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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툭 던진 말이었다.
이때까지 진지하기만 했던 재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미간이 깊게 패고 꽉 다문 입술이 벌벌 떨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꽉 움켜쥔 주먹 위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재하가 집들이 때 받아 장식용으로 둔 고급 티슈를 마구잡이로 뽑아 내밀었다.
“야야, 지금까지 욕해도 꿈쩍 안 했으면서 이런 농담엔 왜 처우는데?”
“흐읍, 형.”
“아오, 1년 치 형 소리 오늘 다 듣네.”
물기 가득한 부름에 재하는 진저리 치며 소파 구석으로 몸을 물렸다. 질색하는 재하의 반응에도 재윤은 짓씹듯 집어삼킨 감정 아래 슬픔만을 내비쳤다.
“형이, 흡, 약…… 흐윽, 그 약만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진 안 됐을 텐데.”
“아니, 너 약했냐니까? 갑자기 왜 날 걸고넘어져?”
동생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어 재차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재윤의 붉어진 눈에 비친 진심이었다.
“형, 이번엔 내가 잘할게.”
반드시 지켜 낼 테니까.
속삭이는 재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비장해 낯설었다. 질 나쁜 농담이나 몰래카메라라고 여기기에는 동생이 보이는 감정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재하는 재윤의 진지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너 회귀한 거 맞다 치고.”
“안 믿어도 돼. 내가 형을 지킬 거니까.”
“그래그래. 회귀든 타임머신이든 믿어 줄 테니까 가서 세수하고 와. 아침이나 먹자.”
재하는 이 사달이 난 원인인 라면 봉지를 손에 들고 일어섰다. 싱크대 앞에 재하가 서자 소리도 없이 다가온 재윤이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형.”
“어우씨, 뭔데?”
요 며칠 자신 혼자서 살다 보니 인기척도 없이 지척에 와 있는 재윤의 존재에 식겁했다. 매우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서는 반응에 재윤의 눈에는 또다시 습기가 차올랐다.
“형…….”
“하아…….”
이미 재하는 재윤과 몇 번의 대화를 통해 이 상황을 파악했다. 라면 봉지를 양손에 나눠 든 재하가 어색하게 재윤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로봇이 움직이듯 뻣뻣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행동에도 재윤은 필사적으로 재하를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형, 내가 잘못했어. 밀어내지 마. 형이 하는 말 다 들을게.”
“어. 그래. 그럼. 좀. 저쪽에 가서 앉아 있어.”
재하의 어색한 요구에도 재윤은 재깍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다만 시선만은 재하에게 고정한 채였다.
평소 둔하단 소리를 자주 듣는 재하였지만, 이런 식으로 빤히 쳐다보는 건 부담스러웠다. 눈 좀 치우라 하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끌어안거나 손을 잡거나 하다못해 셔츠 끄트머리라도 잡고 온갖 청승을 떨어 대니 불편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라면이나 끓이자.’
동생의 이상 행동은 어쩌면 술 때문일지도 모르고 취업 실패로 좌절한 탓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꿈을 너무 깊이 꿔서 현실에서도 망상하는 건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어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한 재하는 라면 봉투를 뜯으려 했다.
“형.”
울먹이지도 않았고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평범하게 불린 형이란 말이 왜 이렇게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 오는지, 재하는 심호흡한 후에야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왜.”
“형이 끓여 준 김치찌개 먹고 싶어.”
라면이나 처먹으라며 재윤에게 라면 봉지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그 큰 덩치로 울망울망한 눈빛을 보내는 재윤을 힐끗 본 재하는 한 번 더 참았다.
“한 시간은 걸리잖아. 라면이나 대충 먹자.”
“몇 년이나 기다렸어. 한 시간쯤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동생이 회귀자 컨셉을 계속 이어 가려는 모양이었다.
취업 실패로 연기자에 도전하는 거라면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마음마저 먹으며 재하는 김치 통을 꺼내려 냉장고를 열었다. 그와 동시에 언제 다가온 건지 동생이 먼저 김치 통을 붙잡았다.
“형, 조심해. 손목 다쳐.”
한심해하거나 윽박지르는 말투가 아니었다. 걱정 어린 목소리에 다정함까지 더해진 상냥함은 간신히 버텨 온 재하의 인내심을 단숨에 터트렸다.
“아, 시발! 진짜 못 해 먹겠네.”
“형, 갑자기 왜 그래?”
“야, 꺼져! 니 형 안 하련다! 너, 당장 나가서 새 형 찾아!”
“그럴 수 없어. 누가 뭐래도 재하 형은 나한테 형이야. 나 버리지 마, 형.”
“야, 이 미친놈아! 나 닭살 돋은 거 안 보이냐? 작작 좀 하라고!”
어울려 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자신에게 상냥하게 구는 재윤은 낯설다 못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거부감을 불러왔다.
“형, 날 밀어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래, 다 네 잘못이니까 제발 좀 떨어지라고!”
“형, 제발.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지키게 해 줘.”
이 짓을 언제까지 하겠다는 건가 싶으면서도 끝이 있는 일이긴 하구나 싶어 재하의 눈이 빛났다. 재하가 침착해지자 재윤 역시 끌어안은 팔을 반쯤 풀어냈다.
“진정했어, 형?”
“후우……. 그래서 그 안전이란 게 언제 확보되는데?”
지금도 매우 아주 완벽하게 안전했지만.
“일단 1년만.”
