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열린 성문으로 십여 명의 기사와 삼백여 명의 무장 종자가 달려 나왔다. 동원령에 따라 종군한 이들이 아니라 영주의 직속으로 언제나 영주를 종군하는 병력이었다. 네마냐는 가장 믿을 만한 병력만 추린 채 아쇼트의 군대가 사라진 방향으로 움직였다.
“헤누크.”
급하게 말을 모는 네마냐에게 조금 뒤에서 따르던 헤누크가 다가섰다.
“영주님. 아쇼트 왕자의 부대가 향한 곳은 강변의 저지대가 아니라 가르니(Garni)라는, 작은 소도시로 열린 길입니다.”
“거기로 갔다고? 고블린 부대가 거기로 갔다는 말인가?”
묘한 표정으로 이 숙련된 기사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말을 몰다가 이내 헤누크가 꺼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한 시나리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켈리도니온에서 가르니로 가는 길은 우측은 험한 산지, 좌측은 울창한 삼림입니다. 지금 고블린 기병대는 아쇼트 부대를 그쪽으로 유인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그런데 그대로 따라갔단 말이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한 소리였다. 누가 보아도 최소한 복병, 심각하게는 화공과 포위·섬멸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머저리 같은 소갈딱지 왕자 자식이 거길 기어들어 갔다.
“그런 멍청한!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면전에서 까였다고는 해도 부하들의 목숨까지 걸고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우리 병력으로도 상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간신히 눈에 미끄러지지 않을 속도로만 달리고 있습니다만.”
“군마마다 징은 다 박아 뒀겠지? 지금 우리가 믿을 건 그 정도야.”
“아일라 님께서 미리 떠 놓으신 금형으로 촘촘한 가시가 박힌 편자를 입혀 뒀습니다. 눈길에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겨울철 하야스단의 단단하고 미끄러운 도로를 대비하기 위한 네마냐의 몇 안 되는 수단이었다. 당연히 일반 평지에선 말의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어 지난 며칠 동안 부랴부랴 편자를 갈아 끼운 마당이었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전진하도록 해. 무장 종자 중에 궁기병 있지?”
“예. 도로 좌우의 숲과 언덕을 정리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이해가 빨라서 좋네.”
―두두두!
이야기가 끝난 후, 바가반드군은 대화 한마디 없이 계속 말을 달렸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수백 미터를 내달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기사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랴부랴 뒤따랐음에도 기사대를 모으고 성문을 여는 데까지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던 것이다.
‘아쇼트 이 새끼, 아무리 봐도 미리 출정 준비를 다 끝내놓고 연기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빨리 앞질러 갈 수가 있나?’
만약 자신의 설득 3레벨 스킬을 쓰지 않거나 먹히지 않았다면 아쇼트의 절절한 호소가 먹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연합군 주력이 이 외진 산길에서 고작 팔백 마리의 고블린들에게 놀아났겠지.
“……피해가 적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겠지. 어서 아쇼트를 찾자. 만약 아쇼트가 잘못되면 연합군 사기도 문제고, 바난드의 펜자르크가 무슨 마음을 품을지도 몰라.”
아쇼트의 어디가 문제겠는가. 아직 가족으로서 연민을 다 내려놓지 못한 엘레나야 좀 그렇겠지만, 네마냐에게는 펜자르크가 내세운 꼭두각시로밖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아쇼트란 존재가 갖는 정치적 의미였다.
국왕의 아들. 유력한 상속 후계자 중 하나. 경위야 어쨌든 고블린 상대의 성전에 참여한 지도자.
‘정말 자산 하나는 무시무시하다니까.’
그런데 만약 그가 다른 영주의 뜻과 달리 전투를 주장하고, 홀로 나가 매복에 걸려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저 어리석은 자의 멍청한 죽음으로 남을까? 이그노벨상 후보자가 될까?
“그렇게 쉽게 정치적 순교자라는 타이틀을 줄 순 없지. 물론 그렇다고 내가 순교자가 되고 싶단 소리도 아니지만.”
시끄러운 등자 위의 소음 속에서 네마냐는 굳건한 다짐을 삼켰다. 바난드 왕실에서 희생자가 나와 봤자 경쟁하는 두 남매에겐 별다른 이로움이 없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사람대로, 남은 사람은 사람대로. 목숨도, 명예도, 권위도 추락하겠지. 남는 것은 왕가의 명성을 무너뜨린 펜자르크의 야욕뿐…….
