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워이, 워이!
주인들의 호령에 말들이 멈춰 섰다. 황급하게 달려온 능선. 전방의 다른 능선 너머로 먼지 바람이 불어 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글쎄. 일단은 본대부터 합류하자.”
온몸에 돋는 소름을 애써 모른 척하며, 엘레나와 네마냐는 접선하기로 한 본대를 찾았다. 머지않아 본대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쯤부터 고블린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 모양인데. 본대는 어디에 있는 걸까?”
고블린 사체와 피비린내.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가 어딘가 익숙했다. 그래, 이건 고블린의 비릿한 피 냄새지. 그런데 그 가운데 섞여 있는 이건…….
“이런…… 젠장. 본대에 마도사가 없는 줄 알았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삼킨 네마냐 영주가 급하게 뒤쪽 언덕을 넘어섰다. 멍하니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네마냐의 뒤편으로 엘레나와 나머지 기사들도 속속 달려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백여 구의 고블린 사체가 있는 것은 놀랄 것이 없었다. 패잔병을 학살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니까.
“저쪽에 널브러진 사체는 고블린의 것이 아닌데…… 설마 신성 기…….”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레나가 이야기를 일부러 끊으며 달려갔다. 마찬가지로 다른 일행들도 굳은 얼굴로 내달렸다.
“슴바트!”
한참을 내달린 끝에 엘레나의 입에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강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른 안개 속.
“목소리……. 부단장님입니까?”
부상병들을 수습하던 기사들이 목소릴 알아듣고 일어섰다. 근처에 도착하기 무섭게 말에서 뛰어내린 엘레나는 성큼성큼 안쪽을 헤치고 들어갔다. 부상자를 나르는 기사들의 표정이 침울했다. 네마냐도 곧 말에서 내렸다.
“부단장? 지금 왔어?”
“슴바트,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됐는데 우리 기사들이 이렇게까지…….”
슴바트라는 기사는 피곤에 찌들은 듯 동쪽에서 수입하는 비싼 연초를 연신 피워 댔다.
“마도사였어. 아마도 우리가 잔당을 처리한다고 지나치게 방심한 모양이야.”
핏기가 싹 가신 엘레나는 그런 선고를 받자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놈들이 얼마나 탈출을 했지?”
“탈출 자체는 거의 없었어. 왜소한 마도사 놈이 주변에 데리고 있던 200여 명 남짓한 병력이지.”
“내가 마저 추격해서 끝장을 봐야겠어. 단장은, 단장은 어디에 계시지?”
슴바트라는 간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연무만을 내뱉었다. 전장의 경험이 깊게 물든 주름살에선 알고 싶지 않은 삶의 깊이가 느껴졌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슴바트? 뭔가 중대한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지?”
“……누가 뭐라고 얘기해도 단장 호슨이 적과 장렬히 싸웠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야.”
그 말과 함께 일행을 뚫고 한 무리가 들것을 들고 나타났다. 기사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양쪽으로 비켜서자, 슴바트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메마른 말을 꺼냈다.
“모두 마지막 예를. 지케르니아 신성 기사단 단장, 호슨의 마지막 길입니다.”
“이런…….”
엘레나의 거친 욕이 나지막하게 몇 번 이어졌다. 딱히 제지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비보였다.
‘기사단 전사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켜보는 네마냐도 충격을 받는 일이었다. 함락된 다르빌을 되찾느라 기사단이 타격을 입는 일은 피했다. 그러나,
‘호슨 단장이 전사라니.’
원래라면 호슨은 몇 년 뒤, 다른 곳의 영주로 발령을 받고, 그 자리를 엘레나가 대체해야 했다. 그의 막강한 오러와 신성 마법 기술은 이후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정도다.
‘앞으로 꽤 상황이 꼬일지도 모르겠어.’
고블린을 토벌한 이상 전쟁의 시작이 유리한 건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당분간 엘레나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겠군. 단장의 몸에서 느껴지는 탄내와 마나의 흔적……. 살짝 보았지만 네마냐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적마석 자폭……. 키메라가 아니었다면 나도 당했겠지. 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네마냐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바가반드 영주님?”
누군가 상념을 깨뜨리고 의식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기사단 재무관이라고 스스로 밝힌 슴바트였다.
“그래요, 슴바트 경. 네마냐 나자리안입니다.”
“어려운 일에 흔쾌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울타리니까요. 괘념치 말길. 잔당들은 어디로 도망쳤습니까?”
뜻하지 않은 비극이 터진 뒤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네마냐로선 필요한 절차였다. 슴바트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목소리를 좀 더 낮추어 입을 열었다.
“놈들은 전 황금 모래 영지나 바라케르트로 건너지 않고 산길로 달아났습니다.”
“미크라야크 방면이요? 하지만 그쪽은 군단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닌데.”
미크라야크 소왕국.
통일 하야크의 마지막 왕세자가 세운 나라다. 제국에선 소왕보단 대공으로 불렸다. 계승 전쟁을 틈타 고블린과 제후들, 심지어 제국까지 개입하면서 하야크는 쪼개졌다.
“하필, 추격도 어렵게 미크라야크로.”
