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의 말에 희망을 얻었던 이들이 탈출할 기회가 왔는데도 오히려 절망하는 모습에 재하는 당황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에스퍼들이 우릴 구하러 왔다니까요.”
재하가 그들을 설득하려 해도 이미 결론을 내려 버린 가이드들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요, 여기 온 후로 몇 주가 지났는지 기억도 안 나요. 매일 쉴 틈도 없이 고문이랑 다를 바 없는 짓을……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어요.”
이들이 당한 일에 대해서 재하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2차 가이딩조차 불편해하던 자신은 그저 끔찍했을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남자니까 몸 좀 다치면 어떠냐,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다. 에스퍼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우릴 찾고 있을 거라 믿으며 버텼어요.”
납치된 가이드라는 이유로 이들이 겪은 일은 처참했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떨 만큼 끔찍해하면서도 다른 이를 위해 버텨 냈다는 가이드에게선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서재하 가이드님은 납치된 지 이틀 만에 구하러 왔네요.”
재윤이 이곳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들은 빛을 본 것처럼 들뜨고 기뻐했다. 그러나 다시 가이드들만 남은 상황에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과 앞을 지나치면서도 그들의 존재를 잊은 양 바삐 사라지는 기척들에 점점 불안이 엄습했다.
간신히 떠오른 희망이 눈앞에서 서서히 지워지는 감각은 그들을 빠르게 좌절시켰고, 간신히 눌러두었던 불안을 상기시켰다.
자신들은 버려졌다.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A급 에스퍼와 이틀 전 납치된 가이드. 누가 봐도 서재하를 구출하기 위함임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죽도록 노력했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버틴 걸까요.”
송서림의 고백은 더욱 무겁기만 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가이드들의 우울함에 먹먹해진 재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들을 돕고 싶은데 자신들은 처지가 다르다며 선을 그어 버리기까지 하자 막막해졌다.
납치된 데다 가이드인데도 한쪽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한쪽은 상처 하나 없이 구출될 수 있었다. 상황과 처지가 비슷하였음에도 결과가 달라지자 입장 차이가 명확해졌다. 설득해야 했지만, 재하는 자신을 우위에 두고 있는 이들을 향해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해일은 빌런과 대치 중이고, 지호는 다른 가이드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재윤 역시 어딘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자신뿐이었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재하는 자신이라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기다리지 않을 리 없어요. 가족을 생각해 봐요. 집에 돌아가야죠.”
“하…… 가이드가 안 됐다면 절 길바닥으로 내쫓았을 가족 말이죠.”
벽 쪽에 서 있던 가이드가 지친 것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족이라고 다 화목한 건 아니었기에 재하는 제 예시가 좋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미안해요. 여러분들 사정도 모르고 제멋대로 말해서. 하지만 여러분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분명 있어요. 에스퍼도, 협회도 여러분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만 바라고 있을 거예요.”
“서재하 가이드님은 항상 에스퍼들이 함께해서 소외당한 적 없으시죠. 외모로 차별당하거나 등급으로 멸시당하는 일도 많아요. 그래도 에스퍼에겐 가이드가 필요하니까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외모라면 재하도 평범했다. 오히려 송서림 쪽이 가냘프고 귀여운 이미지라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다행히 송서림은 답을 해 주었지만, 뒤쪽에 서 있던 가이드들은 재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재하는 아직 대화를 끊지 않는 송서림을 보며 다시 설득하려 했다.
“제가 감히 여러분들의 상황이나 다친 마음을 짐작할 수는 없어요. 함부로 공감한다거나 이해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요.”
송서림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며 재하는 진심을 전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죽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버티고 이겨 냈다는 건 알겠어요. 스스로 생존한 여러분들을 이런 어둡고 외로운 곳에 두고 갈 수 없어요.”
재하는 설령 이들이 자신의 말을 오해한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하고자 입을 열었다.
“포기하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잖아요. 지금은 제발 여러분들을 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당신이 뭔데요. 뭔데 우릴 구한다 만다 하는 건데요.”
재하의 말을 부정하면서도 송서림은 울먹거리며 답을 구하고 있었다.
쿠궁. 쿵.
“으악!”
“뭐, 뭐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던 굉음이 벽을 흔들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건물이 비틀리기라도 하는지 수상한 굉음과 함께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아악!”
침대에 앉아 있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가이드가 몸을 웅크렸다. 기력이 약해진 이들이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반사적으로 뛰어든 재하가 몸을 날려 가이드를 감쌌다.
“서재하 가이드님!”
“괘, 괜찮아요?”
“으아, 놀랐네요. 괜찮아요, 저희 둘 다.”
