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운명의 격랑 (2)
다시 사흘이 흘러, 3월 하고도 벌써 20일이 되었다. 며칠 동안 고블린-오그르 잔당을 토벌하던 엘레나의 기사단은 물론 다르빌에서 적 3만과 싸우던 제국군 및 제눌트 외 연합군도 달려왔다.
그렇게 나코르잔으로부터 강을 따라 뻗어 나온 평탄한 구릉지에 연합군 부대들인 속속 집결했다. 연이어 격렬한 전투가 잇따랐지만 손실도 크지 않았고, 오히려 고블린-오그르 해방군까지 합쳐지면서 인원은 더 늘었다.
“오늘까지 그렇게 모인 병력만 거의 4만 3천 명입니다. 고블린 해방군만 거의 5천에 달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바가반드 군을 거느리고 뒤따라온 헤누크가 연합군 전력을 설명하면서 놀라는 기색을 감출 줄 몰랐다. 헤누크를 조금 앞서 걸어가는 네마냐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다만 아직 연합에 가담하지 않은 군세가 있는데, 거기가 좀 묘한 곳이더군요.”
“어디지?”
잠시 주위를 살피던 헤누크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한 단어를 거론했다.
“미크라야크 말입니다.”
“아.”
“미크라야크?”
옆에서 묵묵하게 따라 걷던 알레시아스가 되물었다. 가끔 세상에 나와 돌아다녔다니 어떤 덴지는 알겠지만 미크라야크의 느긋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를 수 있다.
“뭐, 경쟁의식이죠. 갈기갈기 찢어진 하야크의 주도권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에 관한.”
“나도 하야스단의 사람이지만 좀처럼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고향 생각만 하면 슬프지. 물론 이젠 그 고향도 기록 속에나 있지만.”
알레시아스는 아카데미아에서 특채되어 제국에서 활동했지만 애당초 하야스단 북부의 한 도시 출생이었다. 오래전 고블린들에 파괴되어 이젠 유적조차도 남지 않았지만.
“어쨌든 미크라야크는 하야크 해체를 원하는 외세의 개입이 원활하도록 ‘폭정’이라는 명분을 주었죠. 그렇기에 그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그럴 겁니다. 더군다나 하야크 왕국을 대표하는 혈통은 바난드에도 흐르니, 대체 후보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때 제눌트가 다가오더니 네마냐에게 인사를 건넸다. 잠시 곁에 선 알레시아스를 의아하게 보던 그였지만 곧 관심을 껐다.
“제국군에 전해진 낭보는 들으셨습니까?”
“낭보?”
되물으면서도 네마냐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제국군에게 네마냐가 들을 수 있는 희소식은 한 가지뿐이다. 제눌트가 전한 소식은 과연 예상한 그대로였다.
“예. 마법성의 강력한 항의에 원로원도 결국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군단 주둔을 허용하기로 돌아섰답니다.”
“휴, 다행이군. 고블린을 물리쳐도 누군가의 어디가 새로 공격을 할지도 모르는데, 당분간은 재건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
“정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야스단 군단이 보충될 때까지 임시로 니콜라스 특사에게 지휘권을 주고, 당분간 보조병 군단 하나를 더 주둔시킨답니다.”
‘화들짝 놀란 모양이군.’
내심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험이 하야스단만의 것이 아니란 분석만 했더라면 군단을 몰아넣어 이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까.
“사서 손해를 보는 사람들. 어쨌든 제국 군부와 원로원 사이의 분열에 우리가 피를 보지 않아 다행이지.”
“그러나 이게 오래갈 수 있을까요. 성국이나 바난드는 물론 아라가트 마탑 대표들조차 난색이던데요.”
“아, 그렇겠지. 아라가트 마탑주께서 반역자들을 내치느라고 가뜩이나 취약한데 마탑은 제국의 분열이 걱정될 수밖에.”
말카시안은 오랫동안 별러왔던 내부 숙청 작업을 칼주안 전투 직후 일거에 끝냈다. 그간 하야스단 곳곳에 일었던 그림자 오염이나 던전 출몰 사태 배후엔 마탑의 원로급 학자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마탑 내부에 침입한 고블린 내통자들을 내어 쫓고 모든 정부 기능을 회복했다.]
