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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뀌지 않는 것
이전이었다면 해일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으나 지금의 재윤은 명확한 답을 줄 수 없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주도준의 악행을 말할 수 없는 건 이번 일과 큰 연관이 없었다. 형이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첫 가이딩을 하는 이가 다른 에스퍼라는 걸 용납할 수 없어 달려온 것뿐이었다.
며칠 전, 폭주 직전까지 몰렸던 자신을 형이 가이딩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상대가 누군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주어지는 가이딩에 매달렸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머리부터 씻겨 내려가는 감각은 바닥으로 처박혔던 의식을 끌어 올렸다. 확실하게 정신이 들지는 않았어도 통증을 밀어내는 가이딩이 닿아 있는 입술을 통해 넘어오고 있음은 인지했다.
좀 더 접촉해야 편해질 수 있다는 걸 몸이 먼저 깨달았다. 기꺼이 먼저 접촉하기 위해 움직이자 물컹한 감촉과 함께 가이딩이 쏟아졌다. 떨어지려는 기색이 느껴지자마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끌어당긴 것 역시 살기 위해서였다. 떨어지지 말라며 가볍게 깨물었던 것까지도 기억에 있었다.
다만 그 감각이 어땠냐고 한다면 그저 구원이었다. 삶으로 이끌어 준 것에 감사하고 놀랐을 뿐, 정상적인 사고가 흐를 만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오로지 본능이 이 감각을 놓쳐선 안 된다고, 온몸으로 상대를 잡아야 함을 알렸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그간 형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지켜 줄 수 있는 에스퍼라면 몇 명이든 곁에 두려 했던 재윤이었다. 한데 너무도 당연하게 해 왔던 일들이 갑자기 견딜 수 없게 돼 버렸다.
그건 흔히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가지는 독점욕이었다. 동생이 형에게 가져선 안 될 욕구였다.
붉어진 재윤의 반응을 오해한 해일이 그를 위로했다.
“서재윤 씨, 당신이 얼마나 재하를 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늦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잘 버티셨습니다.”
해일의 말은 틀렸다. 지금의 재윤은 해일이 제시간에 도착했더라도 그를 제치고 형의 옆에 서려 했을 것이다.
위로나 격려에도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재윤을 본 해일은 한 발 물러섰다.
“게이트는 제가 갈 테니 서재윤 씨는 안정을 취하십시오.”
“……조금만 쉬다 갈게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해일이 방을 나가자 벽에 기대서 있던 재윤이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동안 형의 가이딩을 피한 건, 거부감 때문이었다. 동영상 속 형의 고통과 희생이 떠올라 도저히 가이딩을 받을 수가 없었다. 트라우마가 돼 버린 기억이 각성 후 형과 닿는 걸 피하게 했다.
“이게 뭐야…….”
회귀 전에 재윤은 항상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형에게 가이딩을 받아 왔다. 그랬기에 막연히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것과 비슷한 감각일 거라고 짐작만 해 왔다. 몸을 이완시키고 때로는 자극이 되는 가이딩은 편리하면서도 손쉬운 쾌감을 불러왔다.
다른 가이드 역시 가이딩을 하다 흐물대거나 에스퍼에게 매달리기 일쑤였다. 가이딩을 하며 체력을 빼앗기고 에너지가 고갈되니 흐트러지기 쉬웠고, 에스퍼의 욕구에 쉽게 휩쓸리면서 달라붙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걸 타인의 앞에서 시현한다니 불안했다. 재하는 그런 감각을 모르는 듯했지만, 에스퍼 쪽은 불안했다. 재윤은 고통을 참아 내던 익숙함으로 묘한 감각이 들더라도 드러내지 않고자 각오를 다졌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한 형과의 가이딩은 예상과 달랐다.
“전혀 다르잖아.”
형은 다른 가이드와 전혀 달랐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무릎에 묻고 애써 감각을 털어 내려 했지만, 눈을 감으니 맞닿았던 손바닥에서부터 빠르게 스며들던 상냥한 가이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형은 진짜 다른 게 맞았구나.”
형이 일반적인 가이드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걸 지켜봤기에 알고 있었다. 지나친 가이딩 끝에 기절하듯 잠드는 때는 있어도 열이 올라 들뜬 얼굴을 하거나 에스퍼에게 매달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형이 하는 무심한 가이딩에 에스퍼가 보인 소유욕은 그들이 감추려 해도 자신의 눈에 보였다. 특히 행동하는 데 절제가 없는 견지호는 형의 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만큼 욕구를 드러내 왔다.
자신이 육욕에 휘둘리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형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맨정신으로 형에게 받은 가이딩은 전혀 달랐다.
포근하고 상냥했다. 손끝에서부터 거침없이 밀려오는 파동은 불순물이 뒤섞인 몸을 씻어 내며 감싸 왔다. 괜찮다고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다정했다. 혼자 아파하게 두지 않을 거라는 듯 강하게 밀려드는 감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면서도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가이딩이 마치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건, 그냥 형이잖아. 이걸 어떻게 양보하라고.”
재윤은 손에 남은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해서 떠올렸다.
가이딩이라는 게 이렇게나 포근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항상 자신을 챙기고 보살펴 온 상냥함이 고스란히 담긴 가이딩은 지난 몇 년간 유일한 가족이었던 재하 형, 그 자체였다.
* * *
바닷바람과 안개에 가려진 무인도. 이곳에 자리 잡은 빌런 아지트가 떠들썩했다.
도심 한가운데의 미발현 게이트를 동시에 열어 버린 이영우의 충격적인 행보에 모두가 흥분했다.
다른 때라면 각자 자기 위치에서 힘을 비축한다는 핑계로 늘어져 있을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번 일에 대해 떠들어 댔다.
