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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대학 내에서도 여자들이 견지호에게 홀려 다른 남자를 돌 보듯 해 서러웠다. 한데 기껏 소개해 주는 게 같은 성별이니 눈물이 앞을 가릴 판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 악수하자는 거 아니었나.
‘왜 계속 손을 잡는 건데?’
여전히 해일에게 단단히 잡힌 손을 빼기 위해 재하는 핑계를 댔다.
“저도 청소해야 해서 들어가 볼게요.”
“이곳 공기가 좋지 않군요. 전문가에게 맡기고 안전한 곳에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가 안전하지 못할 건 또 뭐냐 싶던 차에 마침 누군가 공기 청정기를 켜기가 무섭게 죽을힘을 다해 돌기 시작했다.
“자, 밖으로 나갑시다.”
“예? 아, 저기요.”
해일이 가볍게 이끄는데도 어찌나 요령이 좋은지 재하는 자연스레 문밖으로 끌려갔다. 이럴 때면 재윤이 나서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돌아보자 가관이었다.
그곳엔 마치 장성한 아들을 장가보내는 듯한 아련한 눈빛의 동생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다. 그 눈은 팔려 가는 소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재, 재윤이도! 데려가야죠!”
혼자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외친 재하였다. 그러나 재윤은 재하의 간절함을 오해했다.
“역시 형은 날 먼저 챙기는구나.”
엉뚱한 포인트에서 감동하는 재윤에게 재하는 차마 혼자 팔려 가는 거 같아서 붙잡은 거라 말하지 못했다.
해일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역처럼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가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타 버린 벽지를 뜯어내고 도배까지 새로 하는 동안 가기 싫어하는 도준과 영우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좀 숨을 돌리나 싶어 재하의 표정이 풀어지자 해일이 웃는 얼굴로 권해 왔다.
“그럼 청소가 끝날 동안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제가 자주 가는 곳이 룸이라 편히 식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낮에 당한 견지호의 느끼한 유혹과는 달리 정중한 해일의 태도에도 재하는 경계심이 일었다. 자꾸 어디로 데려가려는 남자의 행동과 그걸 또 말리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재윤의 반응에 더욱 의심이 커졌다.
“저 모르는 사람이랑 밥 안 먹어요.”
“우리 매일 봤는데.”
방금까지 존댓말을 해 오던 해일이 신뢰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헛소리를 편하게 해 왔다.
“저랑 매일 보는 사람은 없는데요.”
“빌힐 님.”
“윽, 네, 넵?”
공익 포스터에 나올 것 같은 상큼한 미소를 지은 해일의 입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게임 네임에 재하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해일의 웃음은 더욱 깊어지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빌면힐준다’ 님이시잖아요. 길드에선 빌힐 님이라고 불렀고.”
갑자기 현실에서 닉네임이 불린 충격에 재하는 곁에 선 재윤의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자신의 부끄러운 닉네임을 가족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길드라니. 이 잘생긴 청년이 누구길래.
“매일 함께 사냥했는데.”
누구냐, 넌.
“불꽃 길마 해일입니다. 본명은 권해일이고요.”
‘젠장. 나도 최소한 사람 이름으로 지을걸.’
길마 해일. 그의 이름이 본명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길마가 갑자기 동생과 함께 집 앞에 나타난 상황도 현실 같지 않았다.
당황한 재하와 달리 해일은 시종일관 신뢰감 넘치는 당당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직접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빌힐 님.”
“윽,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전 서재하예요.”
“네, 서재하 씨.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뭐냐고, 이 어색어색한 자기소개 순간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해일과 달리 재하는 민망해 미칠 것 같았다. 이 어색함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해일이 진정한 길드 마스터였다. 역시 친화력의 길드 마스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서재윤 씨가 아, 서재하 씨의 동생분이 형님 때문에 고민이 많더군요.”
무슨 대화를 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아 재하는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증거를 보여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동생분의 말을 믿지 못하신다니 제가 그 증거가 되어 드리려고요.”
멀쩡해 보였던 길마가 그렇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재하가 아무 반응도 못 하는 사이, 해일은 손을 들어 보였다.
“제가 불을 쓸 수 있습니다.”
화르르.
해일의 손에서 전조도 없이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딘지 모르게 불퉁하던 재하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빛나자 충분히 설득할 수 있으리라 여긴 해일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 우와?! 길마 형, 마술사였어요?”
“아닙니다. 이건 앞으로 많은 사람이 가지게 될 힘 중 하나입니다.”
“에이, 마술 밑천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죠? 업계 룰인 거 다 알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설명을 이어 가려던 해일은 재하의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재윤의 반응에 그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증거로 불을 보여 주는 건 아무 소용 없었다.
“음, 아무래도 집 안에서 더 보여 주긴 힘들겠군요. 자리를 이동해도 되겠습니까?”
