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퓌르 우라논!]
―화르르!
마을 하나를 통째로 태워 버릴 만한 덩치의 화염이 뿜어져 나갔다. 아직 주변을 둘러싼 채 위협 중이던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쓸려 나갔다. 아직 마을이 반 정도는 남아 있었으니 엄한 주민들까지 불길에 휩싸일 우려는 없지 않았다.
[괜찮나? 내가 최대한 조심하긴 하겠지만 이대로라면 마을 주민들도 휩쓸릴 수 있다.]
“괜찮아. 뒷수습은 내게 맡겨. 어차피 저대로라면 모두 몰살이야.”
[알았다. 안타까운 일이군.]
키메라는 잠시 뜸을 들이며 정확하게 뒤엉켜 있는 고블린과 마을 주민 사이를 노렸다. 천만다행인 건 키메라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한 고블린들이 이쪽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라드, 응사 부탁해!”
“말하지 않아도 할 거야, 꽉 붙들기나 해.”
마법사는 주문 영창조차 하지 않은 채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애초에 이 세계의 마법에서 주문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마나의 흐름과 세기, 조절에 집중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었을 뿐이다.
“꽉 잡아!”
한줄기 노성 어린 목소리. 네마냐가 키메라의 수북이 자란 등덜미 갈기 사이로 움츠리자 머리 위로 강렬한 기운이 스쳐 갔다.
―쌔액!
―콰콰쾅!
거대한 먼지구름이 지상을 휩쓸었다. 그와 함께 상공의 키메라를 노리고 달려들던 화살비도 크게 약해졌다. 착륙할 좋은 기회였다. 엉금엉금 키메라의 귓전까지 다가간 네마냐가 소리 지르듯이 속삭였다.
“적의 저항이 약해졌어. 지금 착지하면 돼!”
잘 알아들은 키메라는 한마디 대답 없이도 그대로 내리꽂히듯 지상을 향해 돌진했다. 상공 수십 미터에서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떨어지는 경험은 현대인조차 폭격기 조종사가 아니라면 경험하기 어렵다.
“크윽.”
“우와악!”
아찔한 광경과 공간 감각이 뒤집히는 반고리관의 충격. 그나마 네마냐는 잘 버텨 냈지만 하라드는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버텨, 하라드! 안 그러면 예전처럼 키메라가 발로 잡고 갈 거야.”
“으으, 그런 소리 하지 맛!”
키메라의 먹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태로운 발가락에 잡힌 채 허공을 답보하던 추억. 하라드는 진저리를 치며 바싹 키메라의 갈기를 붙들었다.
“그래, 그런 정신으로 버티면 되는 거지.”
그리고 네마냐는 눈을 감았다. 천둥 번개가 작렬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와 진동이 몸으로 거칠게 전해졌다. 땅에 키메라의 발이 닿은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탁.
아르헤로부터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다른 마을에 네마냐가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탐지]
그간 꾸준한 능력치 성장 덕분에 탐지 자체도 많이 발전했다. 네마냐는 특유의 마나 친화력을 회귀하면서 가졌다. 본래 사물의 정체와 특성을 확인하는 정도인 탐지였다.
―사아아.
하라드가 일으킨 강렬한 마법 충격에 아직도 마을은 먼지구름에 덮여 있었다. 사방 천지가 한 치 앞도 보기 어렵지만 탐지술만큼은 예외.
“여기!”
기합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생명체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검이 꽂혀 들어갔다. 살갗을 파고드는 불쾌한 촉감이 검신을 타고 손의 신경으로 전해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 감각을 타고, 네마냐는 검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꾸에에!”
공포에 어린 고블린의 비명. 이내 마력을 주입한 검이 고블린의 몸을 가르며 빠져나왔다. 마나를 급속하게 잃는 상대의 몸은 그대로 쓰러졌다.
“두 마리!”
지칠 틈이 없었다. 뽑아낸 검은 곧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왕좌왕하던 두 번째 목표로 날아갔다.
―퍽!
―화르르르!
주변을 엄호하는 하라드와 키메라도 닥치는 대로 고블린을 덮쳤다. 작렬하는 화염 마법에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거를 만한 타선이 없었다.
“조심!”
네마냐는 틈틈이 이곳저곳 쏘다니는 키메라로 달려드는 고블린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정말 탐지가 그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한 줄은 몰랐어. 마나가 탐지가 되니 가능한 얘기지만.”
“마나 친화력 덕분이지.”
물론 거기다 고블린만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칭호 몫도 단단히 했을 것이다.
