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역시, 기사단이야!
―신성 기사단 만세!
“…….”
“손은 흔들어 줘. 그래도 맞으러 나와 줬으니.”
“……그래.”
기사들은 어색하게 맞으러 나온 주민들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정오. 다르빌을 떠난 지 몇 시간 만의 귀환이었다.
“고블린을 섬멸한 건 사실이니까. 너무 침울해할 것만은 아니지.”
고삐를 고쳐 잡는 슴바트의 말이 맞았다. 대규모 고블린 병력 9할을 섬멸했다. 이것 하나로도 대단한 전과임은 분명했다. 그저께만 해도 학살의 공포에 질렸던 다르빌로선 더할 나위 없는 기쁜 소식이었다.
* * *
두어 시간 만에 흥분은 가라앉고, 도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 되자 다시 눈과 서리의 중간쯤 되는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블린 사태도 고작 시작일 뿐이라는 것만 모른다면 참 좋지. 아, 형한테 일단 눈 온건 얘기하지 말까. 좋아하지도 않을 테고.”
하얀 입김을 뿜어내는 소년 마법사는 뽀득거리는 눈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향한 나무 밑.
“역시 와 있었군. 미하일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다니까.”
손을 들자 하얀 비둘기가 내려와 앉았다. 다리엔 역시나 둘둘 말린 작은 두루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어디…….”
말린 종이를 길게 펼쳐 내고 하라드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어떤 내용인지 소리 내어 읽지는 않았다. 내용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잠깐 옅은 미소를 띠던 마법사의 표정은 점차 가라앉았다.
“하…… 목을 죄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착잡한 표정으로 품속 주머니에 대충 접은 문서를 집어넣었다. 왜 꼭 항상 좋지 않은 일은 앞을 다투며 연달아 터지는지.
“후…….”
동북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 너머의 높은 산은 꼭대기가 만년설로 덮여 있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마냥 부르르 떨던 하라드는 고개를 돌리며 시내 중심가의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서리가 내린 도시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곧 저녁인데 어딜 갔다 온 거야?”
“어, 깼어? 오늘은 저녁때까진 자랬더니.”
“잘 수가 있겠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진다.”
허리를 펴며 신음 소리를 낸 네마냐는 찻잔을 들며 그간 쌓인 불만을 털어 냈다. 갑옷은 왜 이렇게 무거운가부터 기사들은 왜 이렇게 앞뒤가 꽉꽉 막혔는가까지. 반나절 만에 익숙해진 레퍼토리다.
“자기도 기사면서 그런 소릴 해?”
“그러니까 자기혐오 같은 거지. 자괴감인가?”
한숨과 함께 하라드도 맞은편에 앉았다. 네마냐 앞에는 벌써 몇 장의 파피루스가 쌓여 있었다. 의자에 기댄 채 서류를 집어 들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어지러운 숫자들과 글들이 뒤얽혀 있었다. 급격하게 눈이 피로해진 것을 느끼며 종이의 맨 위 칸을 보니.
“다르빌 재건안이라. 어제 회의에서 영주님이 꺼냈던 그 이야기?”
“그래. 구체적으로 자금 조달 방법이나 재건안 세부 내용을 꾸며 봤지. 잘됐네, 마침. 너도 좀 검토해 봐라.”
“안 봐도 잘했겠지. 나는 마법학 전공 때도 수식이나 기하학적 이론보단 실전파였다고.”
생긴 건 이론 마법학자처럼 생긴 녀석이 엉뚱하단 생각이 들었다. 말은 그래도 어느샌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하라드는 내용을 읽어 갔다.
“초기 자금은 외부에서 차관을 도입하는 형식으로 조달한다. 성국과 바가반드는 공동 출자 가능한 금액을 미리 정한다, 라. 자금 출처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나 봐?”
계획 입안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누가 봐도 적대적인 마탑이나 미크라야크에 손을 벌릴 수야 없지 않나.
