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운명의 격랑 (3)
“그림보쉬의 군대다!”
“동족의 군대가 온다!”
거의 5만에 달하는 인간, 요정, 정령사의 연합군이 몰려들자 고블린 성채는 굳게 문을 닫고 모은 교통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 어둠을 뚫고 나타난 그림보쉬의 군대는 큰 기쁨이었다.
“그림보쉬의 군대라고!”
그리엘크가 헐레벌떡 성채 안쪽에서 뛰어나오더니 급하게 성루 위로 뛰어올랐다. 오그르 기준에 맞추어 튼튼하게 쌓은 성벽인데도 거대한 몸무게의 압력에 연신 흔들렸다.
“대장, 저쪽에 대전사 그림보쉬와 마도사 체페시가 앞장서고 있다!”
“저놈들……그렇게 무단이탈해서 돌아오질 않더니 이제야 돌아온다고? 적 동맹군이랑 나란히?”
그리엘크는 그저 기뻐하는 고블린이나 오그르들과는 다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째 후방에서 병력이 야금야금 줄어드나 싶더라니, 딴 꿍꿍이속인 녀석들인 것 같군.”
“대장, 문 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블린 경비병 하나가 문을 열자고 촉구한다. 그리엘크는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멍청한 녀석! 우리를 배신하고 인간들의 편에 선 놈들을 들이자니. 나보고 항복이라도 하라는 이야기냐?”
“성채의 대장이 누구냐? 얼른 나와서 나랑 이야기를 나누라!”
그림보쉬가 체페시를 대동한 채로 성문 바로 앞까지 바짝 접근한 상태였다. 그 외침은 선뜻 무시하기 어려웠다.
“군단과 종족을 배신하고 인간의 달콤한 아부를 받으니 그래, 기분이 몹시 좋았겠구나!”
“그리엘크! 아직도 자존심 때문에 헛된 문을 닫고 버틸 속셈이냐!”
그림보쉬는 언제나 그렇듯 대전사 오그르 중에서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전투형 지도자였다. 픽스를 탄 채로 오른손에 든 도끼창은 워낙 거대해 땅에서 그림보쉬의 머리끝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러는 너는, 인간들에게 우릴 굴종시켜서 지도자가 되고 고블린들은 형편없는 잡종으로 전락시킬 셈이냐!”
“우우!”
그리엘크의 호통에 요새 내에서 긴장에 차 있던 고블린과 오그르들은 한껏 야유를 보내며 환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그리엘크가 믿는 ‘여명의 빛’을 대의로 생각하느냐고 볼 순 없었다.
‘이놈들은 언제든 구실이 생기면 배신하고도 남을 테지. 적어도 우리의 투쟁이 유일한 답이란 걸 계속 보여 줘야 해.’
그리고 최소한 인간과 반란군의 인내심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우레이미야가 출전한 직후부터 후방 감독을 맡은 그리엘크가 네마냐가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른다며 식량과 군대를 모아놓은 덕분이었다.
“어디, 신나게 밖에서 들이받아 봐라! 너도 알겠지만 이 성채를 공격하려면 오직 이곳 정문 밖에는 기회가 없으니까.”
말을 마친 그리엘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군단장이 죽고 오그르 전사들도 상당수 전사했다. 거의 8만이나 되는 병력이 증발한 것이다. 성채엔 기껏해야 7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시간을 번다는 것’이었다.
‘네마냐, 그 교활한 녀석은 어떻게든 버티면서 시간을 벌었지. 그 사이에 영지를 키우고 병력을 늘리고 외교질을 하고.’
그래. 그런 하찮으면서 시기심도 큰 인간이 그 정도를 할 줄 아는데, 이 강대한 군단의 자손들이 못할 건 무언가? 때마침 성채가 난공불락이니, 여기서 버티면 되는 것이다.
―뿌우!
해방군 진영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런 그리엘크의 자부심을 어디 한번 시험해 보겠다는 투였다.
* * *
“교활한 자식 같으니.”
그림보쉬는 흥분한 채로 체페시에게 돌아왔다. 체페시는 두 번의 공성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휘하 병력을 전투대열로 재편하고 공성 장비를 곳곳에 배치하는 중이었다.
“대장, 반응을 보니 역시 교섭 같은 건 불가능하다는 내 말이 맞았군.”
