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결전, 망각의 늪 전투 (5)
전후방 도합 2만여 명의 인간 병사들. 그사이에 끼어 있는 6만 명의 고블린 군단. 사실 아예 가져다 댈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포위전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작전입니다.”
제눌트가 소매를 펄럭이면서 거세게 항의했다. 네마냐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정상적인 범주에서의 판단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니, 그걸 아시는 데도 그런 말씀을 꺼내셨단 말씀입니까?”
“음, 다는 아니고 반 정도는?”
말장난을 치는 네마냐의 반응에 제눌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번 두 번의 고블린들은 별것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장난이 아닌 게 확실하단 말입니다.”
“알아요. 무려 본대, 그것도 아마 어딘가 그 대장이 몸소 지휘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네마냐나 전군을 이끌게 될 엘레나마저 큰 걱정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검을 닦던 엘레나가 제눌트를 이내 말렸다.
“너무 걱정 마, 제눌트. 어차피 우리가 하자는 건 위장 공세지, 진짜 공격도 아니니까.”
“위장 공세, 말입니까?”
“그래.”
적극적으로 나팔을 불며 대대적인 공격을 선보이자는 작전. 하지만 바가반드의 전 병력 3천, 바난드의 병력까지 합해 1만여 명 정도론 여전히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접근한다면 어떨까?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어쨌거나 전력상 훨씬 중요한 기병 생존자 500여 기, 보병 2만여 명을 무사히 보존하는 거야.”
제국군의 핵심이자 연합군의 핵심인 기병대 등 6천이 몰살당했다지만, 여전히 제국군은 2만여 명이나 되었다. 적어도 전선을 위태롭게나마 지탱하려면 이 병력은 반드시 남아야 했다.
“그러자면 일정한 승리를 거두면서도, 아군이 무사히 피신할 때까지만 버티면 돼.”
엘레나가 간단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이미 그런 구체적인 작전을 도출하는 데까지 네마냐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였기에 가능했지만.
“그런……. 이제야 두 분이 태연하게 계신 게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그 작전을 들으니 훨씬 더 어려운 느낌입니다만.”
“물론이지. 그러니까 우리 바난드가 고원의 문제해결사가 되어야 할 것 아니겠어, 장군?”
문제해결사. 바난드 내부의 왕위 계승 문제뿐만 아니라 옛 하야크 내전의 모든 여파까지 헤아린 단어임이 틀림없었다.
‘슴바트의 영향력 확대를 최대한 저지하고, 왕국 내부의 계승 전쟁에서도 우위에 서겠다……. 정말 무서운 계산이군.’
하야스단 고원의 가장 큰 걱정이고 근심거리인 고블린 문제에서 실제야 어쨌든 분명한 ‘공적’을 세운다면? 제국도 실패하고 타위비크마저 어려움을 겪는 이 마당에?
[바난드의 왕위계승은 물론 하야스단 전체를 아우르는 영향력의 강화.]
제국이 그렇게 기를 쓰고 막으려 들었으며, 미크라야크의 슴바트가 어떻게든 막으려던 사건. 현 국왕 하코브 4세가 끝끝내 이루지 못한 고원 통일의 꿈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앞선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사이에 쓰일 수 있다면 어디까지 실현할 수 있을까.’
제눌트는 비로소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바로 지금, 전장에서 제눌트가 아무 의심 없이 휘두르는 검으로 구현되었다.
―서걱!
“그르르…….”
녹색의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고블린. 제눌트는 그때 이미 다른 고블린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라! 두 명씩 조를 맞추어 고블린을 상대하고, 오그르는 멀찍이서 견제하라!”
“발사!”
급하게 공수해 온 발리스타 노포 세 대, 그리고 특별히 마나를 각인한 화살을 공수한 궁수들이 활을 쏘았다. 이들이 노리는 건 오로지 하나, 오그르!
“끄아!”
“크읏, 바난드 놈…… 컥!”
―펑!
타오르는 마나의 불길은 엘프의 화살 덕분에 익숙해진 오그르들조차 손쓸 도리가 없었다. 후방에서 계속 사격을 이어 가니, 급기야 고블린들이 자리 잡은 들판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을 끄지 마, 피해서 계속 싸워!”
“하, 하지만 불을 안 끄면…….”
“마도사들에게 부탁을 하란 말이야!”
페넬로파는 급한 대로 물의 원소만 소환하는 가장 기초적인 술식으로 불을 진화했다. 그러나 마법사로는 하라드 하나 정도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바난드 군의 마나 화살 덕분에 페넬로파는 타위비크를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런, 제길! 타위비크의 바쿠란을 묶어 두지 않으면 큰일 나는데.”
애타게 한창 날뛰고 있는 뒤쪽의 우레이미야를 바라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방의 마나 불을 바로 막지 못하면 군단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게 뻔했다. 고블린들까지 검은 마법사를 노리는 화살을 막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크왁!”
“검은 마탑주를 지켜!”
“와아악!”
“벌레 같은 놈들.”