“물론 그러지 않았으면 연합군의 토벌 대상이 되었을 테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했을 일이지. 그러나 동시에, 하야스단의 방패가 되어야 할 마탑이 그간 의심대로 반역자들의 땅이었단 걸 인증한 셈이니…….”
그동안 그들의 수도 암피에르에서 억지를 쓰며 통과시켰던 「방위조약」에 따라 엄격히 제한되었던 각 영지의 교류는 트일 예정이다. 그간 내내 하야크 통합을 막았던 건 마탑도 마탑이고 그 뒤에 제국이 이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이젠 제국이 뜻을 바꾸고 있었다.
“제국이 이 고원을 방패막이로 삼으려면 통합되어야 한다는 걸 이해했지. 마탑도 이젠 그걸 막을 수 없고.”
“아하…….”
이래저래 말은 많았지만 결국 그림자 마법사들이 하야스단의 회생을 도운 셈이다. 제국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고, 반역자 색출로 바난드의 반대자들을 대거 약화시킬 수 있었으니까. 정치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 제눌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저, 주군. 저쪽에 새로운 군세가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지금 나타나는 부대면 딱 그곳일 테니…….”
“음? 아, 그렇네. 가 봐야겠군. 선생께서는 좀 쉬고 계시겠습니까?”
알레시아스는 새로운 인물과 이야기가 많아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바가반드군의 천막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쁜 하루였다.’
아마도 거기선 미리 네마냐에게 사정을 듣고 존경을 담아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 마법사가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긴 쉬울 터였다.
“오랜만이군요.”
“하하, 이게 누구십니까. 호바니스 기사단장이시군요. 슴바트 전하께서 직접 영명한 기사까지 대동해 주셨을 줄이야…….”
네마냐는 어느새 훌쩍 멀리 나아가 미크라야크의 경보병 부대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껄끄러운 상대라지만 어쨌든 5천 명이나 되는 숫자를 불리는 건 나쁜 건 아니었다.
* * *
3월 22일, 오후 3시경.
4만 8천 명에 달하는 연합군은 마침내 고블린의 본거지, 고블린 성채가 있다는 북부 산맥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북부 산맥의 어귀로 접어들면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는 지역이다. 철저하게 자유 고블린 해방군의 안내대로 움직여야 하며, 독자 행동은 금지다.]
바난드의 엘레나 국왕 대리 및 네마냐의 제안에 따라 연합군 전원에 내려진 지령이었다. 나코르잔에서 각 영지 군대마다 오크 하나씩 안내원으로 배치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도 역부족임이 드러났다.
“계속 전진은 합니다만 사방이 얕은 구릉평원이고, 딱히 수맥이 흐를 것 같지도 않은 곳뿐이더군요.”
“제일 문제는 오크 안내자들이 이곳 경계선을 넘어가면 역시 지리를 모른다는 거야.”
행군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긴급하게 모인 연합군 수뇌부는 답답한 회의를 이어 갔다.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살짝 꺾였기 때문에 한쪽은 높은 산맥, 다른 한쪽은 호수로 연결된 풍광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다들 관심을 둘 상황은 못 되었지만.
“저 호수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그런 상황에서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네마냐의 천진난만한 질문. 잠시 맥이 꺾인 듯한 사람들의 표정이 있었다. 오크군 참관 장교 하나가 이내 손을 들었다.
“예. 이곳은 우레이미야 호수라고 합니다.”
“우레이미야…… 거참, 안 어울리는군.”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얼마 전 전사했던 군단의 족장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호수와 그 주변의 얇은 평원은 검은 마법사의 후예들이 정착한 땅이기도 하지.”
네마냐의 담담한 한마디에 수뇌들은 슬슬 불안한 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놈들이 설마 또 그림자 마법을 펼쳐내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이미 왕창 깨졌고, 흩어지거나 죽은 게 태반이니. 어쩌면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래서야 쓰나. 모조리 잡아다 깊은 감옥 아래 꽁꽁 가둬 놔야죠.”