“꺼져, 새끼야! 하루도 못 참아!”
“형, 진정해. 최대한 줄여 볼게. 반년까지 줄이는 건 힘들겠지만.”
“컨셉 좀 버리라고!”
아무리 재하가 외쳐 봤자 재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칠 만에 단단한 근육을 장착한 재윤의 품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한참을 몸부림치다 제풀에 지친 재하는 하늘을 원망했다.
나름 착하게 살아온 거 같은데 왜 이런 시련을 준 건지 진심으로 억울했다.
재하가 진정한 기미가 보이자 재윤은 팔을 풀었다. 싸울 기력이 남지 않아 재하가 식탁 앞에 앉는데 재윤이 슬그머니 김치 통을 싱크대 옆에 올려놓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김치찌개를 포기하지 않다니.
“……독한 새끼.”
“형…….”
재하에게서 짜증 난 기색이 풀풀 풍기자 재윤은 안절부절못했다. 불안한 듯 주변을 맴도는 재윤의 행동에 재하는 행주를 집어 던졌다. 날아든 행주를 보지도 않고 잡아챈 재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재하를 바라보았다.
“앉아라, 좀. 망할 김치찌개 끓여 줄 테니까.”
“고마워, 형. 불편하게 안 할게. 여기 얌전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할게.”
“그래. 제발 그래 줘라.”
무슨 말만 해도 불안해하고 달려오는 재윤을 상대하느라 기운이 쪽 빠진 재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김치를 통에서 꺼내던 재하는 고작 김치찌개 하나 끓이는데도 과보호하며 집중하는 재윤이 황당할 뿐이었다.
* * *
“먹든가.”
무성의하게 재료만 던져 넣어 끓인 김치찌개를 식탁에 내려놓자 재윤이 감격한 얼굴을 했다.
“하……. 형이 해 준 김치찌개다.”
아침부터 동생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식욕이 싹 사라진 재하는 식탁에 앉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싱크대 앞에서 쳐다보고 있으려니 재윤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기억에 있는 그대로야. 진짜 맛있어, 형.”
“지난주에도 먹은 건데 기억이 안 나면 머리를 다친 거겠지.”
재하의 핀잔에도 재윤은 새빨간 김치찌개를 세기의 명화라도 보듯 감격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참 만에야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국물부터 떴다.
한 모금 맛을 보고 크흑거리더니 울음을 참는지 콧등이 잔뜩 찡그러졌다. 도저히 그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재하가 등을 돌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등 뒤로 느릿하게 음식과 울음을 번갈아 삼키는 소리가 소름을 불러왔다.
‘월요일이 되면 바로 병원부터 데리고 가든가 내쫓든가 해야지 이대론 못 살겠다.’
당장 뭐라도 정신을 딴 데 두기 위해 재하는 냉장고를 뒤졌다.
애매하게 남은 음식 재료를 눈으로 살핀 재하는 달걀과 유통 기한이 살짝 지난 우유를 꺼내 왔다. 그릇에 재료를 넣고 소금까지 친 후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인 채소까지 빠르게 썰어 넣었다.
설마 칼 쓰는 것도 위험하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싶어 힐끗 돌아보니 재윤과 눈은 마주쳤지만, 감격과 눈물로 범벅일 뿐이었다.
동생이 울든 말든 재하는 재료를 모두 섞어 프라이팬에 부었다.
치익.
약한 불로 몽글몽글 익어 가는 달걀을 뒤집개로 접어 가며 모양을 만들어 냈다.
시간이나 때울 겸 만들기 시작했지만, 냉장고 음식 재료도 소진하고 먹음직스러운 노란 계란말이가 완성되는 모양이 꽤 마음에 들었다.
썰기도 귀찮아 뒤집개로 뚝뚝 끊어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려놓자 재윤의 물기 어린 눈이 더욱 글썽거렸다.
“나, 나 주려고 만든 거야?”
“……음식 버리게 만들지 마라. 조용히. 밥만 먹으라고.”
“응, 알았어. 조용히 먹을게.”
재하의 경고가 진심임을 알아들은 재윤은 계란말이와 김치찌개를 바싹 당겨 와 빠르게 먹어 치웠다. 고봉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고 재윤의 그릇에 밥을 채워 주자 또 감동해서 그렁그렁하는 꼴이 재하는 보기 싫었다.
재하가 반사적으로 주걱을 세워 이마를 내려치고 말았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맞아 준 재윤은 싱글거리며 밥을 크게 떴다. 다른 때라면 형제 싸움이 666번째 발발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주걱 자국 그대로 이마가 붉어진 재윤이 신나게 밥을 먹는 꼴을 보니 재하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어디서 굶고 온 동생을 구박한 기분이라 민망하기까지 했다.
“천천히 먹어라. 밥은 더 있…… 응? 너 어디 가?”
방금까지 머슴밥을 좋아하며 먹던 재윤이 표정을 굳히고 바깥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재윤이 어딘가를 보며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 재하 역시 함께 귀를 기울였다.
매우 희미한 피아노 소리. 오늘도 몇몇 소절을 틀리며 부지런히 치고 있었다.
“아, 저거 30분 정도만 치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잠깐 갔다 올게.”
“어?”
“괜찮아, 형. 이번엔 꼭 지켜 줄 거니까.”
“……뭐에서? 층간 소음에서?”
스스로 말하면서도 민망해하는 재하와 달리 재윤은 비장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