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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지호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우연 혹은 필연이었다.
“어? 저게 뭐지?”
시작은 최근 새로 사귄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중 하늘에 나타난 검은 균열이었다.
길 한복판에 갑자기 멈춰 선 지호의 행동에 여친은 의아해했다.
“왜? 하늘에 뭐 있어?”
“하늘이 찢어졌어.”
“하늘이? 그냥 파랗기만 한데? 오늘 날씨 진짜 좋다. 우리 데이트 잘하라고 하늘까지 돕나 봐.”
이상했던 건 여친을 포함해 누구도 그 이상한 균열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상한 걸 보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 우리 다른 거 먹으러 갈래? 지금 가는 데 웨이팅이 너무 길 거 같아.”
“나 배 안 고파. 카페 가도 돼.”
“그래. 그러자.”
지호는 망설임 없이 여친과 자리를 피했고, 간발의 차이로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다. 폭음 후 이어진 비명과 함께 도망치는 사람들을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봤다.
“세상에. 무슨 일이람?”
“그러게. 너 놀랐겠다. 집에 바래다줄게.”
“무슨 소리야? 데이트는 이제 시작인데. 카페 갈 거야.”
첫 데이트인데 그럴 수 없다는 강심장 여친의 투정에 한 블록 떨어진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 앉아서도 지호는 자신에게만 보인 검은 균열과 폭발이 신경 쓰였다. 여친에게 신경 써야 함에도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
“지호 너, 오늘따라 되게 산만해.”
“아, 미안. 아까 폭발이 신경 쓰여서.”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겁쟁이네, 지호는.”
겁쟁이라 말하며 지호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톡톡 두드린 여친은 디저트 하나로 부족하다며 자리를 비웠다. 배고프지 않다더니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지 의욕적이었다.
때마침 울린 벨 소리에 지호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1년 넘게 만나 온 여친에게서 이미 몇 통째 전화가 와 있었다.
지호의 여성 편력은 유명했다. 그와 사귀는 여자들 역시 그 사실을 이해한 후 만남을 이어 왔다. 항상 지호는 그녀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 중 핸드폰을 잘 보지 않는 지호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이런 식의 연락만으로도 마음이 식었다. 가장 긴 기간 만나 오면서 쿨한 모습이, 꽤 마음이 맞았던 연상 여친이었다. 그랬던 상대가 갑자기 선을 넘는 게 의아했다.
지호는 평소의 룰을 깨는 게 신경 쓰였지만, 새로 사귄 여친이 돌아오기 전 통화하자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무슨 일…….”
― 지호야, 사랑해!
다짜고짜 사랑한다는 외침에 지호의 걸음이 멈췄다. 사랑한다는 말은 지호에게 일상이었다. 관계를 기분 좋게 해 주는 윤활제 같은 역할이라 특별한 것도 없었다.
다만 비명처럼 내질러진 고백 뒤로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비명과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어디야?”
― 흑, 갑자기 폭발이 일더니 웬 미치광이가…… 지호야, 나 너 사랑해.
“알아. 아니까 누나 지금 어디냐고.”
― 여기, 나 알바하는 레스토랑인데 어디냐면…….
“어딘지 알아. 위험한 거 같은데 숨어 있어. 바로 갈 테니까.”
― 아냐, 오지 마. 지금 웬 미친놈이 다 부수…… 꺄악! 오, 오지 마!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지호는 내달렸다.
지호의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다. 그랬기에 여러 여친이 있어도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애정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장 위기에 빠진 여친의 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발을 내딛자 주변이 환해지면서 도착한 곳은 사방이 부서져 나가고 있는 레스토랑 안이었다.
분명 외부로 뛰어나왔는데,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에 도착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할 틈도 없이 바닥에 꽂혀 있는 식탁 뒤에 숨은 여친, 이희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
“꺅! 살려 줘!”
깨진 핸드폰을 바들거리며 붙든 희진을 지호가 붙잡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나, 나야.”
“어, 어떻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문 다 부서져서 못 들어오는데.”
겁에 질려서도 어리둥절한 희진의 말에 지호는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방향을 돌아봤다.
문이 있어야 할 곳에 문이 없었다.
“그러게. 어떻게 온 거지.”
“그, 그보다 빨리 숨어. 미치광이가 다 집어 던지고 있어.”
희진의 말에 식탁 너머를 보니 한쪽에서 마구 벽을 내려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상체나 튀어나올 것 같은 근육을 보니 초록색이 아닌 헐크는 헐벗은 느낌이라 보기 곤란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시바알! 다 죽어!”
그의 주먹질 한 방에 벽이 숭숭 뚫리며 고층 빌딩의 전경이 훤하니 드러났다. 분노 조절이 안 되는 한국산 헐크가 이쪽으로 오기 전에 희진과 함께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상체만 근육이 아니었는지 마구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이쪽으로 사정없이 달려왔다.
“지, 지호야!”
지호는 희진을 안으며 한 발 내디뎠다.
필요조건이 문인지 벽인지 아니면 움직임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생각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희진은 마지막 순간을 각오하고 지호를 꽉 붙들었다.
폭신.
몸을 내던지자 떨어진 곳은 푹신한 양털 러그 위였다.
희진은 쿨한 외모와 행동과 달리 집 안 곳곳을 폭신하고 귀여운 것들로 채워 놨다.
“흐윽, 흑.”
“누나, 괜찮아. 눈 떠.”
“흐……윽? 어? 우리 집?”
“응, 누나 집이야.”
