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기만 작전 (1)
마치 회귀하던 그 날과도 같았다. 끝없는 계곡 아래로 낙하하는 듯한 추락감. 어디 한 군데 걸리는 것도 없이 무한히 떨어지는 이 느낌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는 거지.’
다행히도 네마냐의 불안감과는 달리 회귀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몸의 감각은 익숙해졌다. 그리고 저 아래 밑바닥엔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푸른 빛의 덩어리가 군데군데 메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저 빛……. 그래, 기억하지. 저건 대체 뭐였지. 회귀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그럼 지금의 나는 또 한 번 죽었단 건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네마냐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키메라가 치명상을 입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달려들었고, 우레이미야의 도끼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것뿐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자신마저 압도적인 힘에 의한 반발력으로 날아갔다는 것뿐.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레이미야는 어떻게 된 걸까. 내가 죽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는 내가 있던 하야스단이 아닌 건 맞는데.’
―턱.
어딘지 모를 끝없는 어둠 사이로 네마냐의 발이 닿았다. 아주 깊고 깊은, 어두컴컴한 계곡이었다. 말라붙은 앙상한 나뭇가지가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로 어두운 길이 이어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움직여 봐야 무엇이든 진전이 있을 터였다. 군데군데 빛나고 있는 푸른빛이 비취는 길을 따라 네마냐는 계속 걸어갔다.
“여긴……?”
길의 끝에는 아주 낡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아니, 집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무슨 전당과도 같은 곳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의 양식은 네마냐도 본 적이 있었다.
“바난드의 사자궁, 그 양식이었어. 하지만 그 건물들은 옛날 난쟁이 왕국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하지만 일단 이 건물을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 검은 계곡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들어가자, 에휴.”
―탁.
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 마치 방금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뜻밖에도 온기가 감도는 공간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사람이 살 것 같은 공간은 아니었는데. 어라, 저건……?”
네마냐는 입구에서 들여다보이는 작은 방으로 무심코 걸음을 옮겼다. 마치 작업실처럼 보이는 이 공간엔 서서 읽는 독서대,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 곳곳마다 책이 그득그득했다. 그 와중에 이것저것 쌓여 있는 책상 위에는 네마냐도 조금 익숙한 제목의 책이 놓여 있었다.
『마나철학해석론』
부제는 달려 있지 않았고 아직 완성조차 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한창 작성되고 있던 부분은 공허 마나 내지 암흑 에너지의 정체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다시 묘하게도, 이 자리에서 그 주제를 접하게 되다니.
‘그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순간에 느꼈던 그 이상한 기운. 그건 마나가 아니었어. 검푸른 검은 던전의 것도 아니었지. 둘 모두 유사하긴 해도 같은 건 아니었어.’
이론적으론 마나나 역마나와 대비되는 완벽한 잠재적 에너지로서의 공허 마나는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 직접 겪어 본다고 해도 확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걸 쓰는 사람이 여기에 있었단 건가? 여기서 책을 만들어 배포하고…….”
무심결에 네마냐는 그 책자에 손을 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파지직!
요란한 스파크가 튀면서, 무언가 막대한 정보가 마나의 형태로 손가락을 타고 흘러들었다. 깜짝 놀란 네마냐는 바로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부질없었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 으앗! 이, 이 생각은……!”
[제국멸망……검은던전……창조되지않은이면의에너지……무한의정령계……실라이온성산……암시가있는곳.]
[경고! 누군가의 정보가 무단으로 당신에게 전달됩니다. 만약 악의적으로 선별된 정보가 있다면 당신의 기억과 정보를 오염시키고 큰 착오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 경고만 하고 내버려 둔다고? 뭐라도 손 좀 써 봐라, 이 망할 시스템아!’
그러나 이 야속한 UI는 끝끝내 모든 정보를 받아 네마냐의 두뇌로 전달해 버렸다. 어마어마한, 누군가의 인생 분량에 해당하는 기억이 그대로 이식되었다. 깜짝 놀란 온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현기증을 불러왔다.
“으윽…….”
[정보 업그레이드]
[고대 인물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신의 지식을 대폭 갱신했습니다. 하야스단에 관한 기억이 강화되고 정령계에 관한 지식을 얻습니다.]
“정령계?”