혀를 차는 엘레나는 그러면서 재빠르게 뛰어 오그르 하나의 어깨 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노을마저 베어 버린다는 전설의 검사답게 이미 검집에 들어간 검의 궤적은 오그르의 목을 떨어뜨린 뒤였다.
“와, 하아……. 고맙습니다, 왕녀님.”
“괜찮나? 정신 차리고 마저 싸워라. 후방에서 마법사와 포대가 도와줄 테니 오그르 신경은 끄고 고블린 견제를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이미 여러 대 오그르의 방망이에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됐지만 열의에 찬 병사는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엘레나는 조금 적응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어째 네마냐와 같이 싸우기만 하면 유독 병사들이 더 잘 싸우는 느낌이란 말이지. 아마도 심리적인 효과려나.’
이미 네마냐 나자리안이란 일곱 자의 이름이 갖는 힘은 하야스단에서 작지 않았다. 아니, 충분히 컸다. 얼마 전에 키메라와도 소통할 수 있단 소리까지 나왔으니, 어쩌면 하야크의 왕위 자격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 어휴. 됐다, 됐어. 내가 원하는 건 제발 좀 편하게 연금 받으며 살 수 있는 전원주택이지, 눈칫밥 먹으면서 싸우는 왕좌가 아니라니까. 그런 건 전문가들이 해야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속의 본뜻이야 어떨지 알겠나.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같이 전장을 구르는 동안 솔직담백한 성격이란 건 익히 아는 엘레나였다.
“너 말이야.”
―서걱!
“응?”
역시나 번번이 한 손으로 불을 쏘아내고 오라의 검을 휘두르는 네마냐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마법을 모르더라도 마나만 주입할 수 있다면 충분히 오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덕분에 엘레나처럼 정밀하고 전문적인 검은 아니지만, 오그르조차 맨손으론 막을 수 없었다.
“너, 아직도 빨리 은퇴해서 전원주택에 편안하게 사는 게 꿈이야?”
“흠.”
―서걱.
―서걱.
부지런히 베어 넘기면서 네마냐가 묘한 침음을 흘렸다. 어라? 엘레나가 의아하게 보면서 마저 고블린 하나를 썰어 버렸을 때, 네마냐의 답이 돌아왔다.
“아냐. 아무래도 포상금 같은 거라도 더 받아야지. 이렇게 개고생하는데 겨우 그것만 받는 게 말이 되나.”
“푸훗.”
“비웃었겠다? 편안한 노후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높으신 분은 모르니까 가능한 거지, 쳇.”
―서거억!
특이하게도 청년실업과 노후 빈곤의 시대에서 살다 온 네마냐로선 이 시대에 참 있기도 어려운 캐릭터가 된 것이다. 그저 예전 읽었던 어느 소설 주인공처럼, 홍차에 보드카나 타 먹으며 조기 연금 생활하는 게 꿈일 뿐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여기 좀 집중하자고 공주님. 아무리 우리가 위장 공세라고는 해도 말이지.”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입을 닫고는 더 열심히 적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힘쓰는 것에만 익숙한 오그르들을 주로 상대하니, 고블린과의 싸움은 익숙한 만여 명의 병력들도 더 위력을 더해 갔다.
“와!”
“좀 더 밀어붙이면 본진이다!”
“좋아죽는 모양이지.”
이를 악문 페넬로파와 검은 마법사들, 고블린 마도사들까지 총동원되어 전후의 적에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마나로 만든 불화살에 이어 하늘에 키메라까지 나타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페넬로파는 이내 과도한 마나 소진으로 어지러움마저 느꼈다.
[스파이라 퓌라, 가이아니!]
―펑, 퍼펑!
“뭐야, 또!”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는 페넬로파는 얼굴에 작렬하는 불타는 느낌에 급히 고개를 가렸다. 멀찍이서 끔찍한 비명, 살이 타는 소리와 단백질 태우는 냄새가 전해졌다.
“바쿠란…… 이 쥐새끼 같은 자식이!”
역시나 마탑의 차석을 달리던 녀석다웠다. 페넬로파가 직접 맞대응했을 땐 팽팽하게 맞설 뿐이었지만 이젠 거리낄 게 없어진 모양이다.
“고블린만으론 전선 유지, 어렵다!”
“어려워, 어렵다! 증원을 보내 달라!”
전방에선 엘프 궁기병과 장창보병의 끈질긴 저항, 후방에선 노포와 마나 화살, 그리고 오라 검사들의 분투까지.
“이익, 우레이미야는 뭘 하는 거야? 전선에서 이 큰 병력이 우왕좌왕하고 있으면 정리해야 할 거 아냐? 얼른, 오그르 제6부대에 연락해서 후방으로 가라고 해! 너희들도 가!”
“괜찮습니까, 마탑주? 저희까지 가면 마탑주를 지킬 호위 세력이…….”
“얼른 가! 전선이 무너지면 호위 세력이 있어도 다 같이 죽는 거야!”
그제야 마법사 한 무리와 고블린 전령이 돌아갔다. 우르르, 산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오그르 부대 하나가 부랴부랴 후방으로 달려갔다.
