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재하는 필사적으로 끔찍한 주변 환경을 외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힘이 생긴 영우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에게 다가오려다 방해받자 사람 하나를 날려 버렸다. 죄책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영우 선배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 하여튼 일반적인 사람이 아냐. 나에게 보이는 호감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름 머리를 굴려 봐도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재하는 최대한 감정을 빼고자 노력했다.
“선배가 사람을 해쳤잖아요.”
두려워하는 모습은 어설프게나마 감췄으나 지나치게 직접적이었다. 실수했나 싶어 재하의 눈이 흔들리는데 정작 영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게 문제가 되니?”
재하는 마구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걸 참고 조심스럽게 한 번만 끄덕였다. 그런 재하를 빤히 쳐다보던 영우는 고개를 좌우로 까닥이며 고민했다. 몇 번 까닥거리다 답이 나오지 않는지 또다시 벽을 퉁퉁 두드렸다.
“이상해라. 나보다 저 사람이 중요할 리 없는데.”
영우가 혹시나 돌발 행동을 할까 싶어 재하는 빠르게 말을 걸었다.
“선배, 손이요.”
“응?”
“그러다 다쳐요.”
본인을 걱정할 때 기뻐하는 걸 알기에 고른 말이었다. 역시나 영우는 더는 방어 막을 두드리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방어 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재하야, 빨리. 쟤한테 이거 치우라고 해. 가까이 가고 싶어. 손잡자. 응?”
“서, 선배. 손 다친다니까요.”
“응, 걱정해 줘. 좋아. 더. 더. 더. 재하야, 응? 나랑 손잡자. 쟨 보내고. 응? 재하야, 빨리.”
웃고 있는데도 기이하게 비틀린 영우의 웃음에 재하는 설득이고 뭐고 턱에 힘이 들어가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준이 단단하게 허리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자꾸만 힘이 풀리는 다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걸 또 눈여겨본 영우가 신경질적으로 방어 막을 두드렸다. 방어 막 안에 있는데도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착각이 들 만큼 집착적으로 두드리는 영우 탓에 잠들었던 도림이 뒤척였다. 이에 정신을 차린 재하가 반걸음이지만 앞으로 움직였다. 도준의 품에서 빠져나오긴 했어도 여전히 허리에 손이 감겨 있었다.
“선배, 우리 대화로 풀어요.”
“대화?”
고작 재하가 말을 건 것만으로 거짓말처럼 영우의 두드림이 멈췄다.
“네, 선배. 전 지금 선배가 무섭고, 선배는 제가 왜 무서워하는지 이해 못 하잖아요. 제가 선배를 이해할 수 있게 대화해요.”
재하가 간신히 웃는 얼굴로 꺼낸 말에 영우는 손을 ‘탁’ 치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알았어. 앞으론 재하 앞에선 피를 보이지 않을게. 그럼 이제 해결됐으니 나한테 오렴.”
“아뇨. 전 선배가 사람을 해쳤다는 거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렇구나. 하지만 이번엔 이유가 있었잖니.”
“아무리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사람을 해치면 안 되잖아요.”
“그럼 내가 죽었어야 했니?”
도망치는 선택지는 없는 영우의 질문에 재하는 빠르게 부정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도망칠 수도 있었잖아요.”
“아까도 말했잖니. 폭탄이 그냥 터졌으면 재하 너도 다쳤을 거야. 죽을 수도 있었어. 쟤가 안고 있는 꼬맹이도 무사하지 못했을걸?”
영우가 도림을 언급하자 도준이 숨을 삼키는 게 붙어 있는 등을 통해 느껴졌다. 재하는 눈앞의 영우뿐 아니라 도준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건 가정이잖아요, 선배. 그러니까 이건…… 진짜 상식적인 이야긴데.”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지극히도 상식적인 일을 전하는 게 이다지도 힘든 일일 줄 몰랐다.
연우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재하는 심신이 지쳤다. 그를 설득할 만한 말은 떠오르지 않고, 영우의 말에 자꾸만 귀가 기울었다. 이대로 대화를 그만두고 싶었다.
“재하야, 그만큼 했으면 됐어.”
“어?”
다정하게 부르며 끌어안아 오는 도준의 행동에 재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준이 어딘가를 가리켰고, 그제야 재하는 영우에게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중무장한 경찰들. 두꺼운 방호복을 입은 폭발물 처리반까지 영우의 뒤쪽에서 둘러싸고 있었다.
“손 들고. 천천히 뒤돌아서.”
도망친 주민들이 신고한 결과였다.
재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이렌 소리가 지척까지 가까워진 후 사라진 걸 알아챈 재하는 도준이 영우를 자극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곧 경찰이 올 거라는 기대로 재하가 나서서 시간을 끌어왔다. 영우를 도발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에게 느리게 말을 건 이유였다.
“이런. 재하랑 손잡고 싶었는데 아쉬워.”
