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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다들 비위가 대단하네요.”
가이드 셋을 먼저 공간 이동으로 피신시키고 따라온 지호가 피바다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보고 멈추어 섰다. 발 디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지호에게 해일은 가장 의심되는 상황을 확인했다.
“견지호 에스퍼, 서재윤 씨 위치를 확인해 주세요.”
“이 안에선 장소 이동만 가능…… 아, 맞다. 반지가 있었지.”
원래는 재하와 재윤이 나눠 꼈었던 반지를 지호와 재윤이 임시로 착용했었다. 손을 들어 가볍게 움직여 보던 지호는 유난히 끌리는 방향으로 팔을 길게 뻗었다. 자연스레 손이 향한 곳은 도준이 걸어 나온 방향이었다.
어쩌다 보니 도준을 가리키게 된 지호는 뒤늦게 날뛰는 마나 파동을 감지했다. 해일만큼 마나에 민감하지 않았기에 지호는 폭주 상태의 마나 파동이 도준에게서 나온다고 착각했다.
“뭐야, 이건. 이능을 어떻게 써 댔길래 마나가 이렇게 엉망진창이에요? 그런데 되게 멀쩡해 보이고.”
불안정한 마나 파동이 재윤의 것이라 확신한 해일은 멀쩡한 도준이 의심스러웠다.
“주도준 에스퍼, 당신이라면 서재윤 씨의 상황을 알았을 텐데 어째서 혼자…… 재하,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의심에 증거가 더해지자 해일은 도준이 보인 수상한 행동에 관해 물으려 했다. 한데 그 짧은 틈을 기다리지 않고 재윤이 안쪽에 있음을 알게 된 재하가 그리로 뛰어 들어갔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동생의 소식에 무작정 달리는 재하를 쫓으려던 해일은 도준과 남겨질 지호가 신경 쓰였다. 그런 해일을 본 도준의 얼굴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쳐 갔다. 그러다 이내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온 도준이 먼저 제안했다.
“저도 걱정되네요. 다 같이 가 보죠.”
“……위험하면 방어 막을 사용해 주실 겁니까?”
“그야 당연하죠.”
새삼스러운 질문이라는 듯 가볍게 답하는 도준을 살피던 해일이 빠르게 재하를 쫓았다.
협회의 개는 여전히 정의에 예민하구나 싶어 도준은 웃음을 유지한 채 뒤를 따랐다.
부서진 잔재와 시체를 피하느라 재윤이 있는 곳과 가까운데도 거리를 좁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피 웅덩이에 쓰러진 채 재윤은 폭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두려움보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지독한 고통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형……이 왔어.’
재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증스러운 주도준의 목소리에 이어 반드시 이번만은 지켜 내려 했던 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또다시 형을 기만하고 곁을 차지하려는 행태를 보이는 주도준이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기어코 주도준을 죽이지 못한 게 한이었다.
고통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 굳어 버린 목을 열 수만 있다면 형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지켜 주지 못하고 형편없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을.
한편으로는 형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주도준을 형의 곁에서 치워 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제 명만 단축하는 결과를 내 버렸다. 결국 되돌아왔어도 형은 주도준의 손에 떨어져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건가 싶어 억울해졌다.
“재윤아!”
“재하야, 위험해. 언제 폭주할지 몰라.”
“그럼 폭주 못 하게 도와야지.”
“이미 늦었어. 나도 구하고 싶었지만, 소용없는 걸 알고 너에게 가던 길이었어.”
자신에게 달려오려는 형을 붙잡는 도준의 행동이 사뭇 다정하면서도 강경했다.
‘그럼 나의 노력은 뭐였지?’
가이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착각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형을 지키기 위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주도준을 곁에 두었다.
항상 형을 위해 최선이라 여긴 선택이었다. 그 결과, 도준과 함께 서 있는 형을 보게 되는 게 마지막이라니. 애초에 이런 끝밖에 없는 건가 싶어 끝없이 좌절할 것 같았다.
이어 재윤의 좌절을 분노로 뒤바꿀 도준의 연기가 시작됐다.
“재윤이가 대체 왜…….”
“내가 감옥에 갇혀 있었잖아. 빌런들이 네게 몹쓸 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걸 재하 동생…… 재윤이가 알게 되는 바람에 흥분하더니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거야.”
도준이 자신이 행한 끔찍한 살생을 재윤에게 뒤집어씌웠다.
도준의 거짓말은 그럴싸했다. 해일조차도 주변의 참상을 돌아보고는 차마 재윤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 일도 없었어. 너도 알잖아.”
“정말이야? 저자들이 널 두고 얼마나 더러운 소리를 해 댔는데……. 다행이다, 네게 아무 일도 없었다니.”
진심으로 안도하며 웃기까지 하는 도준은 재하에게만 집중했다. 하지만 재하는 그런 도준을 보지도 않고 재윤에게 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가까이 가면 위험해.”
“서재윤 씨 파장이 굉장히 불안정합니다.”