“어휴…….”
“기다렸나. 전황이 꽤나 재밌어졌군.”
“족장!”
온몸을 인간의 피로 흥건하게 물들인 우레이미야는 이전에 비해 훨씬 건강하게 돌아왔다. 파이프는 언제 물었는지 완전히 식어 버린지 오래였지만, 족장은 숨을 거칠게 쉬지도 혼란을 겪지도 않았다.
“한바탕 뛰놀았더니 이 빌어먹을 도끼도, 나도 한층 건강해진 모양이야. 역시 피를 먹여 주는 게 내 건강의 원천이라니까, 하핫!”
“지금 그런 소릴 할 상황으로 보이지? 지금 전후방에서 전선 흔들리는 거 안 보여?”
“그래, 그러니까 내가 온 거 아닌가. 검은 탑주.”
그 피비린내 나는 고개를 불쑥, 우레이미야는 페넬로파에게로 들이밀었다.
“이럴 때야말로 기회지. 너나 나나 어차피 어둠에 썩어 문드러져 가는 신세. 신나게 데려갈 동료라도 데려가야 하지 않겠나?”
“정말 최악이군……. 이런 놈을 동료라고.”
코를 막는 시늉을 하는 페넬로파. 족장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안 그래도 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찾고 있다. 놈들이 얼마나 가볍게 우릴 생각했는진 몰라도.”
“결정적인 순간?”
“그래. 이 녀석.”
검녹색의 마나가 오라의 형태를 취하며 도끼의 형체를 아예 집어삼킨 족장의 무기. 흥건했던 피는 어느샌가 소름 끼치게도 사라진 상태였다.
“이 녀석이 지금 전율하고 있는 것 아니냐.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먹이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최고의 먹이…… 키메라.”
“흐흐흐.”
그렇게 한창 혼란한 진중에서 두 존재가 얼마나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크으으으으와아아!”
“왔군.”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를 듯한 무서운 소리. 설사 바로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천막 바깥에 세워 둔 고블린과 오그르들마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이 상황이라니.
“데브렉 녀석이 혼비백산, 당할 뻔도 했군. 이렇게나 병력이 흩어져 버리다니. 허나…….”
도끼를 어깨에 걸머쥔 우레이미야는 형형한 눈빛을 띄우며 중얼거렸다.
“이 오그르 제일의 대장, 고블린 종족의 족장…… 계시의 실현자, 어둠에 잠식된 자는 조금 다르게 맞서주지.”
그의 말이 한마디, 한 단어를 읊을 때마다 이미 도끼의 형체를 완전히 잠식해 버린 검녹색 오라는 더더욱 강렬한 힘을 뿜어냈다.
“페넬로파여, 이제 네 병력을 거느리고 돌아가라. 전투가 끝나면 마라반 즈음에서 보자고.”
“그건…….”
황급하게 페넬로파가 말을 끊으려는 찰나, 이 오그르의 제일인자의 몸으로부터 강력한 오라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꺄악!”
“……전투, 시작이다아아아아!”
한껏 뒤로 밀려난 페넬로파는 울컥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부랴부랴 근처에서 폭발음을 듣고 달려온 경악한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스승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후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으아…… 그악, 시작이다. 족장, 광분한다. 우레이미야, 폭주한다!”
페넬로파를 호위하던 고블린 근위병들이 키메라를 봤을 때보다도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 꼴을 보며, 페넬로파는 힘들게 입을 열어 감상을 남겼다.
“시대가 저물고……. 이제는 옛 시대의 수호자도 저무는구나. 키메라여, 하야스단의 신성한 수호자여…….”
‘그날’ 이후론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페넬로파였지만, 오늘만큼은 어째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슬픔? 환희? 굳이 어느 하나만이 개입된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때로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쁨과 저무는 것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 교차하기 마련일 테니.
“와라! 이 구시대의 고약한 고양아! 와서 네 피를 이 어둠에 봉헌하라!”
폭발하는 검녹색의 오라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십 미터의 회오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건, 이미 전쟁이나 마법, 온갖 방식의 살육에 익숙하다고 자부했던 현장의 모든 사람들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세상에…….”
“키메라…… 키메라가 위험해! 이기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어!”
이미 자신을 노리는 것인 줄 알고 키메라는 그 어둠의 폭풍우, 그 중심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네마냐는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것을.
“미안, 어서 병사들 수습해 주고 후퇴해도 되는 거면 얼른 신호를 줘, 알았지?”
“네마냐! 멈춰!”
엘레나가 급하게 말렸지만 이미 네마냐는 그 순간에 수십 미터를 내달리고 있었다. 키메라. 제국군보다 그 이상으로 지금의 전장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 하야스단의 풍부한 마나와 마정석의 근원이 되는 마나의 원천, 그 자체.
“안 돼, 멈춰!”
네마냐는 그렇게 서로 부딪쳐 폭발하려는 두 괴물체의 초점을 향하여, 온몸을 내던져 달려갔다. 이기든 지든, 그건 부차적일 정도로 향후 하야스단의 운명이 걸렸을지도 모를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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