‘슴바트가 갑자기 협상의 손길을 내민 것도 어쩌면 그걸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펜자르크가 슴바트와는 또 다른 의미의 악역이니까. 우선은 그놈의 수작부터 막는 게 우선이지.’
정말 펜자르크가 원하는 대로 희생의 제단을 향해 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마음이 급해졌다. 네마냐는 고삐에 한층 더 힘을 넣어 말을 보챘다.
“전속력으로! 힘들겠지만 조금 더 힘내자!”
“네!”
기사대는 더욱 속력을 높여 번개와 같은 빠르기로, 어느덧 켈리도니온 앞의 평지를 지나 앙상하게 말라붙은 나무로 가득한 숲 그림자에 들어섰다.
* * *
“끼럇―! 더 속도를 내라, 놈들을 밀어붙여야 해! 쉴 틈을 주지 마랏!”
“속도를 높여라!”
아쇼트는 흥분이 잔뜩 떠오른 표정으로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입에선 잠시의 쉴 틈도 없이 호령이 쏟아져나왔다. 뒤따르던 제눌트 남작이 식겁한 나머지 재빨리 다가왔다.
“주군! 이렇게 빨리 이동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어차피 눈이 사방천지에 쌓여 우리 병력으론 적 기병을 쫓을 수가…….”
“닥쳐! 지금 저놈들을 몰살하지 않으면 우리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지금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라고!”
이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쇼트 왕자는 시종일관 당당한 허세를 부리며 엘레나를 우습게 보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나름대로 초조한 마음이었겠지. 곁에서 내내 지켜봤던 제눌트는 그 미묘하게 불안한 정서를 미약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저 세도가, 그것도 잠재적 반역자의 후원으로 왕위 후보자로 떠오른 자신 아닌가.
‘어떻게든 내가 공을 세워서 스스로 서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아쇼트는 땀으로 이미 흠뻑 젖은 손바닥에서 고삐가 미끄러지는 걸 연신 고쳐잡았다. 누가 보아도 가르니라는 소도시로 통하는 좁은 도로는 눈이 쌓여 얼고 있었다. 거기다 좌우로는 험한 산지와 복잡한 삼림이 길을 막고 있었다.
“놈들이 매복을 쓰거나 포위만 해도 우린 섬멸당합니다, 왕자님!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괜찮을 겁니다.”
“그만해, 제눌트.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 걸 몰라?”
아쇼트의 이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속으로부터 우러나온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펜자르크가 달콤하게 속삭였던 손쉬운 왕위 찬탈의 이야기가 이렇게나 원망스러울 데가 없었다.
‘아니…… 사실 원망스러운 건 어리석게 그 달콤한 이야기에 홀랑 넘어간 내 바보 같은 판단력이려나.’
뒤늦은 자책이 있었지만, 아쇼트는 멈추지 않고 기사대를 거느린 채 폭주하고 있었다. 전장을 숱하게 누볐던 제눌트마저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며 체념하는 상황. 그 순간, 사방의 숲과 언덕으로부터 요란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자세히 들어보니 작은 나팔 소리 정도로 들렸다.
“나팔? 이 산속에서?”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을 가진 제눌트는 즉시 위계를 무시하고 병력에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나마 출발 직후부터 아쇼트 부대에 내려온 명령 중에는 가장 합리적이었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갔다간 빠져나오기도 어려울 험한 숲속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어딘가 몹시 불안했다.
―뿌!
―뿌우!
북쪽에서 나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 적을 찾으려 들면 다시.
―뿌우우!
동쪽과 서쪽에서 호응이라도 하듯 요란한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기사들과 종자들은 그저 유망한 지휘관인 제눌트 장군과 아쇼트 총사령관을 믿고 따랐을 뿐이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부대는 혼란에 빠졌다.
“어, 어디냐? 적이 나타난 곳이 어디냐!”
“사방에서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고블린 놈들이 아닐까요?”
“우릴 뒤따른 연합군 전력 아니야?”
“인간 군대의 신호용 악기 중에 저런 소리를 내는 건 없어. 그러니까 저건…….”
얼굴에 여러 흉터가 새겨진, 누가 봐도 경험이 전신 가득할 것만 같은 기사가 주름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두워진 표정의 기사는 젖혀놓았던 눈가리개를 내리곤 창을 단단히 붙잡았다.
“……일전에 철위 기사단의 전사한 동기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뭐였지?”
제눌트는 기사와 종자가 원형 방진으로 자리 잡는 것을 보면서 물었다.