잠시 눈을 감아 현기증도 참으며 UI의 설명을 읽던 네마냐의 되물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UI나 다른 누군가가 답을 해 줄 리는 없었다. 그저 갑자기 이런 행운이 왜 생긴 것인가 물어볼 뿐.
“이 책에 뭐라도 있었나?”
[탐지]
뒤늦게나마 탐지를 걸어 보았다. 그 결과도 사실 별다를 것은 없었다.
[고대에 실전된 고급 마법. 자신의 지식을 특별한 아티팩트에 걸어, 그것을 해체한 사람에게 전해 준다. 주로 제국의 핍박을 받던 시절 아카데미아 학자들이 사용했으며 6세기 중엽을 끝으로 더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럼 고대 대마법사가 아티팩트라도 걸었단 건가. 정령계의 비밀이니 세계의 비밀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알 만한 사람이라면…….”
―지잉.
“어?”
놀랄 만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억 전수 마법을 경험하고 불과 몇 초나 흘렀을까. 마치 자동화된 기계처럼, 이번엔 유리처럼 투명한 원이 허공에 그려지더니 구멍을 만들었다. 워프 출입구였다.
“워프라고?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공간을 왜곡시켜서 만든다는 왜곡 마법의 정점에 있는 것이 워프 마법이다. 다른 왜곡 마법이야 사람의 시선만 교란하면 그만이라지만, 워프 마법은 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사물과 생명체를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는 보호력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대마법사급이 아니면 아예 하지 말라는 권고까지 내려오는데, 이걸?”
하지만 미심쩍어도 이 워프 마법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곧 만들어졌다. 화면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늪지대를 배경으로 창백하게 쓰러져 있는 자신의 몸과 그 주위를 둘러싼 하라드,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하야스단. 망각의 늪! 전투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전투 돌입 시간을 맞추기 위해 연락해 온 바쿠헨으로부터 들은 이름이 딱 알맞았다.
“이리로 나가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정보를 얻어도 될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에 네마냐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여기 머문다면 대체 이곳은 어딘지, 이 책을 쓰고 기억을 마법으로 전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우웅!
하지만 어째선지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워프 입구에서 들리는 경고음은 점점 커져 갔다. 귓가에선 이명마저 들리고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유체이탈의 경우처럼 혼이 몸을 오래 떠나 있으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나.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오면 좋겠지만 일단은 급한 일부터…… 다시 보자고.”
결심을 내린 네마냐는 서둘러 워프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투명한 벽을 넘어 먼 곳으로 넘어갔다. 그 순간, 위태롭게 지탱하던 워프 출구는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갔군. 이걸로 두 번째인 건가.”
허공에서 들리는 음성. 이윽고 허공의 투명한 공간으로부터 스윽, 옷가지가 벗겨지는 모양으로 투명한 공간이 벗겨졌다. 네마냐보다 겨우 몇 살쯤 나이 많을 법한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가 아직 만날 때는 아니지. 우선 네가 헤쳐나가면서 얻어 두어야 할 경험이 많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정체를 드러내고 만날 때까지는 여유는 좀 더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 청년은 어두운 자줏빛의 로브를 집어 들어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한 손에는 방에 두었던 촛대를 들고, 방을 나선 마법사는 그렇게 다시 어두운 계곡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다시 돌아와서, 하야스단의 어느 늪지대.
보병들이 급하게 엄호하는 가운데 수레 몇 대가 키메라와 영주급 인원 몇 명을 날랐다. 그중 한 대에는 네마냐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괜찮아? 정신 좀 차려 봐, 제발!”
“붙들고 있어도 소용없어요. 꽤 충격이 컸을 테니까. 일단 제게 맡겨 두세요.”
“마나 주입으로 회복될 수 있는 거야? 치유사나 후방의 트라야브나라도 불러와서…….”
엘레나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은 아니었다. 바로 이동하기에도 바쁜 전선에서 아무리 중요하다곤 해도 네마냐 치료만을 위해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지금은 안 돼죠. 아즈디샤트까지만 가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우선은 형의 자가치유력을 최대한 믿고 서둘러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가뜩이나 바가반드 경께서 목숨을 걸며 지켜내신 키메라마저 상처가 어긋날 수 있으니, 자칫 잘못하면 그 모든 노력이…….”