해일과 도준이 양쪽에서 팔과 어깨를 잡고 저지하는데도 재하는 재윤만을 보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놔. 가이딩 하면 괜찮아질 거야.”
“늦었어. 쟤, 얼굴까지 올라왔잖아.”
도준의 말대로 재윤과 유마로에게 나타났던 폭주 전조 증상이었던 검은 그을음이 양팔을 타고 오르다 못해 목과 턱까지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해야지. 해일 형, 형은 알잖아요. 전에도 재윤이가 폭주할 뻔했을 때 제가 가이딩 했던 거.”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는 파동이 불안정한 폭주 전조 상태였지만, 지금은 마나를 잡아 두질 못하는 폭주 진행 상태입니다.”
“그래도 할 거예요.”
망설임조차 없는 재하의 답에 해일은 지금까지 재윤이 제 형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해 왔음을 떠올렸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재하를 내보내고 싶은 건 재윤일 것임을 알기에 해일은 재하를 설득하려 했다.
“지금 서재윤 씨는 심지에 불이 붙어 버린 폭탄입니다. 그 심지가 거의 다 타 버렸다는 걸 알면서 재하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재하 동생도 네가 위험한 걸 바라지 않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좀, 놓으라고!”
그저 잡고만 있을 뿐인데도 에스퍼의 힘을 떨쳐 낼 수 없어 재하가 악을 쓰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재윤에게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 형…….”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고통인 재윤이 흘린 말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짧았다. 재하에게 고통을 내보이지 않으려 참아 내느라 핏줄이 터진 눈은 붉게 변해 있었다.
타인이 보기엔 끔찍한 모습이었으나 재하에겐 아픈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놔요. 난 못 가. 내가 쟤 형인데 두고 어딜 가.”
도준과 해일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재하는 죽어 가는 재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위험하니까 다 가세요. 내 동생은 내가 구할 거니까.”
확고한 재하의 말에 해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빠르게 손을 빼낸 재하가 도준을 쳐다보자 그도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다.
설마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제 동생을 챙길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재하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몸을 가지고 망설임 없이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 재윤에게 다가갔다.
재윤은 핏물에 미끄러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다가오는 재하를 보고 웃어 버렸다. 일그러진 웃음이었지만, 오로지 저를 위해 달려오는 형의 존재가 너무도 기뻐서 그를 위험에 빠트리는 게 자신이라는 자각조차 없이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뻗었다.
“형…….”
“이야, 우리 동생. 진짜 많이 노력했나 봐. 전에 폭주할 뻔했을 땐 의식이 날아갔었잖냐. 지금은 나랑 눈도 마주치고, 정신도 또렷해 보이고.”
가까이서 본 재윤의 상태는 멀리서 볼 때와 달리 최악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는 이전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갈라지며 시뻘건 속살을 드러냈다. 이전보다 훨씬 심각했다. 맞잡은 손을 통해 넘어오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날뛰는 파동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자식, 너무 대단해져서 내가 쪽팔리잖냐. 2차 가이딩 해야 하는데 그렇게 눈 뜨고 있으니까 민망해.”
재하의 너스레에도 재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형을 눈에 담고 싶어 도저히 감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재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하는 아직 잡지 않은 손으로 재윤의 눈을 덮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입술을 겹쳤다.
손바닥을 통해 찌르듯 넘어오던 파동이 입술이 닿자마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목덜미까지 저릿한 통증이 되어 넘어왔다.
확실히 달랐다.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가이딩이 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재윤의 목 안에서 고통을 참는 신음이 끊길 듯 힘겹게 들려왔다. 맞닿은 혀는 마비가 될 것 같은 자극에 어디에 닿은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
재윤의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려 제복을 잡아 뜯었다. 어찌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힘껏 잡아 뜯는데도 단추 하나 튕겨 나오질 않았다. 입이고 손이고 아파 죽겠는 상황에서도 민망해 귀까지 벌게졌다.
간신히 옷을 잡아당겨 맨살로 만들어 낸 후에 제 옷도 끌어 올리려던 재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도준의 기침 소리에 멈칫했다. 위급한 상황에 정신없이 가이딩 면적을 넓히는 데 집중하던 재하는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다른 에스퍼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가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맞붙은 몸 어디도 재윤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임을 가이드의 본능이 감지했다. 한 곳이라도 떨어지면 아슬아슬한 선을 넘어가 흔들려 폭주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집중해야 했다. 정말로 폭탄의 심지가 다 타들어 가기 직전이었음을 몸이 닿고 나서야 확신했다. 한데 자꾸만 잔기침하는 도준이 신경 쓰였다. 차라리 아무도 없다면 더한 접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원망마저 들었다.
해일은 그 어떤 때보다도 필사적인 재하를 보며 필요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재윤을 살릴 거라는 걸 확신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해일은 구석에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마나를 쫓아가 강광을 찾아냈다.
어색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강광의 행동에도 그를 붙잡고 지호에게 돌아와 도준까지 붙잡았다. 지호는 해일의 행동이 의도하는 바를 알아채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세 사람과 접촉했다.
한순간 바람이 불었고, 형제만이 자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