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별일 없어?
형. 대답.
“와 씨. 독한 새끼.”
재윤은 진짜로 재깍 한 시간마다 안부를 물어 왔다. 손에 양념을 묻힌 채 육포를 만들던 재하는 그때마다 손을 씻으려니 귀찮아졌다.
“잘 있다, 잘 있어.”
ㅇㅇ
짧지만 확실한 답을 보내 주고 다시 고기를 붙잡는데 톡이 울렸다.
까톡.
“하아, 진짜 집착 쩌네.”
뭐라고 장문의 답을 보내야 하나 짜증 내며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재윤이 아니었다.
재하 폰 맞지? 난 영우 선배야. 혹시 폰 번호 저장 안 했으면 이걸로 해줄래?
당연히 영우의 번호는 저장돼 있었지만, 그가 먼저 연락해 온 건 처음이었다.
“엥? 영우 선배가 웬일로 톡을 다 했지?”
“이영우 선배? 그 선배가 먼저 연락했어?”
도준이 놀라워할 만큼 이영우 쪽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별거 아닌 정보지만, 이영우가 핸드폰을 두고 간 날, 누구에게 가장 먼저 연락이 올지 궁금해하며 내기 판이 벌어진 덕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단 답을 하긴 해야겠지?”
의아해하면서도 톡을 하자 곧바로 답이 날아왔다.
오늘 공강인 거 같아서 연락했어. 만날 수 있을까?
“영우 선배, 좀 뜬금없네.”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솔직하게 답했다.
지금 요리 중이라 외출은 힘들 거 같아요. 죄송해요.
도우러 갈게. 근처라서 금방 갈 수 있어.
재료를 나르다 화면을 보게 된 도준도 가볍게 참견했다.
“선배가 널 되게 만나고 싶은가 보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친해졌다기보다는 약간의 실수가 있었달까.”
이어지는 톡은 없었으나 영우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아 재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문득 식탁에 수북이 쌓여 가는 육포 더미를 본 재하의 눈이 빛났다. 넘쳐 나는 고기를 떠넘길 사람이 늘어났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재윤이 질색했던 걸 떠올리며 잠시 망설였다.
영우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 날, 재윤은 창틀을 부수고 가출까지 했다. 연락이 오가는 걸 보면 가출이라기엔 애매하지만.
하지만 도준과 몇 번 접한 후 재윤의 반응이 달라진 걸 보면 희망도 있었다. 재윤의 망상이나 착각을 풀어 줄 기회가 될지도 모르고. 재윤이 삐지는 것보다 그의 일상생활 복귀를 위해서라도 이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더불어 지금은 단둘도 아니고 도준과 함께였다.
“음…… 단둘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그래도 물어는 보자 싶어 재윤에게 톡을 보냈다. 일일이 이런 걸 보고하고 허락받는 게 웃기는 일이다 싶으면서도 최근의 재윤은 신경 쓰여서 어쩔 수 없었다. 폰을 들고 잠시 기다렸으나 숫자는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
마침 근처여서 와버렸어. 잠깐이라도 볼 수 있을까?
“어?”
재윤의 답을 기다리는 사이 영우가 연락을 해 왔다. 자신이 답을 하지 않아 상황이 진행된 탓에 거절하기 더 애매해졌다.
“음…… 도준아, 전에 톡방에서 주소록 돌렸었지?”
“응, 그것도 선후배 다 있는 단톡에.”
요즘 같은 시대에 과 주소록을 단톡방에 올리는 만행을 저지른 과대 덕에 서로가 공공재가 된 판이었다. 이미 집이 어딘지 알고 도착했다는 영우를 밀어내기엔 눈앞의 고기를 치워 낼 사람이 늘어나는 게 기꺼웠다. 겸사겸사 일손도 생기고.
지금까지도 답이 없는 재윤 대신 재하는 결심했다.
재하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선배, 돼지고기 장조림 좋아해요?
* * *
재윤이 잡고자 하는 건 곤충형 마수인 레드 맨티스였다. 생긴 건 사마귀와 흡사했지만, 2미터에 육박하는 크기에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앞발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쇠처럼 단단했다.
그 앞에 보호 슈트 없이 맨몸으로 뛰어드는 일은 경험 많은 해일조차 망설여졌다. 정작 아무 보호 장비도 입지 않은 재윤은 태연하기만 했다.
“보기보다 위험 요소가 많은 마수야. 혼자 잡기 힘들 텐데.”
“초보라면 그렇겠죠.”
가볍게 답한 재윤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거침없이 달려드는 타이밍이 각성자라면 조금도 걱정되지 않을 만큼 적절했다. 다만, 일반인치고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각성자는 아니었기에 부족했다.
“조심해!”
레드 맨티스가 앞발을 휘둘러 재윤의 목을 노림과 동시에 능숙하게 몸을 틀어 피했다. 이어 바닥을 디딘 맨티스의 다리를 밟고 위로 뛰어오르는 기민한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순식간에 연계된 동작이 교과서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움직임이 무슨…….”
흔들림 없이 일직선으로 내리꽂힌 쇠 파이프가 맨티스의 약점인 목 마디에 꽂혀 들어가 뚫고 나왔다.
우득. 우득.
벌레에게서 나올 수 없는 소리가 재윤이 쇠 파이프를 움직일 때마다 숲을 울렸다. 기어코 쇠 파이프 하나로 레드 맨티스의 머리를 끊어 냈다.
“말도 안 되게 능숙하군.”
최소한 수십 번은 사냥해 본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본 재윤에게선 에스퍼 특유의 마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는 미각성 상태였다. 혹여나 약점 간파나 예지 관련 아이템을 가졌다 해도 이런 몸놀림은 말이 안 됐다.
“대단해. 몸놀림이…… 각성자라고 해도 믿겠어.”