희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했다.
그에 반해 지호는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희진이 위기에 빠졌던 것처럼 다른 여친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대부분은 지호가 먼저 연락한 걸 반가워하며 빠른 답을 주었으나 몇 명이 부재중이었다.
지호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아까처럼 가고자 하는 곳을 생각한 것만으로 그의 시야가 달라졌다.
다행히 한 명은 낮잠을 자고 있어 조용히 물러났고, 다른 한 명은 소란 통에 발목을 접질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지호는 갑자기 자신에게 생긴 능력에 대해 빠르게 파악했다.
가고자 하는 장소를 상상하고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람을 떠올리자 그와 가까운 곳에 도착했다.
갑자기 왜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몰라도 지금까지보다 여친이 늘어나더라도 약속 지키기는 더 수월해지겠다는 생각 따위를 했다.
여친 목록을 죽 내리던 지호는 썸 목록에 떠 있는 유일한 남자 이름 앞에서 손이 멈췄다.
재하 선배와 제하 선배가 헷갈려 ‘서재하 선배님’으로 바꿔 둔 이름 위를 쓱 문질렀다.
“서재하 선배…….”
먹을 걸로 공략해 놓고 방치하는 솜씨가 제법 끌렸다. 웬만큼 좋은 고기는 다 먹어 본 지호였지만, 재하가 해 온 반찬은 감칠맛부터가 달랐다. 숙성된 돼지고기를 여럿 먹어 봤어도 이렇게나 부드러운 고기는 처음이었다. 학식에서 종종 특식으로 나왔던 고기와도 유사하면서 더 가정적인 맛이었다.
식사 때마다 매일 재하를 떠올리게 되니 공략해 왔다면 바로 넘어갔으리라.
자신에게 여친이 많지 않았다면 먼저 연락하고도 남을 만큼 솜씨가 좋았다. 그만큼 재하에 대한 호감도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확인이나 해 볼까.”
이왕 살피는 거 몇 명 안 되는 썸 타는 이들까지만 확인하자 싶어 연락을 돌렸다. 다행히 전원 칼답이었으나 마지막으로 연락한 재하만이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재하도 이런 폭발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그건 좀 싫을지도.”
썸 타는 사이에서 굳이 지호가 상대를 지키거나 챙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럴 바에는 내 사람이 된 여친들을 살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전부 확인한 후였고, 유달리 연락 없는 재하가 신경 쓰여 지호는 피곤해진 몸을 일으켰다.
장소보다는 인물을 떠올리며 움직이기 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빠르게 점검했다.
너무 꾸민 모습보다는 적당한 게 낫겠지 싶어 살짝 머리를 털어 내렸다가 그래도 신경 쓴 티를 조금은 낼까 싶어 반쯤 깠다. 남자를 만나러 가는 건 처음이다 보니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 봤자 자신을 꾸미는 데 능숙한 지호였기에 짧은 시간이었다.
성별보다 호의가 먼저라는 게 신기했다.
여자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톡톡 튀는 때도 있지만, 각자의 매력이 있었다. 소유하고 목을 매이는 건 질색이지만, 연애는 즐겼다.
다행히 견지호의 외모는 상당수에 통했고, 이젠 동성 선배까지 꼬여 들었다.
남자는 항상 그를 시기하고 견제하는 부류뿐이었기에 지호는 설렘을 주는 존재가 새롭게 느껴졌다.
새로운 건 즐거운 것이기에 재킷까지 바꿔 입은 후에야 지호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아파트 단지였다. 다만 그 바람 속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는 게 의아했다.
“터진다, 피해!”
“재하야!”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폭발음이 들려왔다.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달리던 재하가 앞으로 나뒹구는 걸 받아 낸 지호는 망설임 없이 눈에 보이는 옥상으로 이동했다.
‘발을 내딛지 않아도 되네.’
생각한 것만으로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
품에 안긴 재하의 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른 때라면 여친이라 해도 요령껏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더 달라붙고 싶었다. 이동할 때마다 누적된 피로감 때문인지 몸이 축축 처지는데도 그조차 기분 좋은 나른함이었다.
“정말 귀엽네요, 재하 선배님은.”
“너, 너 뭔데? 설마 니가 날 옮긴 거야?”
당황했으면서도 상황 파악이 빠른 재하가 귀엽게 느껴졌다. 지호는 대답 대신 재하의 젖은 목덜미에 슬쩍 코끝을 문지르며 깊이 끌어안았다.
“윽, 야. 징그러워, 떨어져.”
“하아, 선배님. 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잠깐만요.”
지호는 이상하리만치 재하에게 좀 더 달라붙고 싶었다. 땀에 모래까지 섞인 목덜미 따위 닿는 것도 질색이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닿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맨 피부에 닿고 싶어 코로 쿡쿡 찔러 대자 흠칫거리는 반응도 귀여웠다.
“윽, 찌르지 마.”
“선배님, 너무 야해요.”
“야한 건 니 머릿속이야, 미친놈아!”
재하가 몸부림칠수록 지호는 더 악착같이 그를 끌어안았다.
움직일 때마다 스치는 목, 뺨, 귀, 손목, 손. 재하와 스칠 때마다 돌덩어리를 매단 듯 무겁기만 했던 지호의 몸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이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느끼는 진정한 편안함인가?
지호는 새삼 감정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며 재하를 더욱 열심히 끌어안았다.
“아, 좀! 놓으라고!”
비명에 가까운 재하의 짜증에 옥상 문이 큰 소음을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