“기분은 나쁘지만 인정해야겠군. 변함없이 공성을 계속 밀어붙여야겠다.”
“하지만 이 성채는 우리 모두가 알지만, 대충 공격해 봤자 점령할 수가 없어. 두 번 공격해 봤지만 아예 접근도 못 한다니까.”
공격할 만한 경로는 한정되어 있고, 성채는 튼튼하기 짝이 없다. 오래 포위해서 굶겨 죽인다고 해도 성채 안엔 이미 1년 이상의 식량이 쌓여 있을 것이다. 공격군이 닿을 수 없는 성채 뒤편 산악지대로 계곡도 흘러 물도 많았다.
“어차피 이대로 방치해 봤자 놈들은 더 빨리 전열을 정비할 게 뻔하다. 여기에 놈들을 가둬 놓고 흩어진 고블린 군단을 포섭하는 게 우리로서도 차라리 나을 테지.”
“이미 세뇌된 자들이 일부 투항병들처럼 그렇게 쉽게 벗어날 리가. 잘못하면 그리엘크에게 역으로 말릴 수도 있다.”
그때, 두 사람에게 느껴지는 무언의 강렬한 파동이 느껴졌다. 체페시는 재빨리 앞을 막고 나서며 얼음으로 된 판을 만들어 냈다.
―카앙!
날카로운 충돌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일었다. 체페시는 휘청이면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했고 그림보쉬는 낮은 자세로 압박을 피했다.
“큭, 대체 뭐냐.”
“심통이 나셨나 보다, 그리엘크 님께서. 오그르 주술사가 전력을 다하니 나 따위는 상대도 못 할 정도군.”
녹색의 얼굴이 연둣빛이 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체페시가 애써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역시 쉽지 않은가.”
“누가 온다, 대장!”
해방군 소속의 고블린의 외침. 지체없이 돌아보는 그림보쉬의 눈엔 오랜만에 적이 아닌 아군으로 재회하는 네마냐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 고생이 많군.”
“바가반드 영주. 무슨 일이지?”
“언덕 아래 성채는 진압되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지. 아, 그리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네마냐는 곳곳에서 무너진 흙무더기와 쓰러진 사체, 피어나는 연기에 눈을 찡그렸다.
“성채가 무척 단단하군. 그림자 마나를 쓸 줄 아는 녀석은 거의 없지만 적마정석으로 최대한 강화된 성벽이야.”
“그리엘크가 정말 열심히 보수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바가반드로 고블린 우회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왔을 때 진짜 위험했던 상대였지. 만약 그 정도 실력자가 작정하고 이런 요새에 틀어박힌다면 굴복시키긴 쉽지 않을 터였다.
“그렇군. 이대로라면 공성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어?”
“계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식량 비축분이 떨어지는 데는 꼬박 1년은 걸리겠지.”
1년. 5만이나 되는 연합군이지만 이렇게 먼 곳까지 보급을 유지할 방법은 없었다. 혹시나 아직 파악하지 못한 곳에 고블린 요충지가 더 있다면 어떻게 반격이 올지도 모를 일이니.
“이거 하나 묻자. 일단 성문만 깨뜨리면, 그다음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건가? 당신네 종족을 설득할 수 있겠어?”
“그게 가능하다면 해 봐야지. 안 그래도 지금 이렇게 이어지는 대전쟁이나 인구 상실은 고블린 사회에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고블린도 역시 생명체인 데다 인간들의 편견과 달리 꽤 이것저것 고등사고를 할 줄 안다. 당연히 전쟁을 위해 직접 장정과 막대한 자원을 내놓아야 했으니, 불만이 고조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뒤의 일은 당신들에게 맡기지.”
네마냐가 갑자기 이해 못 할 소리를 꺼내자 순간적으로 체페시나 그림보쉬 모두 눈을 찡그리며 무슨 소린지 이해하려 들었다.
“그게 무슨…….”
“글쎄. 조금 기다려 보면…… 아, 지금이네.”
―크와아아악!
고블린 군단 전체에서 비명과 함께 당황한 울부짖음이 울렸다. 전장에 나섰던 이들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소리는, 설마!”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요새를 허물어뜨릴 분이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크와악!