<고블린 적대자>
설명에 따르면 고블린을 상대로 만났을 때 전투 능력과 스킬이 한 단계씩 증강된다. 거기다 고블린 체내의 마나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효과를 탐지에 추가해 준다. 더 맘에 드는 건 이게 모두 패시브 스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게임으로 할 때도 발컨을 하냔 소리나 들었으니 패시브가 내겐 더 맞겠지.’
여섯 마린가 일곱 마리째의 고블린을 베어 넘긴 뒤 칼을 좌우로 흔들어 피를 털어냈다. 그리곤 하라드에게 마저 대답을 보냈다.
“고블린과 싸우다 보니까 놈들 체내에 흐르는 마나의 파동이 마나에 각인됐나 봐. 뭐, 덕분에 잘됐지.”
“파동이라…….”
녀석은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한마디를 흘렸다. 아, 또 재능 하나로 인생의 궤적마저 달라진다는 마법사에겐 당황스럽게 느껴진 걸까.
“아, 뭐 좀 건방진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하도 맞부딪치다 보니 익숙해졌다, 그런 정도로 볼 수 있겠지.”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그만큼 다른 사람과의 시선에 차이가 드러날 수 있다. 그 정도의 차이를 적당한 단어와 표현 속에 감추는 건 지난 수십 년간 배워 왔다. 다만 이따금 발생하는 미묘한 순간은 그때마다 적당한 말 돌리기와 사과 등으로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음, 아냐.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니었고. 좀 신기해서 말이지.”
“신기?”
말을 이어 가면서도 두 사람은 각자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연이어 소환했다. 이 마을에 들이닥쳤던 백여 명의 고블린 중 절반은 쓰러졌고 나머지는 슬슬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냐. 좀 정리되면 이야기해 줄게. 참, 숙제로 줬던 마법철학서는 읽고 있지?”
“아…… 아차.”
“안 읽었군. 하긴 그 뒤로도 일이 이렇게 터져 나왔으니 읽었길 바라는 게 욕심이겠지만.”
“정식 출전해서 상황이 안정되면 조금씩 읽어 두도록 할게.”
“부디 영주님의 말씀이 지켜지기를.”
^^라는 이모티콘 같은 눈이었지만, 무표정한 입가와 합쳐지니 꽤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 표정을 보여 준 하라드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쨌든 이걸로 이 마을도 지켜냈네, 어떻게든.”
“……피해가 역시 큰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을 바깥 들판 너머로 완전히 무너진 고블린 부대의 깃발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총독부령에서 시작된 간단한 추격전은 끝난 셈이다. 강 건너편으론 다르빌 근처에 세워진 요새들이 즐비했다.
“이 마을은 아마 다르빌 소속이었던 것 같아. 강 건너편이라 달리 방어에 신경을 쓰지 못한 모양이지.”
“그랬겠지. 제국군은 이제야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오고 있을 테고.”
긴장이 풀린 네마냐는 반쯤 타서 쓰러진 집 근처에 걸터앉았다. 고블린으로부터 학살당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슬슬 정신을 차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사람들을 좀 살렸으니 그건 다행이지. 죽은 사람이야 살려낼 순 없어도.”
마을 한편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는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성공적으로 고블린의 유격대를 물리쳤다지만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는 효과음이다.
“휴.”
네마냐는 검을 잘 닦은 뒤 검집에 조용히 집어넣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해야 할 일, 서야 할 곳은 전장이었다.
“가자.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했어.”
“고블린들이 사방으로 점점 더 흩어지고 있어. 제때 병력을 보내면 쉽게 퇴치할 수 있겠지.”
“아직은 계획대로야, 다행이지.”
수백 단위로 마을을 침공하는 고블린들은 키메라 소식에 부대를 최대한 잘게 쪼갤 것이다. 더 많은 마을이 동시 공격을 받겠지만 잠깐이라도 저항할 순 있을 것이다. 고블린 몇 마리 정도면 농민들이 쇠스랑으로도 맞설 수 있을 테니까.
“어때, 키메라? 수고 많았어.”
네마냐의 작전을 마저 검토하기 위해 하늘 곳곳을 날아다니더니 활강하며 이내 내려왔다. 사뿐하게 다가온 키메라의 갈기를 어루만지며 네마냐가 물었다.
[네 생각대로다. 수백은 넘는 고블린이 주변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전한 덕분에 주변 마을에서도 재빨리 자경대가 소집되긴 했으니 몇 시간은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강 건너 다르빌 지역에서도 열심히 작전이 벌어지는지 어느 편의 것인지 모를 깃발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돌아가면 그땐 이런 식의 장난은 통하지 않을 거다. 제대로 진검승부를 겨루는 날이겠지.’