그런 편한 이야기들. 네마냐는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그때 최전방으로부터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차림새로 보아 정찰을 떠났던 정보대 소속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병사가 네마냐의 곁으로 다가섰다.
“보고드립니다!”
“그래, 뭔가 특이한 걸 발견했나?”
“예! 산맥 안쪽의 분지 지형에 상당한 규모의 고블린 성채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확인한 문서나 경험담보다 훨씬 큽니다.”
“군단 측에서 요 몇 년 동안 새로 강화했겠지.”
아직도 인사불성에서 회복되지 못한 제독 대신 여전히 지휘를 맡은 아르미니우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남긴 대사였다. 하지만 불길한 보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고블린 성채 앞쪽에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한 성채가 있다는 겁니다.”
“앞쪽?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외관은 검은색의 윤택이 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치 맞물린 이빨처럼 호수 앞 평원의 그 검은 성채와 고블린 성채가 서로 성원하는 기세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검은 성채부터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검은 마법사의 후예들이 거기 있겠습니다만.”
미크라야크의 기사단장 호바니샨을 필두로 여러 사람은 검은 성채부터 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문제는 그림자 마나를 상대하려면 신관이 있어야 한다는 거요. 아시다시피 지금 원정군에 신관이 부족하지 않소?”
아르미니우스가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니 타위비크의 대공자 바쿠헨도 과연 그렇다며 의견에 힘을 더했다.
“아시겠지마는, 그림자 던전이 일단 펼쳐지면 아무리 많은 병력이 덤벼도 돌파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법사로서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아르미니우스는 바쿠헨 옆에서 나란히 고삐를 잡고 있는 바쿠란에게 의견을 물었다. 바쿠란은 조금 떨어져 있는 하라드와 시선을 교환하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마법으론 그림자 마나를 상대하기 곤란합니다. 우리는 속도가 느린 공성기 대신 전략 마법으로 상대하고자 마법사를 데려왔는데 그림자 마나를 상대하면 공성은 누가 합니까.”
“음, 그것도 맞는 말씀이군.”
“지금이라도 성국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우리가 기껏 출진해서 코앞에 머무르고 있으면 또 무슨 수를 벌일지 몰라.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신관 지원은 불가하네.”
갑론을박은 쉽게 결론이 날 수 없었다. 결국 엘레나는 우선 검은 성채 앞까지 진군해서 두 거점의 왕래나 외부 교통을 차단하자고 했다.
“우선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입구를 틀어막는 게 중요합니다. 그 대신 고블린 자유군을 고블린 성채 공격에 세우죠. 설득과 공작을 하기에도 그편이 나을 테니.”
누구든 이의가 있을 리는 없었다.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네마냐에게 하라드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분께 말씀을 드리는 게 좋지 않겠어, 형?”
“아, 응. 아무래도 그림자 세계를 걷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고 했으니까. 적어도 우리가 무작정 들이치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르겠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네마냐는 곧 말머리를 돌려 알레시아스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달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알레시아스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셨군.”
“예상하셨나 보군요.”
“뭐…… 그 사람들을 당해내려면 공허 에너지 정도가 아니면 많이 피곤하니까. 당연한 이야기겠지.”
거기까지 말을 꺼내고, 알레시아스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네마냐는 말을 몰아 좀 더 가까이 접근한 뒤 알레시아스의 팔을 붙잡아 말에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왔다.
“자, 그럼 이제 마나에 배척받은 자손을 설득하러 가 볼까.”
천연덕스러운 너스레에 네마냐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박차를 가했다. 이제 이들의 시선에도 무광의 검은색 돌을 깎아 쌓아 올린 높다란 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꽤나 복잡했다.
* * *
“항복하라! 이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연합군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자유 고블린 해방군 8천 명 등 1만여 명은 고블린 군단의 본거지를, 나머지 연합군은 검은 마법사의 탑을 포위했다.
“헛소리엔 응답하지 말고, 흔들리지도 마라.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은 오는 중일 뿐이니까. 지금만 참고 견디면 된다.”