“고블린의 픽스 기병대는 매우 교활한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마치 인간 사냥꾼들이 몰이 사냥하듯 사냥감을 몰아댄다는군요.”
“사냥감을 몬다라, 아주 적절한 표현이군.”
사방, 아니 정확히는 북쪽과 동쪽, 서쪽의 세 방향으로부터 번갈아 울리는 나팔. 그리고 이제 조금씩 들려오는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 위치를 종잡을 순 없지만, 제눌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너무나 허접한 함정에 걸려들었어.”
제눌트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재빨리 검을 뽑았다. 다른 기사들도 제각기 창을 세워 들곤 제눌트와 왕자를 둘러쌌다.
“왕자님, 정신 차리십시오! 적이 짓쳐들어옵니다. 검을 뽑고 버텨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십시오!”
그리곤 자신의 반지에 달린 수정을 매만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마정석. 딱 한 번 쓸 수 있는 초대형 불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사방 100여 미터를 완전히 불기둥으로 덮어 한 줌 재조차 남지 않도록 불살라 버리는 고위 마법. 이번 전장에 나서면서 마법 상인에게 통사정한 끝에 구입한 아티팩트였다. 은화가 무려 열 닢이나 들어간 고가의 장비였지.
‘이걸 발동하는 순간, 모두가 죽어 나가겠지. 적어도 놈들에게 최대한 타격이 가도록 마지막 순간에…….’
부디 이걸 써야 하는 순간만은 오지 않길. 그런 속절 없는 희망이라도 부려보는 제눌트였다. 그러나.
“놈들이다!”
“달려듭니다!”
―끼에엑!
―죽여, 죽여!
―두두두두!
몹시 경박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편자의 소리. 수백 명의 픽스 기병과 고블린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비교적 키는 작고 덩치는 커서 사람과 군마는 지나가기 어려운 나뭇가지 아래도 헤치고 지날 수 있었다.
“모두 흔들리지 마라!”
애써 외쳐 보지만 병사들은 사방에서 매섭게 달려드는 한결 작은 녀석들에게 선수를 잡힌 모양이었다. 놈들은 차곡차곡 쌓이며 병사들 앞으로 다가왔다.
―퍽!
―히힝!
―끼엑!
“끄악!”
“죽, 죽어!”
노도 같은 파도로 몰려온 픽스 기병들은 막강한 물량으로 그대로 부딪쳤다. 최대한 물량을 버틸 수 있는 원형 방진을 쳤다지만 순간적으로 첫 번째, 두 번째 대열까지 헝클어졌다. 일부는 제대로 타격을 맞은 말과 함께 기사까지 쓰러지고 그대로 발굽에 맞아 터져 나갔다. 혹은 잔인한 픽스에 의해 그대로 목이 뜯겨 나갔다.
“으악!”
“죽고 싶지 않아…….”
곁에 섰던 젊은 종자 하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화살을 쏘았다. 이내 고블린 하나가 넘어갔다. 그러나 적은 팔백 명, 이쪽은 백 명 남짓이었다. 고블린 하나를 죽이면 주인 잃은 픽스는 기사와 종자를 더 물어뜯으며 광분했다.
“이 쓰레기 같은 괴수, 죽어어엇!”
“모두 이놈을 죽여서 구멍을 막아라!”
“이야압!”
몇 명의 기사와 종자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화살을 열댓 발에 창을 세 대나 맞았음에도 더 날뛰던 괴수는 그 곱절의 화살과 창을 받아내고서야 쓰러졌다.
―쿵.
“됐다, 죽였어!”
잠깐의 기쁨이었다. 이내 그 픽스가 1열과 2열을 뭉개고 만든 그 구멍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와아아!”
“인간 사냥이다!”
잔뜩 쇠 긁는 낯선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픽스를 잡느라 신경을 못 쓰는 사이, 대열에 난 구멍으로 고블린 기병들이 몰려들고 만 것이다. 측면이 노출된 최전선 기사들은 계속 옆구리의 공격을 받으며 낙마하거나 절명했다.
“끄으으…….”
“어머니!”
소리라도 낼 수 있는 전사자는 차라리 행복하다 할 지경이었다. 곳곳에서 머리를 잃고 천천히 쓰러지거나 반쪽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전사들이 속출했다.
“아아…….”
“어서 구멍을 메워! 왕자! 이 정도면 되지 않았소. 어서 명령을 내리시오, 퇴각하라고!”
