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죠. 일단은 몸을 추스르는 게 우선입니다.”

세이혼이 분위기를 정리했다.

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누워있던 침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잠시 서 있던 것뿐인데 이마가 땀 투성이었다. 상태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 할 것 같았다.

“여, 여기요!”

란이 빨아 둔 헝겊을 내밀었다.

땀을 닦으라는 말 같다.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자 배시시 웃었다. 몸이 조금 상쾌해 지는 기분이었다.

“후.”

숨을 내쉬자 살아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등을 기댄 채 그대로 휴식에 들어갔다.

#

세이혼이 잡아 둔 고기를 물에 끓여 스튜로 내 왔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기가 약해져 있었다. 몇 술 뜨지도 않고 구역질을 해야 했다. 하지만 쿤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먹었다. 토하고 먹고, 토하고 먹고. 어떻게든 영양을 구겨서 넣었다.

그렇게 식사를 처리한 뒤에는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걷기를 먼저 하고, 각 부위별로 근력운동을 더했다. 겨우 스무날이라고는 하지만 영양의 섭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몸이 약해지기에는 충분했다. 대수롭지 않은 움직임에도 부담이 상당했다.

“후우……후우……”

“조금 쉬었다가 하세요.”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곳이 외진 곳이라 해도, 동원됐던 적의 숫자를 생각하면 오랫동안 벗어나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 할 때가 가장 위험한 거야. 위기는 경고 없이 다가오는 것이 가장 무섭거든.”

그리 답을 하며 쿤이 계속 몸을 움직였다.

라라가 설득을 포기 한 채 돌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그를 바라봤다. 해는 이미 져, 머리 위로는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춤추는 쿤은 우습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했다.

“벨포드 씨는 우리를 왜 도와 주세요?”

그렇게 흐르는 달빛 속에 춤사위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문득 라라가 물었다.

동작을 이어가며 쿤이 고개만 돌렸다.

“도망가면 위험해서. 단지 그것뿐인가요?”

손을 내리고 쿤이 바르게 섰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세차게 뛰는 것 같았다. 약해진 몸. 그 탓인가 싶어 지그시 손으로 눌렀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냐?”

“솔직한 대답이요. 세이혼 아저씨가 그랬어요. 보통의 여행자가 굴락의 팔을 상대 할 수는 없다고요.”

“굴락의 팔?”

“벨포드 씨가 상대한 남자요. 굴락의 팔이라는 조직의 일원이라고 해요.”

“그걸 어떻게……아니, 그건 직접 물어봐야겠군.”

어차피 상황에 대해서 토론 할 생각이었다.

세이혼에 대한 생각은 뒤로 밀어 두었다. 대신 또랑또랑한 눈의 라라를 바라봤다.

“이 마당에 거짓말을 하는 건 의미가 없겠군. 그래, 나는 사실 여행자가 아니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때, 풀숲에서 루루가 쪼르륵 튀어나왔다.

쿤이 눈매를 좁혔다. 이 정도 거리에 숨은 사람 하나 잡아내지 못하다니. 감각도 꽤나 많이 죽은 것 같았다.

“루루야.”

“치사해. 혼자만 듣는 게 어디 있어? 이런 중요한 이야기라면 나도 들어야지.”

“하아.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정리를 하도록 하자.”

쿤도 괜찮은 바위 하나를 찾아 엉덩이를 걸쳤다.

죽을 고비까지 거치고 나온 차. 어설픈 거짓말로 두 소녀를 끌고 다니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터놓고, 앞일을 상의하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여행자는 아니나, 그 만큼 세상을 돌아 본 용병이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너희와 만났고, 융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배에 탑승하게 됐지.”

“협박이요?”

“너희는 몰랐겠지만, 그는 탈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아마 내가 거부를 했다면 무사히 빠져 나오지는 못했을 거야.”

몰랐던 이야기에 두 소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쿤이 흘러나온 땀을 헝겊으로 닦아내고, 말을 이었다.

“어찌어찌 너희 둘을 구하며 배에서 도망치기는 했지만, 사실 그걸로 인연은 끝이었다. 서로 갈 길로 갈라지면 되는 일. 하지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내 발목을 잡았지.”

“저희가 황녀라는 사실이군요.”

“그래. 귀족가의 항쟁도 아니고, 무려 황녀가 걸린 일이야. 나 혼자 도망가 봐야 그림자가 쫓아와 언젠가는 발목을 잡게 될 일이지.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어. 지금의 어려움 때문에 손을 놓는다면 결국 후일에 그것이 다가와 몸을 집어삼킨다는 거지.”

황가에 반역한 이들과, 쿤 개인이다.

당장이야 둘을 버리고 몸을 숨길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영원 할 수 없다. 정말로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작된 일을 끝마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힘겨운 일임에도 둘을 공화국의 수도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쿤이 잠시 말을 아꼈다.

깊게 생각 해 본 적은 없으나, 입 밖으로 뱉으려 하니 엉겨 붙는 사실이 있었다. 마을에서 세이혼을 만날 때도 그러했다. 저렇게나 특별한 사람과 우연히 조우하는 것이 가능한가? 신이 안배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보다 더 대단한 우연이 떠올랐다.