군대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소수 병력과 함께 무사히 돌아온 페넬로파는 튼튼한 방어를 주문했다. 여명의 빛을 따라서 여기까지 도주했던 아카데미아의 후예들은 이 정도 위기와 회유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릴 박해한 놈들과 타협은 없다!”
“두 번 속을까 보냐, 이 제국의 앞잡이 놈들!”
“검은 마탑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네마냐가 어쨌든 하긴 해 봐야 한다던 항복 제안은, 역시나 부질없이 끝을 맺었다. 네마냐의 허리를 붙잡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알레시아스가 자신이 나서겠다고 했다.
“괜찮겠습니까? 악에 받친 사람들이라 다짜고짜 공격이라도 한다면…….”
“그 정도에 당할 것 같으면 대륙의 현자라는 타이틀은 내려놔야죠, 흐흐.”
“하기야, 그렇긴 합니다.”
알레시아스는 말을 마치곤 손가락을 튕겼다. 삽시간에 두둥실, 몸이 떠올랐다. 어지간한 양의 마나로는 사람은커녕 사물도 띄우기 어렵다는 부양 마법이다. 많은 양의 마나를 얻으려면 대기 중 마나를 얻어야 하지만, 속성 마나라 인간 마법사는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상위 개념인 공허 마나를 쓰게 되면 마나의 속성조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지.’
마나가 얼마나 무수하게 모여들었는지, 알레시아스 주변으로 은은한 빛무리가 보일 정도였다. 미하일이 초반 폐광 방문 당시 네마냐 자신에게도 보였다고 했던 그 기운이었다.
“아니, 저게 뭐야……. 저게 마나의 마법으로 가능한 건가?”
“탑주님, 저걸 좀 보십시오. 웬 사내가……!”
차가운 시선으로 네마냐를 보던 페넬로파도 경악에 찬 눈빛으로 그 현장을 바라보았다. 이를 악문 그는 바로 공격 개시를 내렸다.
“여명의 빛으로 섬멸해라!”
당황했지만 이내 탑주의 불같은 호령에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은 제각기 이것저것 마법을 준비해서 발사했다. 허공에 고립된 마법사 혼자서 감당할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아앗.”
“저런 바보 같은!”
연합군은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락없이 당해 비명횡사하리란 예측이 들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스르륵!
“어…… 저것 좀 보십시오. 대체 저게 무슨 일입니까?”
“어? 그림자의 위력이 그대로 무력화된 건가? 어떻게 가능하지?”
“신관의 성력 아닙니까?”
‘여명’ 혹은 ‘그림자의 힘’이라는 마법 공격이 불과 마법사의 세 뼘 거리에서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아, 아니 저런!”
“놈이 마법사가 아니라 신관이었어?”
“그럴 리가! 성력 자체는 에너지가 아닌데 어떻게 공중부양 마법을 하겠어.”
“…….”
페넬로파는 짚이는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대번에 상대에게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부터 남달랐다. 가끔 네마냐에게서 느꼈던 그 기운. 마나도, 여명의 빛도 아닌 그 이상의 것.
‘아니야. 그래선 안 된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반드시 밀어붙여야 해.’
이젠 상대가 공허 마나를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다는 뜻을 굳혔다. 누군가를 탄압하고 얻어낸 권력에 빌붙는다면 그게 누구라고 한들 세상의 진실을 가리는 것이다.
‘거짓된 질서의 타도…… 공허 에너지 세계로 이어지는 길은 여명의 빛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성 알레시아스께서 보여 준 길. 틀렸을 리가 없지.’
알레시아스는 점점 더 높이 떠올라 이제는 검은 탑 주변의 성채를 내려다볼 정도가 되었다. 높이가 높아질수록 그에 따라 소모되는 마나량이 압도적으로 늘었다. 일부러 노출시킨 건 상대방이 자신의 대략적인 정체를 알아보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시대에 이르기까지 공허 마나를 자유자재로 완벽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의 대현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저렇게 분노로 판단이 흐려진 상태라서야 어떻게 뭔가를 할 수도 없겠군. 일단 흥분을 가라앉혀야 하나.”