한 손엔 진액이 흐르는 쇠 파이프를, 다른 한 손엔 맨티스 머리를 챙겨 든 재윤이 해일에게로 다가왔다.
“폰 주세요.”
“아, 그래.”
해일의 감탄에도 재윤은 덤덤하니 맡겨 놓은 핸드폰을 요구했다.
던전 안에서는 현대 물품이 잘 작동되지 않았다. 마나가 약한 장소나 특정 장치가 필요했다.
그간 재하와 재윤이 연락하기 힘들었던 이유였다. 해일을 만난 이후로 그가 가진 던전 전용 기기와 연결한 덕에 답답함을 해소했다.
재하가 보내온 카톡을 확인한 재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 진짜. 형.”
미래를 모르는 재하는 재윤이 자리를 비운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도준을 불러들였다. 짜증스러웠지만, 사진 속 꼬마를 본 재윤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격변의 날. 이 꼬마는 죽는다.
종종 잔뜩 흔들린 꼬마의 사진을 자기 조카라도 되는 양 재하가 자랑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형에게 추억 하나 정도 더 생기는 거라면 불안해도 참아야겠지.’
그래도 매시간 연락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연락할 때마다 도준을 주의하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맨티스 머리는 왜 챙겨 온 거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쓸모가 있는 건가?”
“제 말을 믿지 못하는 형한테 증거로 보여 주려고요.”
“그런 거라면 내가 보여 줄 수 있는데.”
해일의 손에서 화르르 올라오는 불을 보며 재윤은 잠시 고민했다. 재하라면 이걸 보고도 마술이 멋지다며 손뼉을 칠 것 같았다.
이제야 새삼 깨닫지만, 재하는 상당히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에스퍼의 먹잇감이 돼 버린 거겠지 싶어 재윤은 입 안이 썼다.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 보고요. 형한테 에스퍼를 소개하는 건 좀 피하고 싶어서요.”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이기는 하지.”
재윤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재윤이 먼저 재하의 이야기를 했어도 역린을 건드려 오는 해일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해일은 재윤이 보이는 경계에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미래를 보는 것 같기에 이후의 상황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군.”
“독심술 같은 건 못 하니까 말로 하세요.”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서재윤 씨가 아닌 서재하가 감시 대상이었지.”
“대성이라면 그러고도 남죠. 각성자를 미리 선점하겠다고 학교를 세울 정도니까.”
재윤은 그가 알았던 사실과 돌아와 알게 된 것까지 언급했다. 그만큼 해일을 제 편으로 만드는 데 진심이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대단하군.”
“그렇다고 예비 각성자 감시를 에스퍼가 할 줄은 몰랐네요. 당신 등급이 낮은 것도 아니고.”
“아, 그건 우연이랄까.”
해일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에스퍼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죽은 듯 살아야 했어서. 게임은 시간 죽이기에 아주 유용했거든.”
“형이 게임 중독이긴 하죠.”
“하하, 그래. 예비 각성자 명단을 받았을 때 서재하가 있더군. 마침 같은 게임을 하기에 길드로 영입했지. 그때는 내가 각성하기 전이라 시간이 많아서 금방 친해졌고.”
유력한 각성 후보에게 예비 각성자의 관리와 감시를 맡기는 건 대성에서 흔한 일이었다. 다만 해일은 각성 후에도 미각성자인 재하를 다른 이에게 넘기지 않고 관계를 유지해 왔다.
역시 해일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성실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재윤의 모습에 해일은 좀 더 자신의 의견을 냈다.
“에스퍼가 될 확률이 높은 서재하에게 나와의 인연이 나쁠 거라곤 생각 안 하는데.”
“아뇨, 재하 형은 에스퍼가 되지 않을 거예요.”
“꽤 확신하는군.”
“봤으니까요.”
“그런가. 좀 아쉽군. 감시를 핑계로 제법 즐겁게 지내 왔는데.”
가볍게 웃으며 재하의 감시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비치는 해일이었다. 재하를 향한 작은 위협이 거둬지자 재윤의 경계심은 흐려졌다. 처음 계획대로 해일을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들기로 했다.
“당신이 제게 협조해 준다면 미래를 공유할 생각이 있어요.”
“정말 미래를 안다면 그런 귀한 정보를 내게 알려도 되는 건가?”
“좀 제가 밑지더라도 당신은 그럴 만한 대우를 받아도 되니까요.”
“미래의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가 보군.”
“그거야 뭐. 아, 맞다. 당신 아버지한테 블랙 피그 좀 그만 먹여요.”
“뭐?”
재윤이 뜬금없이 해일의 아버지를 언급하자 그가 크게 당황했다.
“일반인이면 살점이나 적당히 드시지, 심장을 왜 그렇게 먹냐고요. 먹을 때마다 꽤 아프셨을 텐데.”
“그걸 네가 어떻게…….”
“내년쯤이면 중독 증상 심해져서 상태 이상 포션 사재기하느라 포션 값만 폭등시키니까 미리 말려요.”
재윤의 핀잔에 해일의 표정이 흔들렸다.
연구원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아버지인 권 회장의 요구대로 심장을 공수해 준 해일이었다. 두 사람 외에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타인의 생각을 볼 수 있나? 과거를 본다거나. 스킬…… 아니, 각성 전일 테니 아이템인가.”
“기껏 미래를 말해 줬더니 과거를 볼 수 있냐고 묻는 건가요?”
해일은 지금까지 재윤과 나눈 대화로 그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해일의 눈에 깃든 신뢰에 재윤이 고개를 까닥였다.
“저랑 같은 편 먹어요. 그럼 최대한 협조할게요.”
재윤의 말투는 마치 땅따먹기 하는 아이가 편을 가르듯 가볍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