아쇼트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 낸 제눌트는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신음만 흘리는 왕자를 구박했다. 전장에 처음으로 나서는 사람은 무력하게 쓰러지는 전사들을 보고 정신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지휘관이 그래서야 어디 말이 되는가? 어금니를 부술 듯이 꽉 깨문 제눌트가 달려드는 고블린의 면상을 칼손잡이만으로 구겨 버렸다. 그리곤 왼 주먹을 날려 왕자의 얼굴에 메다꽂았다.
“큭…… 무, 무슨 짓을…….”
“정신 차려! 전장에서 대장이 정신을 잃으면 병사들까지 몰살이야! 어서 퇴각 명령 내려!”
몇 놈인가 달라붙은 고블린을 베어내거나 주먹으로 때려눕히는 기사들이 이미 나오고 있었다. 제눌트도 벌써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아쇼트 본인의 갑옷에도 이리저리 피가 튀어 지독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코를 찌르는 냄새에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후퇴…… 후퇴해. 후퇴하라고, 어서!”
“제길, 빨리도 내리는군. 모두 진영 안에 들어온 놈들만 밀어내고 후퇴한다! 모두 저놈들을 둘러싸고 밀어내!”
“와아아!”
“밀어, 밀어!”
마치 양측이 줄을 붙잡고 힘겨루기라도 하는지, 어느 순간부턴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질량과 중량만으로 밀고 밀리는 힘 대결이 있을 뿐. 원형 방진이라는 구조상 너무 좁은 구역으로 엄청난 고블린이 몰려든 덕에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크읏…… 지금이다, 돌파! 돌아보지 말고 자기 목숨을 건져라!”
“으아아, 가자, 어서 가!”
“우욱…….”
안타깝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적과 맞대고 있는 기사와 종자 상당수는 그대로 잃을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 모두를 잃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죄악이니까.
“당신도 어서 고삐를 잡고 몰아! 언제까지 내가 잡아 줘야 하는 거냐!”
“그, 그래.”
완벽한 패배자의 입장에서 고블린 맛을 제대로 본 아쇼트는 종잇장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삐를 간신히 몰았다.
“이대로 돌파한다, 남쪽으로! 목숨을 아껴라!”
제눌트의 호령에 따라 수십 명 남짓한 패잔병은 동료의 목숨을 방패로 삼는 치욕을 삼키고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분명 남쪽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 공격하지도 않은 걸 보면 분명 이쪽은 안전하다는 뜻일 거야.’
제눌트가 의지하는 것은 이제 그 판단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기사들이 배우는 병법에선 달리 가르치고 있다.
[적을 손쉽게 완전히 궤멸시키려거든 포위한 뒤 한쪽을 느슨하게 풀어놓아라. 마지막 희망을 찾아 도주하던 적의 앞을 가로막아라. 그러면 그 먹이는 곱게 다진 가공육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릴 것이다.]
선두에 서서 수풀과 나뭇가지에 긁히는 것도 마다하고 길을 뚫고 나가던 이 숙련된 장군이 그걸 깨달은 것은 불과 얼마 뒤의 찰나.
‘아뿔싸.’
고블린이 설마 그런 고급 심리전을 쓸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불안감에 터질 듯한 심장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뿌우.
“인간들이 나타났다!”
“먹잇감이 제 발로 들어오다니, 족장님과 브레락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군.”
“쿠헤헤. 내가 뭐라고 했냐. 이 브레락만 믿으면 전과는 충분하다고 했지.”
몹시도 거대해서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체격의 녹색. 말로만 듣던 오그르 종족과의 첫 만남이었다. 하필이면 모든 의지와 기세가 꺾여 버린 이 순간.
“하지만 아쉽군. 좀 더 멀쩡한 상태였으면 갖고 노는 재미라고 있는 건데.”
“빌어먹을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그나마 멀쩡한 기사 하나가 격노한 나머지 창을 꽉 잡아들고 달려들었다. 잔뜩 약이 오른 기사가 재밌는지 비열하게 낄낄 웃던 브레락이란 대장 오그르는 가볍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우당탕.
창대가 부러지고 그 힘에 의해 기사와 말이 순식간에 옆으로 쓰러졌다. 나무에 부딪혀 목이 꺾여 버린 기사의 투구는 충격파로 잔뜩 우그러든 채였다. 볼 것도 없이 즉사였다.
“나설 곳을 알고 나서야지. 오…… 그래도 볼 만한 전과를 구할 수 있겠는걸? 예쁘장하니 고생 한번 안 하게 생긴 걸 보면 귀족이나 왕족이겠지?”
“전하!”