“이야,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 아주 크게 될 놈이란 걸 난 진작부터 알아봤지.”
“저번엔 건방지다면서?”
“어허, 대범하고 멋있단 소리지! 하여간 이 새끼는 눈치가 없어.”
이영우가 없는 자리임에도 그를 험담하는 건 조심하는 분위기가 생길 만큼 이번 일은 의미가 컸다.
도심지에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가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이 혼란에 빠지고,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을 수놓은 전투기가 쏘아 댄 미사일도 통하지 않는 거대한 마수의 등장에 희열마저 느꼈다.
이영우의 능력과 대범함에 우려를 표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통쾌해했다.
오죽하면 평소 협회 측 에스퍼의 활약에 불만만 표하던 이들이 TV 앞에 앉아 이영우를 칭찬하며 에스퍼의 위상이 높아진 것에 흥분했다. 특히 마지막 게이트가 열리며 거대한 황금 거북이가 등장하는 장면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재방송되고 있었다. 더불어 재윤이 아이템을 장착하고 이능을 사용하는 모습도 꼭 함께 방송을 탔다.
“저 아이템은 뭐길래 저렇게 세냐? 쟤, B급 아니었나?”
“어, 맞아. 저것들 깨끗한 척하는 건 맘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에스퍼가 얼마나 강한지 다들 알아야 한다고.”
“와, 저거 골든 터틀인가 뭔가 하는 건 다시 봐도 무섭네. 어떻게 저런 능력자가 우리 조직에 들어왔나 몰라.”
“서울 중심에서 게이트 열어 버린 거 보면 모르냐? 쟤도 우리 과인 거지. 또라이 새끼.”
도심지의 게이트 발현 사태로 인해 에스퍼 협회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건진 수확도 있었다.
의식 없는 A급 에스퍼 유마로와 그를 가이딩 하기 위해 함께 있던 가이드 셋. 특히 가이드를 납치한 건 무척이나 유용했다.
평소 빌런들은 정신계 에스퍼인 조직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에게 폭주 직전 도움을 받아 왔다. 가이딩과는 달리 심신 안정을 통해 마나 파동을 가라앉히는 식이라 효율이 좋지 않아 휴식 시간이 길었다. 그런데 납치한 가이드를 통해 강제로 가이딩을 취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항상 힘을 아껴야 했던 에스퍼들은 힘이 넘쳐 났고, 이로 인해 그간 미뤄 왔던 계획들이 하나둘 실현 가능성을 비치자 미리 축배를 드는 이도 있었다. 실상 고만고만한 마나였기에 가능한 회복이었지만, 실제로 협회 에스퍼를 상대한 적 없는 어설픈 이들의 기고만장함은 하늘을 찔렀다.
“아, 가이딩 하고 싶다. 다음 순서는 언제 돌아오려나.”
“눈치껏 사람 없을 때 다녀와. 빨리 끝내는 놈도 있더라.”
“하긴, 어차피 돌려보낼 인질도 아닌데 좀 험하게 써도 되겠지.”
그로 인해 착취당한 가이드의 괴로움 따윈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재윤이 애쓰지 않았다면, 에스퍼 협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저급한 대화를 듣게 된 이영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던 이들이 지나가던 그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오, 이영우! 네 덕에 요즘 살맛 난다.”
“오늘도 잠탱이한테 가는 거냐?”
“쉬엄쉬엄해라. 가이딩도 좀 받아 가면서 하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이들의 부름에 이영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장 손에 넣고 싶어 했던 재하를 놓친 탓에 그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사전에 가드와 접촉해 통신기 제어 장치에까지 손을 대게 하고 재하가 머물고 있을 숙소를 찾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설마 재하를 위험한 게이트 현장에 데려간 건가 싶어 급히 움직였지만, 도심에 설치한 포털은 포털 능력자인 우양희가 더미로 만든 가짜 폭탄을 뿌리고 닫아 버렸다. 사전에 이야기된 그대로 행한 터라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재하를 데려갈 수 없게 된 이상 이득을 볼 방향을 찾다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재하의 친구와 어딘지 익숙한 곱슬머리를 쫓다 의식을 잃은 에스퍼와 기분 좋은 파동을 가진 가이드를 발견했다.
격리실은 가이드와 기절한 에스퍼뿐이라 가벼운 협박도 통했다. 시간이 걸리는 포털 설치에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손쉬운 납치였다.
다만 아쉬웠던 건 크게 활개 친 탓에 미발현 게이트와 포털까지 확인 가능한 마나 파동 측정기가 온갖 곳에 설치됐다는 점이었다. 지방까지는 아직 미비했지만, 영우가 원하는 건 재하였다. 다른 지역 따위 관심 밖이었다.
그나마 흥미를 끄는 건 잠든 유마로의 존재였다. 아무리 고통을 주고 해독약을 먹여도 깨어나지 않았다. 신체 활동은 유효한데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뭐가 널 잠재운 거니?”
데려오자마자 위장을 투시하고 투과로 직접 확인해 봤으나 위액 외에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 후엔 피와 살을 조금 취해 여러 검사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특별한 건 나오지 않았다.
무얼 썼든 며칠이 지나 찾아내기도 힘들었다. 영우의 관심은 이제 뒤엉킨 것처럼 엉망진창인 마나 흐름 쪽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됐는데도 아직 터지지 않았다니, 신기해. 잠들어 있는 거랑 관련이 있는 거겠지?”
대답 없는 유마로에게 말을 걸며 영우는 소매를 걷었다.
“마나 흐름을 직접 되짚어 보면 뭘 좀 알 수 있으려나…….”
오늘도 영우는 투시와 투과로 유마로를 관찰하고 실험하며 재하가 없는 무료함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