제눌트의 말은 조금 냉정하긴 해도 사실이었다. 위험을 모를 리가 없는 네마냐가 키메라를 구하기 위해 그 위험한 마나 폭심지로 뛰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 뜻을 지켜주어야 할 것이다. 망설이는 건…… 그저 포기할 수는 없어서였다.
“……알았다. 일단 나자리안 경이 소멸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하라드 남작, 자네가 책임지고 내부의 마나 충돌을 막아 줄 수 있겠어?”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하라드의 굳은 눈빛을 다짐으로 받으며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쌍소멸. 마나와 검은 마나가 만나서 둘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이다. 600년 전의 전쟁 때는 미처 관찰할 틈도 없었고 오랫동안 없었던 현상이라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치곤 다행히도 쌍소멸이 폭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신체 내부가 텅 비었을 거야. 검은 마나가 꽤 유입되어 버렸겠지. 어떻게든 마나를 추가로 주입해서 역전을 시켜야…….”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전투 마법을 사용하던 중 오염된 마나 일부만 들어가도 경련을 일으키는 게 인간의 몸이다.
“어디 한번 제대로 해 보자.”
네마냐의 팔목을 걷어붙이고 덜컹대는 수레 위에서 하라드는 먼저 몸의 상태부터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 왜 멀쩡하지? 마치 마법조차도 한 번도 안 쓴 사람처럼 아무 이상이 없는데. 심지어 마나도 펑펑 넘쳐나고.”
눈썹을 꿈틀거린 하라드는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며 재차 진단을 이어 갔다. 하지만 결과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
“으으…….”
“어, 어? 이봐, 형! 정신 차려 봐? 내가 보여? 보여? 일어난 거야?”
하라드가 고민에 빠진 사이, 놀랍게도 네마냐가 깊은 침묵에서 깨어났다. 밭은기침을 두어 차례 했지만 건강엔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이 잠이라도 들었던 것처럼.
“음…… 살아 있군. 네가 살려 준 거냐?”
역시 전후 사정을 알아차린 네마냐는 능청스러운 물음과 함께 부드럽게 넘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느 정도 순간 짐작은 갔지만 하라드는 우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랬군.”
“어? 음, 그랬다니 뭐가?”
설마 자신이 겪었던 수상한 경험을 녀석도 알아 버린 걸까? 살짝 의아한 네마냐였다. 하지만 이내 녀석의 말을 듣곤.
“휴. 형은 정말 마나와 신의 사랑을 골고루 받는 모양이구나. 그 순간에 공허 마나를 일으켜서 검은 마나를 흡수해 버리다니.”
“그, 그런가? 하하…….”
하라드가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무시하고 네마냐는 재빠르게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우리 병력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하, 그래. 형이 우선 성공적으로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지. 사망자는 모두 수습할 순 없었지만 닿는 대로 우선 쌓아 두고, 최소한의 화장은 했어. 그리고 나머지는 이렇게 함께 도주하는 중.”
“아즈디샤트로? 타위비크도 예정대로 철수했겠지? 박자를 맞춰 후퇴해야 서로 무사할 테니.”
“물론이지. 지금쯤은 북쪽으로 내달리고 있을 거야. 그쪽은 우리보다 기동력이 좋으니 아무 걱정이 없겠지.”
대충 여기까진 자신이 생각한 대로였다. 다만 문제라면, 우레이미야가 설사 거동 불능이 되더라도 쫓아올지 모를 고블린 추격대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우리가 무사히 후퇴하는 방법이겠군.”
“뭐야, 뭔가 생각해 둔 대책이라도 있는 거야? 그 몸으로?”
놀란 듯한 녀석이 물었다. 당연하지 않나. 이 네마냐가 그 정도도 준비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지. 콧방귀를 뀌며, 네마냐는 나름의 근거 있는 허세를 부렸다.
“물론이지. 적어도 우리가 겁이 나서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는 건 추격자 놈들에게 제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
아직 늪 전투의 정확한 의의조차 내리지 못한 상태지만, 그 원수 같은 고블린들에게 또 한 번의 타격을 줄 기회였다. 네마냐가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다.
“놈들에게 추격전이 전투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보여 주지.”
마치 광기라도 어린 것 같은 냉혹한 미소. 네마냐에게서 거의 본 적이 없던 그 미소에 마주 앉은 하라드마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 공포는 고블린들에겐 가히 저주처럼 임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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