“돈에서 권력이 나오는 법이지. 투자자를 잘못 정했다간 나중에 휘둘리잖아? 문제는 여전히 돈이 모자란다는 거지만”
기지개를 한껏 켜며 무의미하게 중력에 맞서는 네마냐다. 머릿속으로 다시 복잡한 숫자들이 흘러갔다. 그래도 아직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얼마나 자금이 필요하길래 두 영지가 힘을 합쳐도 안 되는 거야?”
“거기 하단부를 더 봐봐. 피난민 정착과 아주 기초적인 시설 정비, 식량 수급만으로도 금화 만 개 정도는 들어갈 거야.”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숫자다. 만 개? 무심코 이야기하는 네마냐 자신도 의아할 정도다. 수치 규모에 머리가 지끈한지 하라드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 정도면 이미 영지에서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닌데. 제국이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살짝 운을 떼 봤는데, 신관회 쪽으로 제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거래. 그럼 우리도 최대한 노력해 봐야지.”
노오력. 누가 한국인 출신 아니랄까 봐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는 네마냐의 습성이 또 묻어났다. 하라드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미하일 형이 노력, 그 얘길 들으면 정말 질색팔색할 걸.”
“그러라고 앉혀 놓았으니까.”
“못 말려.”
새로운 지출 항목에 최소 금화 수천 개가 소모될 사업이 들어가면 기겁하겠지. 놀라는 꼴은 좀 보고 싶다는 음흉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교차했다.
“최소한 자금의 절반인 금화 5천 개는 성국과 우리가 출자해야 할 거야. 다르빌을 확고하게 성국에 묶어 놓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다르빌로부터 대금을 받아 충당은 하겠지만.”
조그만 다르빌의 세금과 산업으로 막대한 차관을 갚으려면 족히 수년은 잡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당분간 버리는 돈으로 인식하고 어디선가 끌어올 수밖에.
“별수 없이 세금을 더 걷어야 하겠지?”
“아니. 세금을 걷진 않을 거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하는데 세금은 걷지 않는다니. 하라드는 이제 재정 영역에도 마법을 쓰는지 의심이 들었다.
“놀리는 거 아니지? 세금도 안 걷고 그런 돈을 거둘 수 있다고?”
“마,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소릴. 충분히 검토했어. 우리가 여윳돈도, 세금도 부족하다면 마지막 남아 있는 자산을 쓰면 되지.”
“마지막 자산?”
“시간 말이야, 시간.”
아직 생기지도 않은 돈으로 광산을 샀다. 파지도 않은 광산을 담보로 정치적 거래까지 성공시켰다. 바로 그 네마냐가 자신 있게 하는 소리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확신은 더 굳어졌는지 다리마저 꼰 네마냐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야말로 우리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 나가는 거지.”
* * *
저녁 식사를 겸한 회의는 조용히 시작했다. 시장과 현지 상인, 귀빈들은 도시가 살아남은 것을 자축했다. 물론 크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이 좋은 날에 기사 단장이…….”
“크흠, 그 얘긴 하지 말게.”
신성 기사단이 예상외의 손실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단장의 전사라는. 그나마 단장 대리인 엘레나가 겉으로나마 담담해 보여 다행일 노릇이다.
“네마냐 영주님께 이번에 다시 빚을 졌습니다. 이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만날 때마다 구르간 시장은 왜 낯부끄럽게 칭찬을 하는지 모르겠다. 비행기도 한두 번 태워야지, 빚이라도 탕감해 달란 건가. 능력은 있는 사람이라는데 거기에 민망하게 만드는 능력도 더해야 할 성싶다.
“당분간은 힘들 겁니다. 성국이나 저희 영지는 물론이고 제국도 도울 것이니 너무 염려 마시길.”
구르간은 눈을 드러내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기대가 된다는 이야기를 드러냈다.
“오늘도 뭔가 시끌시끌하고 성대한 계획을 들고 오셨다더군요. 좌중을 뒤집는 기발한 계책을 기대해 봐도 됩니까?”
“하하, 너무 기대하시면 실망하실 겁니다.”
그쯤 다행히도 엘레나가 불러서 피곤한 인사치레는 그만둘 수 있었다.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옆자리엔 먼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엘레나가 있었다. 아침보단 괜찮아 보이는 얼굴이다.