이내 울부짖음이 커질뿐더러 숫제 날갯짓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바위산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그림자는 성채의 벽을 절반이나 가려 버렸다.
“으악!”
“성수다!”
“인간 놈들이 공중에서 공격한다!”
위압적이고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위엄에 고블린과 오그르 수비대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거나 성벽 아래로 도망가기 바빴다.
“멍청한 놈들, 죽어도 위에서 죽어야지! 적마정석을 들고 달려들어 자폭이라도 해!”
“컥!”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블린 몇 명을 쓰러뜨리는 그리엘크였지만, 고블린 군대의 저항이란 이미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키메라, 무리한 부탁인 줄은 알지만 와 줘서 정말 고마워!”
“키메라였군. 정말 위엄찬 풍채야.”
체페시가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마냐의 외침에 키메라는 잠시 성채 쪽으로 향했던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보았다.
[당연히 마지막까지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는 건 내가 해야 할 일. 어쩐지 언덕 아래에선 친숙한, 어쩌면 그대와도 비슷한 느낌이 풍겨서 온 거기도 하지만.]
아마도 알레시아스의 기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하긴, 지금의 키메라가 환생하기 전 전대의 키메라는 알레시아스가 키워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익숙한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차차 설명해 줄게. 당신이 치료받는 동안 또 여러 일이 있었거든. 하지만 우선 지금은 할 일이 있지. 부탁할게.”
[음, 맡겨 두도록.]
전언을 마친 키메라는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사어가 되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된 고대 신성어로 무어라 분노의 함성을 외쳤다.
[질서에 거스르는 자, 모두 재가 되어라!]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주변은 완전히 튀어 오른 흙먼지에 휩싸였다. 아울러 강렬한 충격파에 모두들 얼굴을 가리고 몸을 낮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곳곳에 크고 작은 파편이 이리저리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모두 엄폐!”
그림보쉬가 뒤늦게 외쳤지만, 자유 군단의 병사들은 키메라가 뜬 순간부터 이미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알아서 엄폐한 상황이었다.
―쿠르릉!
―와르르!
투석기로 한동안 때렸음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던 어마어마한 성채는 단 한 번의 포효에 무너졌다. 아니, 폭발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으로 그 돌이 흩어져 날아갔다. 위에 섰던 고블린과 오그르 전사들 역시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크읏…… 이게 마시스 산 성수의 힘인가!”
“위력은 확실한걸.”
감탄하는 자유 오그르 전사 하나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네마냐 역시 익숙한 장면이라지만 위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건 이제 남은 건 무너지는 요새로 돌입하는 것뿐이었다.
“나를 따라 돌입하라!”
“모두, 대장을 따라 돌입!”
바닥에 엎드리며 충격을 최대한 피한 자유 군단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성벽으로 가파른 경사지가 생겼으나 개의치 않고 거친 숨을 쉬며 내달렸다.
“비켜, 이놈들!”
“크왓!”
그나마 안쪽에서 정신을 차리고 나선 녀석이 하나 있었지만 역시나 간단하게 그림보쉬가 두 동강 냈다. 무너지던 병력은 성채 안쪽 시가지나 아예 바깥의 산맥으로 달아났고, 주민들이 무기를 든 채 그리엘크의 뒤에 서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연설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방해물은 거둬 줄 테니까. 그다음은 당신들 차례야.”
네마냐는 성채 곳곳에 흐르는 적마정석과 미약한 그림자의 기운을 느끼며 넷째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공허 마나가 충만한 것을 느끼며 그림보쉬, 체페시의 손을 잡아 전해 주었다.
“이 힘은……!”
“더없이 깨끗하고 강력한 힘이로군. 어째서 여명의 빛이 이길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아. 그저 그림자가 강한 느낌이라면, 이건 완전하다는 느낌 자체군.”
주술사답게 체페시는 공허의 마나를 온몸으로 느끼며 몸을 떨었다.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 시가지 방향으로 손을 뻗어 보였다.
“들어가 봐. 당신들의 운명은 이제 스스로 결정해야지. 기다려 주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림보쉬는 부대원들과 함께 무너진 성벽을 넘고, 시가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중앙광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성채의 민병대와 만났다. 투석기로 반쯤 파괴된 우레이미야의 동상 위로 그림보쉬는 올라섰다.