“네가 어떤 존재건 성자 알레시아스의 가르침을 막을 순 없다! 모두들 다시 공격 준비!”
“알레시아스라…… 내 가르침이 언제 그렇게 변형이 되어 버린 건지, 참.”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알레시아스는 이제 말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
[네마냐 군, 이 친구들은 일단 제 제자라고 자칭을 했으니 제거할 순 없겠군요. 제가 거두어들이도록 하죠.]
네마냐는 전언으로 들려온 이야기에 허공 위를 쳐다보았다. 알레시아스가 빤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두어들인다, 인가.’
아마도 저지른 죄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모두 잡아들여 없애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백 년을 이어 내려온 사슬 고리 같은 연쇄적 복수심을 이어 나갈 수도 없다.
‘뭐, 다른 사람들이야 적당히 둘러대야지.’
그런 마음으로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전언을 보냈다.
[잘 부탁합니다. 이제는 두 마나가 더는 대립하는 일이 없이 공허로 이어지는 길을 열길.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탑주 녀석은 특히 더 잘 부탁합니다.]
탑주라. 한눈에 보아도 품고 있는 마나의 자질만으로도 누군지 알 만했다. 알레시아스는 표정이야 보이지 않겠지만 아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거두어들일 때로군. 초면의 어리석은 제자들은 일단 몇 대씩 때려 주고 시작해야겠지만. 모처럼 바쁘겠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뒤, 알레시아스는 나지막하게 혼자만의 주문을 외웠다.
[제한 영역으로부터 이동](anazeuynumi, epi katanaykazw-ektmhma)
마치 정교한 프로그램 코딩이라도 짠 듯 복잡하지만, 내용은 분명한 수식이었다. 그와 동시에 성채 주변의 마나 전체가 뒤바뀌었다. 그림자 마나가 모조리 공허 마나로 바뀐 것이다.
“으윽, 이 느낌은…….”
“마나가 메말라 버렸어!”
알 수 없는 거대한 파동이었다. 연합군 측 역시 말이 기겁하고 날뛰면서 군인과 영주들도 당황하며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이냐! 저런 광경은 일생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건 아마도 이 자리의 누구라도 마찬가질 겁니다, 부제독.”
엘레나 역시 부제독에게 그런 말을 건네면서도 전율하기는 처음인 광경이었다.
“저, 저것 봐!”
“사라진다, 검은 마법사들이!”
물론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임전 태세를 갖추고 최후 일인까지 항전할 작정이던 마법사들이 홀연히 증발해 버린 것이다.
“맙소사!”
“어떻게 된 건가, 대체.”
제멋대로 당황해하는 말과 씨름하며 연합군은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네마냐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낸 것을, 엘레나와 제눌트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입니다, 제독! 당장 요새를 취해야 합니다. 지금 어쨌건 적이 제거되었으니까요.”
“……옳아, 이대로 적군의 숨통을 압박한다. 제국군이 동문을, 타위비크와 중부 영지들이 서문을 칩시다. 바난드 군은 남문을 쳐 주시오!”
“알겠습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원래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을 주문했다. 칼을 빼 들고 각 지휘관은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뜻하지 않지만 낙성…… 그럼 이제 남은 건.”
엘레나는 기사대에 재빨리 결집 신호를 보내며 잠시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험준한 산맥 안쪽에 웅거한 채 해방 고블린 군단에 맞서는 우레이미야 최후의 친위세력. 이제 그들만이 마지막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우선은 그림보쉬에게 맡겨 볼까.”
“결집 끝났습니다, 전하!”
여전히 본토에서 치안 작업에 한창인 필로칼리스 대신 이제 일 처리에 능숙해진 클로루스의 당찬 보고였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투구의 눈가리개를 덮었다. 그리곤 칼을 뽑아 높이 들었다.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최대한 빨리 돌입하라!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3개 군으로 이루어진 대군은 순식간에 해안의 요새를 향하여 물밀 듯 쏟아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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