“좀 쉬었어?”
“눈 좀 붙이고 왔지. 넌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계획안 때문에?”
“일이 일을 부르는 법이거든. 적응해야지.”
웃음을 짓는 엘레나지만 아직 얼떨떨한 기운이 남아 있다.
‘쯧, 어쩔 수 없지. 스스로 설 수 있길.’
책상 위에 파피루스 뭉치를 올려놓고 보니 회의 참석 의사를 밝힌 인원 전원이 앉아 있었다. 명목상으로 지위가 가장 높은 네마냐가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냈다. 구르간 시장은 헛기침과 함께 일어나 발언을 시작했다.
“흠! 다르빌 방위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협조해 주신 모든 분과 시민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시에 희생자분들께는 깊은 유감의 말씀을…….”
구르간은 반쯤 고개를 숙이곤 잠시 침묵했다. 좌중에선 두어 차례 헛기침이 나올 뿐 고요했다.
“자, 지나간 일은 이렇게 됐습니다. 하실 말씀들이 많다는 건 압니다. 그렇습니다만, 지금 이 자리에 선 우리는 다음을 내다봐야 합니다.”
“그렇소. 필요하다면 주민과 도시 기능을 아직 안전한 내륙으로 옮겨야 하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개근한 므카바 상단 길드장의 말이었다. 변함없이 일관된 반응이었다. 이 도시에서 상업조차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므카바라. 아무래도 도시를 버리는 쪽이 낫다고 보는 모양이군.”
“최근에 제국 국경에 접한 하(下) 타위트 지방에서 새 광산 몇 군데를 확보했거든. 다르빌은 이제 부담만 된다는 거겠지.”
손절, 그렇군. 시세와 정세의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접해야 하는 상인의 시선에선 그게 효율적이겠지.
‘다르빌이 이익이 된다고 해도 문제겠지만.’
만약 다르빌에서 특수한 이익이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미 성국과 가까운 관계로 밝혀진 바가반드가 이곳에 개입했다. 결국엔 바가반드와 힘을 합친 에카톤이 그 이익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다. 다르빌을 파괴하는 게 낫다 생각하겠지.
‘그야말로 닭의 갈빗살이란 거지.’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어떻게 대응할지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도시를 버린다는 이야기에 표정이 조금 굳은 구르간은 그나마 무난하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음, 그렇군요. 우선 멜키시빌리 길드 마스터께선 도시의 소개와 청야 작전을 제안했습니다. 다른 의견은 있습니까?”
“안타깝긴 하지만, 도시를 방어할 다른 방략이 없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찬성입니다.”
“저 역시…….”
몇 사람인가가 쭈뼛대며 동의의 뜻을 밝혔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들어온 30여 명의 사람 중에선 매우 소수다. 대부분은 못내 침묵을 지키면서도 다른 방법이 있기만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제 이미 바가반드 백작의 의견이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의견도 청하고 싶습니다만.”
불편한 침묵은 엘레나의 눈총이 어딘가로 향하면서 끝났다. 주춤거리며 일어난 페트루스 주교의 질의였다. 시장 구르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아, 그렇죠. 바가반드 경? 한번 준비해 오셨다던 이야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안 그래도 언제 발언 기회를 얻을까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못 잔 잠을 자느라 아직도 비몽사몽 합니다만.”
좌중에서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멜키시빌리 일행은 못내 고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 제안은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그런 만큼 당장 고달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잠시 숨을 들이쉬며 페이지를 넘겼다. 예의를 살린 잡다한 표현은 과감히 제외했다.
“지금 현 상황에서 다르빌은 자체 방위가 불가능합니다. 주민만 만 명이 넘고, 주변을 배회하는 피난민까지 헤아리면 3만이 넘을 겁니다. 자, 이렇게 보자면 응당 도시를 버리고 후퇴하는 게 최선이겠죠.”
시선을 종이에서 떼어, 무표정한 얼굴로 구르간과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알고 있는 문제니까.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네마냐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다르빌은, 절대 포기해선 안 됩니다. 하라드, 그것 좀.”