누군가일지 모를 목표를 향해, 그리고 자신에게 다짐하며 네마냐는 엎드린 키메라에 올랐다. 하라드도 재빨리 놓고 가지 말라며 올라탔다.
[꽉 잡아, 친구들. 전쟁은 아직 한참이니까.]
그렇게 왕국의 위대한 성수는 공중으로 솟구쳤다. 주민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이미 저 멀리 사라져가는 그림자뿐이었다.
* * *
“제국군이 하산했답니다. 훈련이 꽤 길 것이라 봤는데 예상외군요.”
“또 개입했겠지. 기껏 군부의 태도가 흥미로운 변수가 되리라 생각했더니, 제길.”
말카시안은 들여다보던 마법서를 덮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파우스트 학무처장이 책상에 손을 짚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뭔가 조치해야 합니다. 기껏 암피에르 조약에 따라 방위 동맹이 소환됐다지만 우리 지분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흔들릴 것 없어. 순간적인 일일 뿐이니까. 우리 마법사 군단이 나서면 금세 원래 균형을 되찾을 거야.”
“기억하십시오. 「계약」에 따르는 의무는 무척이나 무겁다는 것을.”
문장을 읽을 때는 일정한 흐름과 운율이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래야 말하는 사람은 힘이 덜 들고 듣는 사람은 쉽게 집중하고 이해할 수 있다. 영창용 주문 문장을 만드는 원리와 똑같았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주문을 만드는 방법을 배울 때 먼저 화술과 문장에 관한 수업을 배웠다.
‘하지만 저 계약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느라 문장 전체의 균형이 깨진단 말이지.’
그 불균형이 의미하는 것을 말카시안이라고 모를 리는 없었다.
“알아. 섣불리 그걸 무시할 생각 따윈 없어. 자랑스러운 아라가트의 학장을 임시직으로 맡았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네.”
“다행이로군요.”
말을 마친 파우스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탁.
“하아……. 지랄 맞은 영감탱이들. 기어이 유서 깊은 아카데미아를 나락으로 몰아넣을 작정이라도 했나 보군.”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말카시안. 단숨에 정갈하게 다듬어 놓았던 머리칼은 헝클어졌다. 마치 자신의 감정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모양이다.
“내가 악역을 맡는 정도야 이미 아무렇지도 않지. 하지만 이대로라면 우리는 완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될 테고 적과 손이나 잡았다는 혐의만 사겠지.”
참지 못한 말카시안은 벌떡 일어났다. 쉽게 안정되지 않는 마나가 급기야 체외로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마법서와 갖가지 행정 문서가 이리저리 쏟아졌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늙은이들이 하자는 대로 마탑의 패권을 좇는 건 바보짓이지. 그걸 모를 사람들도 아닐 텐데.”
마탑 내부에서 지난 10년 동안 점점 수면 위로 오르고 있는 수상한 집단을 모를 리 없다. 말카시안 자신이 막 교수를 맡았을 즈음부터 검은 로브에 수상한 문양을 새긴 마법사들이 출현했다.
“분명히 십 년 전부터였지. 내가 그즈음에 교수 임용을 지원하려고 처음 여기 왔었으니까.”
오랜만에 돌아온 모교는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와 고향 집에 비하면 여전히 반가웠다. 하지만 아카데미아 중에서도 유서 깊었던 아라가트의 학교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나머지 영지와 학교를 이간질하려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인 걸까.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제안을 수락하긴 했지만…….”
바가반드와 아라가트 마탑의 전쟁이 임박하자 부랴부랴 개입한 제국의 특사 니콜라스는 말카시안 자신에게 호소해 왔다. 사실상 마탑을 맡길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판단이 내려졌냐는 자신의 추궁에도 니콜라스는 말꼬리만 돌릴 뿐이었다.
“제국도 확실히 모르거나, 뭔가 중대한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단 뜻이겠지. 대체 그게 뭘까.”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한은 움직일 수 없다. 제국의 의뢰로 강경파를 누르고 학장 자리를 꿰찼음에도 강경파의 주장을 들어주는 이유였다.
“휴, 바가반드 백작과도 이렇게 척을 질 것까진 없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수습할지도 걱정이로군. 그래도 일단은…….”
말카시안은 피곤한 어깨를 두드리며 이내 비밀스레 덮어 놓은 어느 영상구로 다가갔다. 그 위에 덮인 고급 주단을 스르륵 흘러내리곤 장치에 손에 딱 맞게 조각된 마정석을 꼭 잡았다.
―지잉.
영상구에 마나가 흘러 들어가면서 반투명했던 주황색의 수정에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사 각하. 아라가트 아카데미아의 학장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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