“동포 주민들아! 헛된 그림자를 따라 너희들의 부강이 이루어질 줄 알았나! 결과는 이렇게 끝없는 전쟁과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소설 쓰는군!”
적의 장교로 보이는 듯한 오그르가 애써 반박하고 비웃는 듯한 일부의 소리가 들렸다. 물론 사정없이 흔들리는 주민들 다수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설득대상은 강경파가 아니라 바로 그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보라, 너희 앞에서 너희 희생을 강요하는 저들이 무엇을 너희에게 약속했나? 그중에 무엇을 이루었나? 부유함? 안전? 독립?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완전한 파탄에 이르렀다. 당신들은 노예가 되어 전장에 끌려 나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닥치지 못해!”
“던져!”
아까부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던 오그르 전사 하나가 투창을 던졌다. 그림보쉬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 높이 솟아오른 창을 피했다. 창은 속절없이 우레이미야 동상의 얼굴 정면을 강타하며 손상시켰을 뿐이었다.
“너희의 창과 칼은 소용없다. 검은 마법사들도 이제 끝났다. 너희를 배제했던 질서를 증오하여 그것을 타도한다던 여명의 빛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내가 모르겠느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저 자신의 목청만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도움이건 기꺼이 쓰면 그만이다.
“보라, 바깥에 늘어선 오크, 인간들의 무리를. 저들은 우리의 공격을 받았지만 나를 통해 당신들에게 중대한 제안을 건네고 있다!”
숨을 고르도록 그림보쉬가 쉬는 사이, 그 옆에 올라선 체페시가 조금 귀에 감겨드는 앙칼진 고블린 목소리로 제안을 이어 갔다.
“너희를 지배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현 군단 수뇌부를 쫓아내라! 그러면 그대의 동족과 동포들이 당신들을 도울 것이다! 인간들 역시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공존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네마냐는 계속 도시 바깥 경계선에 선 채로 줄곧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마나를 계속 광장 쪽으로 밀어 넣어 체페시 등의 일장 연설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신들의 자유와 재산, 안전을 위하여…… 결단하라!”
체페시와 그림보쉬는 그 이후에도 번갈아 가며 호소했고, 그 거대한 도시의 음침한 골목 구석에까지 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모두가 숨죽여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으리라.
“해가 지는군.”
“어때, 이제는 잘 되어가나?”
“오, 키메…… 키마라스. 진짜 몸이 다 나은 모양이네?”
언제 폴리모프를 했는지, 단정한 옷차림에 풀어헤친 긴 머리를 휘날리는 키마라스였다. 잠시 지켜보더니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우리 제안은 다 전해졌어.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지. 뭐, 결론은 볼 것도 없이 난 모양이지만.”
시내 곳곳과 성벽에 자유 군단의 깃발이 오르며, 힘찬 함성의 소리가 도시 전체로 퍼져 갔다. 아랫도시의 공략으로 막이 올랐던 최후의 전투는 어찌 보면 심심하게, 노을을 배경으로 하며 막을 내렸다.
* * *
바가반드의 재무부서를 총괄하는 1급 서기관 하메네라는 발걸음이 급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간신히 5급 서기관이었던 자신으로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제 자신의 위엔 영주의 동업자요 유일한 상관인 미하일 바드란 재무관뿐이었다.
“내가 이렇게나 파격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되다니, 누가 믿겠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1급 서기관님.”
자신이 수습 서기관으로 선배의 뒤를 따랐을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샌가 자신의 뒤엔 그보다 훨씬 많은 후배들이 서 있었다. 불과 5년 만에 바가반드 정부가 거의 세배 이상 조직을 확대한 덕분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영지의 관리가 매우 엉성하지. 앞으로도 얼마나 더 개편 작업을 거쳐야 할지 아직도 막막하군. 하물며 지금 상황에 이런 사건까지 터지고……. 이거 말씀드리면 영주님도 골치 아프시겠지.”
폭풍 같던 변화와 전쟁이 밀려 왔던 첫 1년 이후에도 바가반드의 성장은 눈부셨다. 전쟁이 끝나자 재건 특수가 더해진 덕분이었다.
―똑똑.
“재무관 각하, 하메네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들어와.”