하라드가 고개를 끄덕이곤 손가락을 튕겼다. 녀석의 손가락 끝에서 마나가 분출되더니 바닥에 미리 새겨 놓고 표시한 대략의 거점과 지명을 표시했다. 마법사에게야 간단하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덴 가장 효과가 좋았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중앙이 다르빌이라 생각을 해 봅시다.”
반 발짝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자리엔 Keli.라는 표식이 되어 있었다.
“아주 평범한 고블린 군단의 속도로 반나절이면, 켈리도니온이 닿습니다. 곧 성국의 수도죠. 다르빌이 없으면 지케른 성국은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잠시 뜸을 들였다. 몸을 뒤로 돌려서 오른쪽으로 한 발짝 옮겼다. Mont Arratut. 누가 감히 그 성스러운 이름을 모를 수가 있을까.
“이라크시스 평원에선 이제 대규모 마나가 필요할 겁니다. 전쟁이니까요. 마법사 개인의 에너지로 감당할 게 아닙니다. 그러려면 마시스의 마나 맥을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 마나 맥이 요전에 고블린이 습격했던 키메라 성소가 있는 그곳입니까?”
“네. 그걸 잘 아는 고블린들도 악착같이 키메라에까지 달려들었죠.”
마지막으로 다시 몸을 돌이켰다. 방향으로 보자면 북서쪽이다. 카첸, 슈니크, 미크라야크 등 산악 깊숙이 들어간 소국들이 보였다.
“제 예상이 틀리길 바랍니다만, 적이 몰려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산에 숨은 반항적인 형제를 도와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저들을 모아 우리가 직접 싸워야 할지도 모르죠.”
말을 마치고 하라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밝은 빛이 갑자기 사라지니 눈이 적응하느라 잠깐 침침해졌다. 시력이 회복될 즈음, 네마냐의 본론이 시작됐다.
“이것이 우리가 다르빌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곳을 내주는 순간, 첫째, 우리가 적에 대항할 준비 시간이 줄어듭니다.”
첫 번째 손가락을 꼽은 뒤, 네마냐는 다시 두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둘째, 방어에 써먹을 수 있는 마나의 원천이 적에게 악용될 가능성마저 커집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론…….”
“각지의 인간들끼리 조각나서 각개격파를 당하겠지요.”
구르간의 결론. 네마냐는 웃음을 지었다. 말하고 싶은 부분을 그가 제대로 강조해 준 셈이 되었다.
“맞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도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고, 다음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겁니다.”
“어떻게요? 우리 눈이 모두 옹이구멍인 것은 아닙니다. 어제 말씀하신 대로 피난민을 정착시키고 그 기반으로 도시의 경제와 방어를 강화하는 건 좋습니다만,”
“만?”
너무 간단하게 예상했던 질의였다. 뭐, 이런 상황에서 반박할 거리는 너무 뻔하디뻔하지만.
“대체 그 재원은 어떻게 조달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어느 정도 예산이 필요한지는 검토하셨습니까?”
“네. 모든 작업을 고려하면, 다르빌의 자립까지 1년간 금화 만 개의 경비가 필요합니다.”
정면 돌파. 거리낌 없이 충격에 노출하며 원하는 바로 나아간다. 정신 차리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기 전에!
“만 개요?”
일부러 더 목소리를 키운 멜키시빌리 조합장. 그 영향인지 주변에서도 술렁임이 커졌다. 시장이 곧바로 소란을 잠재우곤 다시 이쪽으로 정색한 표정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금화 만 개면 대형 상단을 하나 세우고 움직일 돈입니다. 영지로 따져도 거대 왕국 단위의 예산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얘기지.
“맞습니다. 제가 부탁드린 자료를 보니 최근 다르빌은 1년 예산이 80 골드였죠. 저희 바가반드 영지는 수입이 두 배가 되었으나 아직 8백 골드 수준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뒤 바가반드 백작이 엘레나에게 고개를 돌린다.
“지케른 쪽은 어떻습니까? 성국은 재정이 조금 나은 상태일 텐데요.”