“다른 마술도 보여 주시려고요? 좋아요. 대신 잠시만요.”
재하가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여전히 꽉 찬 냉장고에서 큰 밀폐 용기 하나를 꺼내 가지고 나온 재하가 대뜸 해일에게 내밀었다.
“돼지고기장조림 가져가실래요? 너무 많이 만들어서요.”
“직접 만드신 걸 저한테 주는 겁니까? 이런 귀한 걸 받아도 될까요?”
“에이, 별거 아니에요. 매번 길드에서 신세도 많이 졌기도 하고요.”
“아닙니다. 저 역시 서재하 씨 덕에 무척 즐겁게 지냈습니다. 보답받다니, 당치 않습니다.”
너무도 정중한 해일의 말투에 거절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니 정작 시선은 밀폐 용기에 고정돼 있었다. 어른스러워 보였던 해일의 감추지 못한 본심에 재하는 입꼬리가 실룩이는 걸 참으며 떠넘겼다.
“제발 가져가 주세요. 동생 놈이 무식하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가져와서 나누는 중이거든요.”
“그렇다면 잘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재하 씨.”
“윽, 그냥 재하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예, 그러겠습니다.”
진지하고 어색한 대화가 드디어 끝났지만, 정작 반찬 통을 손에 든 번듯한 차림새의 해일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 더 어색해졌다. 도로 회수해 올까 재하가 망설이는 사이, 해일이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집 안을 손보던 인부 중 하나가 다가와 반찬 통을 받아 가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한 해일이 신기해 빤히 쳐다보던 재하를 재윤이 바깥으로 이끌었다.
“형, 집 안의 탄 냄새 빼는 동안 같이 어디 좀 가자.”
“어디를?”
“아, 그게 좋겠군요. 제대로 된 증거를 보이기에도 개방된 장소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집 안에서 해일의 불꽃을 더 크게 보여 주기도 애매했다. 재하는 재윤이 나서서 권하는 상황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해일을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따로 부를 것도 없이 이미 검은 세단 하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재윤과 달리 재하는 연신 감탄했다.
“우와, 길마 형 금수저네요! 차도 엄청 좋아 보이고, 운전기사까지 있고.”
재하의 호들갑에 해일이 부정하기도 전 재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재윤의 긍정에 다른 때라면 겸양을 떨었을 해일이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해일은 재윤이 파악한 정보를 부정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에 웃음으로 긍정의 뜻을 비쳤다. 해일의 웃음을 본 재하는 더욱 흥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길드에 돈을 팡팡 투척하실 때부터 알아봤다니까요. 멋져요, 길마 형.”
“그럼 더 멋진 길마가 되기 위해 힐러 전용 아이템을 선물하겠습니다.”
“세상에…… 저 이러다 길마 형한테 반해 버릴 거 같은데요?”
아직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는 재하의 발랄함에 조금씩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해일은 계속해서 자신을 길마라 부르는 재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친근감 있게 구는 재하를 떨떠름하게 보던 재윤은 해일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평온해졌다.
재하의 주변 인물에게 살기를 뿌려 댈 정도로 경계하던 때와 너무도 다른 반응이었다. 그런 재윤의 반응은 해일에게 무척 중요한 지표였다. 해일은 내심 미래의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신뢰를 준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길마 형, 요즘 접속을 잘 안 하시던데 오늘은 풀팟으로 한 판…… 앗, 잠시만요.”
해일에게 열심히 말을 걸던 재하는 핸드폰 소리에 고개를 숙였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영우와 도준의 톡을 뒤늦게 발견한 재하는 폰에 집중했다. 재하가 핸드폰에 집중하자 차 안이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재윤은 당장이라도 재하의 손에 들린 폰을 부숴 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대놓고 살기를 드러내면서도 지켜보기만 하는 재윤의 인내 덕분인지 재하는 눈치채지 못하고 꿋꿋이 그들에게 답을 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일은 재윤이 왜 그렇게나 재하의 일에 조급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서재하는 사람을 대할 때 배려하고 친근감을 드러냈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재하는 재윤이 경계하는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보아하니 이미 경계 대상이 재하와 가까워진 상황이라 재윤이 저리 예민하게 구는 듯했다.
잠깐이었지만, 해일이 본 주도준과 이영우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받아 본 자료에서 느낀 착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재윤은 일반인인 그들을 경계하고 수상해 보이는 강화 슈트를 입은 자신에게는 호의를 보였다.
‘행운이었지.’
재윤과의 만남은 해일에게 무척 큰 이득이었다.
이번 만남이 성사된 건 재하와의 새벽 채팅 덕이었다.
회사 안에서도 던전 관리 팀과 몇몇 윗선만이 아는 정보가 고작 게임 길드원인 재하에게서 툭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