브레락이 노리는 것은 바로 아쇼트였다. 제눌트가 피하라고 외쳤지만 수풀을 뚫고 도착하자마자 본 브레락의 위압적인 모습에 왕자는 기껏 들고 있던 검마저 떨어뜨렸다.
―챙강!
“겁을 먹긴. 재미나 좀 보자는 건데.”
“제길……!”
제눌트는 눈을 감고 검을 소용돌이처럼 짓쳐 들어 휘몰아쳤다. 왕자의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오그르의 품을 파고들어 목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마나를 주입한 검은 반응을 일으키며 속도를 높여 갔다.
―탁.
―쨍!
검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격렬한 격통이 가해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제눌트는 그대로 시야를 상실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억…… 이런 미친.”
반응을 미처 다 보일 틈도 없었다. 곧이어 제눌트는 브레락의 두툼한 손에 목을 잔뜩 졸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목숨이 아깝지 않게 덤빈 걸 보면 네놈이 저 녀석보단 재밌겠군. 어디 좀 저항이라도 해 보라고, 흐흐.”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체구만큼이나 강력한 악력. 거기에 유창한 언어 구사력과 교활한 지능까지. 무력하게 몸을 흔들어보지만 몽롱하게 정신을 잃어가는 제눌트는 이제 희망을 바랄 수가 없었다.
“이, 이렇게 된 이상…….”
“이렇게 된 이상, 뭐? 목숨이라도 살려 달라고 얘기할 건가?”
“와하하!”
기사들은 무력하게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이미 고블린 기병이 포위해 버린 지 오래였다. 속속들이 낙마하거나 전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이성을 끌어모은 남작은 간신히 왼손가락에 낀 반지의 수정을 만지작거렸다. 뜨겁게 달궈진 마나의 기운이 손가락 끝에 아른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하기야, 내가 조금만 더 과감하게 나섰으면 몰랐으려나. 적어도 오그르 하나라도 더 끌고 간다면 다행이겠거니.’
[마나 봉인 해……]
마나의 봉인 해제. 그 안에 담긴 폭발적인 4서클 급 불의 마나를 외부로 풀어 버리는,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자폭이었다. 하지만 미처 그 주문을 외우지 못했다.
―서걱.
―털썩!
“윽…… 푸확! 헉, 헉…….”
의식이 거의 사라지기 직전까지 몰렸던 감각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이어졌다. 이명이 청력을 모두 앗아가 버리고, 어두컴컴한 시야 너머로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팔이 잘려나간 채 경악한 표정인 브레락.
심지어 그 불신 가득한 경악의 표정을 담은 오그르 대장은 심장 부분의 큰 구멍을 내려다 본채로 굳어 있었다. 군데군데 불이 타오르는 오그르의 사체.
―쿠르릉.
절명해 버린 사체는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 앞으로 무너졌다. 먼지구름 속에서 정신을 차린 남작은 핏덩이를 뱉어내며 얼굴을 흘러내리는 피를 훔쳤다.
“쿨럭……. 대체 이게 무슨.”
“여, 제눌트 경. 무사한 걸 보니 다행이군.”
“……당신은?”
검은색 바탕에 금빛 실로 수를 놓은 망토. 온통 엉망진창인 주변 환경에서도 홀로 빛을 발하는 인물이 있었다. 어째서 그게 가능한 것인지는 제눌트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사체에서 뛰어 내려 자신을 향해 걸어오곤 손을 건넸다.
“지금부턴 내가 이 전장을 맡겠어. 쓰러진 동료에 대해선 내게 맡겨두고 경은 좀 쉬어요.”
“가, 감사합…….”
갑작스럽게 풀리는 긴장. 아른해지는 의식 속에서 제눌트는 마지막으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품고 잠들 수 있었다.
“휴.”
네마냐는 쓰러진 제눌트와 충격을 받은 아쇼트를 즉시 후송하라고 지시했다.
“주군. 돌아가시겠습니까? 놈들은 대장이 죽어 전의가 무너진 모양입니다만.”
“헤누크, 아직 꾀를 부리는 상태라면 녀석들을 잡아선 안 되지. 하지만 무너진 뒤라면 얼마든 추격할 수 있고.”
“그 말씀은…….”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땅에 박힌 제눌트 경의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부터 우린 유격전을 시작한다. 놈들 기병대를 최대한 도륙해서 본때를 보여 주는 거다.”
햇볕마저 가리는 울창한 나뭇가지, 황량한 숲. 이곳이야말로 음침한 고블린과 오그르를 묻어 버리기엔 최고의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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