“순례객이나 동맹국들의 보조금을 포함해서 3천 골드 정도. 신관회 토지 수입이 5백 정도 됩니다.”
“그거 보십시오! 두 영지가 1년 내내 이곳에 몽땅 쏟아부어도 절반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의기양양한 멜키시빌리. 심지어 한발 더 나아갔다. 그렇지, 잘한다!
“설마……! 어려운 주민들에게 특별세를 더 걷겠다는 건 아니겠죠?”
좌중이 술렁거렸다. 흉년에, 천재지변에,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추가 세금이라니. 반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리가 없죠. 거기 물 한 모금 드시고 진정하세요. 모쪼록 제 말씀 잘 듣기 바랍니다.”
들고 있던 파피루스 뭉치를 내려놓으며 네마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산만해지는가 싶던 이목이 모두 집중하고 있었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했고, 실제로 하나는 이미 의사를 타진 중입니다. 그 하나는 제국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겁니다.”
이번에도 좌중이 시끌시끌했으나 양상은 조금 달랐다.
―제국이라고?
―글쎄, 확실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괜히 또 내전 일으키는 거 아닌가.
“조용! 나중에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세요.”
시장은 웅성거리는 소란을 진정시킨 뒤 이야기를 계속하라며 손짓했다.
“성녀님과 에카톤 상단을 통해 이미 연락을 넣었습니다. 고원 절반의 통치자를 자처하는 이상, 제국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제국을…… 끌어들인다?”
“탐욕스러운 제국에 간도 내놓는 격 아닌가?”
“하지만 제국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정도 되는 지출을 감당하나?”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집중력이 흩어지려 한다. 이로써 도시를 포기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연스레 폐기됐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더 톤을 높인 네마냐의 목소리가 소란을 잠재웠다.
“둘째! 각 영지의 안전을 위하여 영지 마나 체제를 도입합니다. 모든 영민의 마나는 각 영지에서 관리, 징수 및 운용합니다.”
미리 어느 정도 언질을 받거나 의견을 나눈 상태인 구르간 시장, 엘레나와 성 기사단, 하라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겐 따라가기도 벅찬 변화였다.
“허어, 그런.”
“영지 마나라면 제국에서 쓰는 그거 얘기지?”
멈춰선 안 된다. 계속 밀어붙였다.
“그 대신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민회를 재편합니다. 평상시 의결을 담당하는 상설 민회와 비상시 소집되는 평민회를 둡니다. 상설 민회 의석은 곧 명예직으로서, 정한 기간까지 국가에 낸 기부금에 따라 분배됩니다.”
구르간 시장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발표 의사를 밝혔다.
“네, 말씀하시죠.”
“……말씀하신 개편안은 다르빌 시에만 적용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시장이 조심스레 꺼낸 질문. 그건 앞으로 고원을 어떻게 바꿀 생각이냐와도 연결된다. 정책 결정에 끼어 보지도 못한 채 이용만 당하다 쓰러졌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곳에 선 순간에도 그 기억이 네마냐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개혁을 원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변하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빠르게 체질을 개선하려면 이것밖에 답이 없습니다.”
침묵 속에서 다음 답을 기다리는 대중에게, 네마냐는 조금 예상외의 답변을 제시했다. 정말 고블린 전쟁을 위해 전국적인 일제 시행을 할 것인가? 마나를 이용해 부를 누리는 기득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러니 먼저, 저희 바가반드와 다르빌에서 이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신성 기사단도 동의합니다.”
―술렁.
동감. 감정의 동조는 때때로 고민하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큰 영향을 발휘한다. 엘레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국을 대표하는 지위까지 포함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 엘레나는 손을 내밀어 청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느리지만 반드시 나아갈 겁니다. 물러서는 길은 없습니다.”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주변에 있는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세력의 대변인으로서 가장 젊은 세대의 도전을 수용하든, 저항하든 어떻게든 답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모두의 시선은 각자의 이유로 강렬하게 이쪽을 향했다.
‘그저 기다리다 파멸하지 않도록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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