“너희 둘은 이미 서 준경 신의 신관이지. 나와는 같은 신을 모시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만남부터 이런 관계까지. 모든 것은 우연 같지만, 우연이 아닌 일이라 생각을 한다.”

“신께서 주도하신 일이라 이건가요?”

“모두가 신께서 짜 놓은 판이라 한다면 내 위기조차 없어야 하겠지. 아마도 방향만을 그어 주시는 것 같다. 너희와 세이혼 등을 만난 것은 그 방향 위에 놓인 인연의 과실이겠지.”

두 소녀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도 정확하게 무어라 설명을 못하겠다. 하지만 너희를 구하는 일이 내 사명과 같다는 생각은 들어. 단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아닌. 조금 더 자발적인 사고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말이 복잡해요!”

“왜 돕냐고 물었지?”

“……네.”

“살기 위해서. 사도로서의 운명을 느끼고 있어서. 길가다 잡혀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비율은 너희가 적당히 섞어서 생각을 해라.”

“그래도 마지막 항목에 있기는 하네요?”

쿤이 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게 둘을 버리고 도망 칠 수 있다고 말 하지만,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다. 기계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동정과 연민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적다해도, 두 소녀에게 말 한 것은 모두 사실.

“피. 진즉에 그렇게 말했으면 좋잖아요.”

“그러니까, 벨포드 씨가 도와주는 건 맞다는 거지?”

어찌 되었든, 그 사실로 두 소녀는 만족 한 모양이다.

쿤이 담담이 보며 작게 웃었다. 불안한 마음에 확인을 받으려 한 거겠지. 보호자라 생각하였던 쿤이 스무날이 넘도록 쓰러져 있었으니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꾹 참았다 겨우 묻는 모양새가 그래도 철없지는 않다.

그가 잠시 지켜보다 하나를 정정했다.

“벨포드가 아니다.”

“네?”

“쿤. 쿤 타이. 내 이름이다. 앞으로는 쿤이라고 불러.”

이름까지 내어 주었으니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죽든 살든 같이 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에는 신의 보살핌이 존재할 것이다.

서 준경.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눈을 감아 보았다.

#

짧은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난 뒤 쿤은 세이혼을 찾아갔다.

라라가 말 한 바를 따르자면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굴락의 팔. 그 생소한 단어의 설명을 듣고 싶었다.

“은인,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마침 그도 란을 재우고 나오는 길이었다.

나무와 수풀로 짜 대충 만든 건물이었지만, 꽤 그럴싸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스무날 동안 이를 손으로 만들어 두었다는 것만 봐도 보통 재주가 아니었다.

쿤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음. 이쪽으로 가시죠.”

세이혼과 함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로 이동했다.

분위기를 읽은 모양이다. 단 둘이 대화를 하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라라에게 들었습니다. 습격한 자들을 알고 있는 듯하던데. 사실입니까?”

“복색과 행동이 눈에 익었습니다. 공화국 의회의 개들……굴락의 팔이 분명 하더군요.”

“공화국의 개?”

“은인께서는 공화국의 인물이 아니지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다.

쿤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국 사람과 아닌 사람은 행동에서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 괜히 아니라고 발뺌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를 수 있겠군요. 굴락의 팔은 공왕께서 재위에서 내려오며 공화정으로 나라를 개편하셨을 당시, 의회의 인물들이 나라를 손에 쥐기 위해 만들어 둔 조직을 의미합니다.”

“의회 직속 기관이라는 말입니까? 중앙에서 직접 병권을 쥐는?”

“표면상으로는 공화국 지역을 나누어 경비대와 협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죠. 이들이 의회의 수족에 불과함을.”

“그걸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세이혼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을까?

“……공왕 직속 특수부대, 하푼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공왕 직속? 공화정 이전의……?”

“네. 공왕께서 재위에서 내려와 선거로 당선되기 전, 조건으로 내건 내용 중 하나가 특수 부대의 해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중앙에서 떨어져 나왔죠. 그 사실에 후회해 본 적은 없으나, 의회의 개들이 이렇게 날뛰는 모습을 보자니……아쉬움이 남기는 하는군요.”

특수부대 출신. 일원이라고 말을 하기는 했으나, 단순한 단원일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요직에 있었거나 단장. 혹은 부단장 정도의 위는 지녔었겠지. 쿤이 이해가 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신묘했던 세이혼의 움직임이 납득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다음은 무엇을 물어볼까.

쿤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찰나, 세이혼이 말을 붙여왔다. 물어 볼 내용. 쿤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째서 황녀가 쫓기고 있는 겁니까?”

“……!”

고개를 올린 그대로, 쿤의 몸이 굳었다.

※작가의 말

날이 갑자기 더워져서인지 몸이 찌뿌둥하네요.

* 검은 돌의 효능은 하나가 아닙니다.

* 쿤의 상태는 다음 편에 등장합니다.

날씨가 요상하네요.

다들 건강에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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