다행히 무너져 내린 천장은 무겁지 않아 두 사람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먼지가 자욱해진 탓에 모두가 잔기침하며 문 쪽으로 향하다 머뭇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각했던 분위기 탓에 선뜻 밖으로 나가질 못하며 주저하게 됐다. 그런 가이드들을 향해 재하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저희 아직 할 이야기가 있잖아요. 일단 탈출해요. 나가서 이야기해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억지로라도 데려가기 위해 송서림의 팔을 잡으려 하자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피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잡을 때는 괜찮았지만, 조금이라도 강압이 가해지면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재하가 다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신중히 손을 뻗으려는데 천장에 깔릴 뻔했던 가이드가 먼저 손을 잡아 주었다.
“여기가 끔찍해서 더는 있고 싶지 않아요. 그뿐이에요.”
“감사해요. 다 같이 이곳을 빠져나가요.”
가이드들은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지만, 재하가 자신들을 위해 노력한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머뭇거리는 이들을 다독여 밖으로 나온 재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아직 몸에 열기가 가득한 해일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걸 보았다.
“다들 무사하신 겁니까?”
“으아, 열기 조절 안 될까요? 근처에도 못 가겠어요.”
재하를 발견하고 안도하는 해일의 뒤로 손부채질 하며 쫓아오는 지호도 보였다. 지호는 재하와 함께 오는 가이드들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재하가 아닌 자신들에게 곧장 다가오는 지호의 모습에 가이드들은 당황했다.
“이분들 먼저 탈출시키고 다시 올게요.”
아직 재윤과 도준을 찾아야 했기에 지호는 쇠약해진 가이드들을 먼저 챙겼다. 다행히 지호가 내민 손을 이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지호가 가이드들과 함께 공간 이동으로 사라지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해일은 앞쪽에서 밀려오는 강렬한 마나 파동에 멈춰 섰다.
콰광! 쾅!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 들려온 소리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폭발 소리에 해일은 재하를 끌어안았다.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놀란 재하가 해일을 마주 안으며 목에 닿은 손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가이딩이 이어졌다.
어제 오늘 이능을 사용할 때 증폭 아이템을 사용한 해일은 마나 사용을 줄인 덕에 버텼지만, 가이딩은 언제든 에스퍼를 무장 해제 시켰다. 등 뒤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마나에 대피해야 함에도 재하를 끌어안은 손을 놓기 힘들었다.
소리에 놀라 굳어 있던 재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해일을 밀쳤다. 가이드가 밀친다고 에스퍼가 밀릴 리 없었으나 해일은 언제나처럼 재하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 탓에 재하는 겁도 없이 거대한 마나 파동이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저쪽에 도준이가 갇혀 있어요!”
친우인 도준을 언급한 이상 성급히 말릴 수도 없게 됐다. 해일은 재하를 지키기 위해 그의 뒤를 바싹 붙어 따랐다.
그렇게 재하와 해일은 원하던 장소에 가까워졌다. 뜯긴 벽과 처참한 시체를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앞만 보던 재하는 발 디딜 틈 없이 핏물이 고인 복도 앞에서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저 안에 있을 도준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그가 살아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이 많은 사람을 죄다 죽인 자가 남아 있을지 몰라 두려웠다. 이영우는 폭탄을 이용하기에 이런 식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재하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해일은 조심스럽게 어깨를 끌어당겼다. 폭발이 잠잠해졌음에도 여전히 마나 파동이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폭주 전의 에스퍼가 근처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하를 피신시켜야 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충동을 누르며 그가 놀라지 않게 조심했다.
“주도준 에스퍼는 제가 찾아 볼 테니 일단 탈출을…….”
“도준아!”
해일이 도준의 마나를 알아채는 것보다 빨리, 언뜻 비친 그림자를 보고 확신한 재하가 그를 불렀다. 아직 메케한 연기가 남아 있는 공간에서 도준이 핏물을 밟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움츠려 있던 재하가 도준을 발견하고는 거침없이 피 웅덩이에 발을 들였다.
“재하야…….”
도준이 콜록거리며 목을 쥐고 있자 급히 다가선 재하가 손을 잡아 치우려 했다.
“목을 왜 잡고 있어? 다친 거야?”
“아니, 좀 놀라서.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니? 좀 봐 봐. 왜 자꾸 감추는 건데?”
“감추는 거 없어. 그보다 여기 연기 때문에 힘들지 않아? 탈출해야 할 거 같은데.”
도준은 동의를 구하듯 해일을 바라봤다. 그러나 해일은 도준이 아닌 그 너머를 바라보다 다시 도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주도준 에스퍼, 안에 누가 있습니까?”
안에 생존자가 있냐는 의미가 아니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폭주 위험을 알리는 엉망진창인 파동이 지나치게 거대했다. 빌런 아지트에 저 정도의 파장을 가진 이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있었다면 도심 게이트를 터트렸을 때나 협회에 쳐들어왔을 때 활약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재하를 먼저 피신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해일의 굳은 표정을 본 도준은 인상 좋아 보이는 얼굴로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안에 곤란함도 섞여 있어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도준의 행동은 의도적인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모두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안에 누가 있길래 그래?”
도준을 신뢰하는 재하는 단순한 호기심을 보였지만, 해일은 그의 행동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도준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