영우는 그를 향해 저격용 붉은 빛까지 쏘아지는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재하에게 집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재하를 보고 웃으며 돌아서려던 영우의 주머니에서 검붉은 구슬이 언뜻 보인 것 같았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불러 세웠다.
“영우 선배!”
영우의 표정은 예의 익숙한 대외적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걸 본 재하는 최선을 다해 영우가 원하면서도 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을 쥐어짜 냈다.
“선배, 다치지 마세요.”
재하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벌어진 주머니 틈으로 보인 구슬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며 드러낸 재하의 감정은 마치 영우를 진심으로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들을 향해 만들어 냈던 영우의 그린 듯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제발. 그냥 선배가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폭탄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깃든 말이었다. 어떤 말도 영우에게 통하지 않으니 그가 가장 원하는 말에 본뜻을 섞어 전했다.
재하의 말에 진심을 느낀 영우의 웃음은 더없이 해맑게 변했다. 환하게 빛나는 웃음과 함께 눈마저 반짝일 정도로 행복해했다.
“역시. 너뿐이야.”
영우가 완전히 등을 돌린 후에야 그에게 집중하던 재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더 없다던 폭탄 구슬이 영우의 주머니에 있는 걸 봐 버린 재하는 불안해졌다.
‘균열의 틈에서 꺼낸 것 하나만이 아니었어?’
재하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 바닥은 이미 얼룩덜룩해 무언가를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든 영우는 순순히 경찰의 요구대로 움직였고, 수갑까지 채워졌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묵비권을…….”
“아야, 아픈데요.”
엄살을 피우는 영우에게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미란다 원칙을 읊은 경찰이 영우와 함께 멀어졌다.
그때까지도 도준은 방어 막을 유지했다. 영우가 경찰차에 올라타는 걸 보고 나서야 방어 막을 해제했다. 시원한 공기가 통하며 답답함이 해소되자 도준의 굳은 표정도 금세 풀렸다. 그 사이 재하는 정신없이 바닥을 살폈다.
“하아. 오늘 하루 진짜 정신없다.”
도준이 걷기 시작하자 방금까지도 품에서 잘만 자던 도림이 칭얼거렸다.
“웅…… 졸려.”
“그래, 집 다 왔어.”
“하암…….”
가볍게 달래자 도림은 금세 다시 도준의 품에 기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던 도준은 멈춰 서서 기다려도 재하가 들어오지 않아 당황했다. 돌아보니 아직 저 멀리에서 재하는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아니, 아무래도 영우 선배가 가진 게 그것만이 아닌 거 같아서.”
“뭐?”
“검붉은 구슬이 주머니에서 보인 거 같았는데. 마치 저런…… 거?”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워낙 색이 튀어 집중하고 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
핏자국 사이사이 떨어져 있는 구슬들. 하나가 아니었다. 막이 둘린 곳을 따라 몇 번이고 걷던 영우의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와, 밖으로 나오라더니. 이런 짓을 해 놨어?”
분명 검은 틈, 균열이 보이지 않는다며 투덜댔던 영우였다.
‘페이크였나.’
영우의 꼬드김에 밖으로 나갔다면 자신과 도준을 죽이려던 것이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영우는 계속해서 재하를 붙잡고 싶어 했다. 자신을 데려가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도준이 방어 막을 없앤 후 그를 죽일 심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데다 다소 둔하기까지 한 재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
경찰차가 떠남과 동시에 둥그렇게 떨어져 있던 검붉은 구슬들이 동시에 붉게 달아올랐다.
경악한 재하가 몸을 피하려 움직이는 순간, 도준 역시 곧 터질 것처럼 붉게 점멸하는 구슬들을 발견했다.
“야, 이거 터진다! 피해!”
“재하야!”
하필 서로 구슬의 폭발 범위 정반대에 서 있었다.
도준은 다급히 재하를 향해 달렸으나 막을 두른다 해도 버틸 수 있을지 몰라 두려움이 엄습했다.
본능적으로 힘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기준으로 주변에 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폭탄이 터지는 범위 양쪽으로 두 개를 만들어 낼 수 있나? 일단 재하의 곁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달렸으나 품에 안긴 도림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펑! 퍼펑!
“윽!”
도준의 불길함은 틀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방어 막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주변뿐, 재하를 향한 폭발을 막았는지 의문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몇 번의 폭발이 더 이어졌다. 다행이었던 건 예상외로 그 폭발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폭발 상황을 옥상에서 지켜보게 된 재하는 이 상황이 대체 뭔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뭐, 뭐야. 여기까지 폭발에 날아온 건 아닐 거고.”
“재하 선배님, 귀여운 생각을 하시네요. 아, 원래 귀여우시니까 당연한 건가.”
능글맞은 목소리에 이어 달콤한 향수 냄새.
개호. 니가 왜 여기서 나와?
견지호의 품에 안긴 채 옥상 난간을 내려다보고 있는 재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