헛기침 두어 번을 삼키고 하메네라는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전갈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섰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집무실은 수수한 휘장만이 쳐졌을 뿐 변한 게 없었다. 외관만으론 영지의 땅이 커지고 인구가 늘어 어지간한 중형급 영지가 되었다는 건 알 수 없을 터였다.
“오늘도 수고가 많군. 요즘 토지 소송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지? 보나 마나 해방 소작농과 전 지주 사이의 분쟁이겠지.”
미하일이 뻔하다며 귀를 판 손가락에 바람을 불면서 물었다.
“예상한 것 아니었습니까. 입법 후 유예기간 3년이 지나자마자 그간 숨겨놨던 부정들이 몽땅 터져 나오는 모양입니다.”
“쯧, 혼자 힘으로 전업농이나 농장을 못 하겠으면 어지간히 하고 얼른 광업이나 제조업이라도 하든지, 무역이라도 할 것이지.”
예전과 마찬가지로 검은 옷에 수수한 장식만을 달고 있는 영주 네마냐가 반기면서 서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마 하메네라 자신이 평범한 이번 달 결산 자료를 줄 것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아마 이번 달 결산엔 재건된 고블린 자치령과의 무역 결산도 들어갔겠지? 나코르잔 공화국 쪽으로 나가는 마정석 무역로를 강화하려면 고블린 자치령 쪽으로도 무역로를 마저 강화할 필요가 있어.”
“아, 마침 이번에 고블린 자치령에선 종전 4주년 기념으로 재건된 철위기사단이 수도 나샤와에서 기념식을 가진다더라. 며칠 전 체페시가 4연임 시장이 되었으니까 겸사겸사 네가 다녀오는 건 어때.”
“그래, 이래저래 영주인 내가 가는 게 딱 맞겠군. 그렇게 하자고.”
네마냐는 그동안에도 여전히 문서를 달라며 손을 뻗고 있었다. 이에 잠시 손을 거둬들인 하메네라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자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주군.”
“전쟁, 이라니?”
의아한 표정으로 네마냐는 미하일과 시선을 교환하며 다시 물었다. 하메네라는 비로소 품속에 들고 있던 문서를 건넸다.
“방금 우리 바난드의 대군주, 엘레나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마침 바난드에 계신 성녀께서도 공동으로 작성하셨습니다.”
“저런, 어디…….”
두루마리 문서를 펼친 네마냐의 표정은 여유로움에서 다시 긴장감 가득한 고블린 전쟁 때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무슨 내용이야, 네마냐?”
“전쟁. 제국에서 황제가 승하하고 원로원과 동부군이 싸움을 벌이려 든다는군. 동부군에서 아니로 협조 요청을 보냈단다.”
전쟁이 시작되어 끝난 지 어언 4년. 이제 간신히 하야스단은 전쟁의 흔적을 지우고 고블린을 우호적인 이웃으로 두어 안정을 도모했다. 그렇게 혼란기가 끝나나 했더니.
“이젠 우리가 게임에서 적어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말이 된 거지. 그것만 해도 난 우선은 감사하겠어.”
그 말을 마친 네마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국의 분열까지는 그나마 자신이 기억하는, 실패한 네마냐의 삶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운명에 치일 뿐이었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런데, 만약…… 이 기회를 틈타 그때 실종된 검은 마법사들이 다시 암약하면 어떡하지?”
“아, 검은 마법사?”
“심지어 페넬로파도 그날 이후로 실종이잖아.”
그들이 지금 어느 세상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 가령 미하일 같은 이들은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문제로 걱정을 앓고 있었다. 물론 알레시아스의 존재를 드러내어 분란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네마냐는 그저 지난 4년간 그랬던 것처럼 알 수 없을 미소만 지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생기지 않은 문제는 터지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뭐, 무슨 불온한 기운이 있거든 키메라가 알려 주기로 했고.”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반박하진 못하는 미하일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결함을 인정했다. 나중에 언젠가는 이 결함이 무슨 의미인지 알릴 수 있겠지. 이미 알레시아스를 방문하여 페넬로파와도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운명의 격랑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걸 찾아보자고. 자, 움직이자!”
이때야말로 하야스단은, 물론 네마냐도 이제는 당당히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 우뚝 선 것이다. 회귀는 자신의 결단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 운명은 온전히 자신들의 것이다.
-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