본토인 서쪽이 제국, 바난드, 성국, 마탑 등으로 갈라진 반면, 동쪽의 산악 지대는 왕세자 미스라다트가 미크라야크, 그러니까 ‘작은 하야크’란 이름으로 소국을 세웠다.
‘미크라야크는 서쪽 사람을 불신하지. 경비병에게 얘기해 봤자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 텐데.’
조금 망설이던 슴바트는 잠자코 고민에 빠진 네마냐를 지켜보더니 먼저 말을 꺼냈다.
“바가반드 경, 아무래도 이번 작전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놈들이 산을 건너갔다면 추격하긴 껄끄럽습니다. 대공국과의 외교 문제도 있고. 호슨 님과 엘레나는 돈독한 사제라고 알고 있는데 그게 좀 걱정이군요.”
혹여나 엘레나가 따르던 스승을 잃고 폭주할까, 그것이 도리어 염려스러웠다. 충분히 가능한 일인 데다, 그러는 것도 이해가 가서 더 그렇다.
“엘레나가 이렇게 자라는데 호슨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말입니다. 가족만큼이나 소중히 여겼으니 울분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네마냐는 이해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두 사람은 현장을 수습해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전사한 병력도 충격에 비해 적었다.
‘이제 여기선 더 얻을 게 없겠지.’
씁쓸하지만 국경 지대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200명 남짓을 제외한 대부분을 격멸했으니, 고블린 군단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은 틀림없다.
‘이걸로 혹시나 침략이 조금 더 늦어지면 그거야말로 최고고.’
천막의 기둥에 기댔던 몸을 일으킨 네마냐는 망토를 털었다. 역시 침묵에 잠겼던 슴바트에게도 이야길 건넸다.
“엘레나는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재무관께선 출발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대공국이 개입하기 전에 얼른 떠나죠.”
“좋습니다. 그럼 일단 다르빌로 돌아가서 다시 상황을 이야기해 보죠.”
“영주님.”
슴바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헤누크였다. 필로칼리스에게 지도를 부탁했던 알리테스도 멀쩡하게 배석해 있었다. 피로감이 몰려오는 가운데서도 그나마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이유였다.
“헤누크. 우리도 다르빌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영지에도 간략하게 전신을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알리테스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피곤하기로는 마찬가지겠지만 오히려 어딘가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옅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다.
“첫 전장에서 여러 경험을 했겠어. 고생 많았다, 경. 모쪼록 도움이 되었길.”
“네, 오늘의 경험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좋은 기사를 얻었어.”
피곤한 몸을 이끌면서도 네마냐는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했다. 그러고 나서야 군막을 벗어났다.
“분명, 군막 근처라고 했는데…… 아.”
과연 능선 건너편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등이 나타났다. 평지를 타고 오르던 바람이 좁아지는 계곡을 지나면서 강하게 훑고 지났다. 단발임에도 강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형제보다도 더 자주 봤던 스승과 갑자기 헤어지는 건……. 예상하지 못했어.”
네마냐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지인을 떠나보내는 데는 포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은 그걸 들어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너무 갑작스럽다 보니 좀 허탈하네. 하지만 내가 감상에 빠지는 건 허락되지 않지.”
그 말을 남긴 채 엘레나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동고동락했던 동료와 죽음 앞에 갈라섰던 경험은 네마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무게를 잘 알기에, 기사단의 사기를 위해 애써 감추는 엘레나의 감정을 깊이 알 수 있었다.
“엘레나…….”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보였다. 짐짓 모른 척하며 네마냐는 어깨로 손을 올렸다.
“가자. 돌아가서 단장의 유지를 잇고 지켜 낼 방법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잠시 슬픈 빛을 띠었던 엘레나의 얼굴에서 금세 쓸쓸한 표정이 사라졌다. 오늘, 신성 기사단은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엘레나의 각성으로 그에 못지않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래,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잘 돌아왔어.”
소매로 눈물 자국을 지우는 녀석을 토닥여 주었다. 일출이 가까워 오면서 안개는 더 심해졌다. 그러나 이미 여명은 깊은 안개의 가장 안쪽 구석을 파헤치고 있었다.
* * *
―이럇!
말이 달리는 소리. 새벽의 차가운 정적은 사정없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몇 명의 기병이 거침없이 산길을 내달렸다.
―휘익.
작은 개천이 가로막은 길. 기병들은 휘파람으로 말을 달래 가며 개천마저 돌파했다. 굽이굽이 몇 번의 좁은 길을 지났을까. 마침내 어느 산등성이의 진지에 다다랐다.
―워, 워.
총 세 명, 그러니까 두 명의 호위와 한 명의 장교였다. 거칠게 호흡을 내뱉는 말을 쓰다듬으며 일행은 말에서 내렸다.
“진짜였구먼. 놈들이 국경까지 왔다더니. 언제 놈들이 출몰했다더냐?”
입김을 뿜어내면서 불확실한 단어를 속사포처럼 쏴 대는 인물.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 먼 새벽임에도 황금색 갑옷은 한눈에 띄었다.
“내습했던 고블린을 추격하는 상태였고 시간은 대략 3시간 전입니다.”
“3시간, 3시간이란 말이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닌가?”
“국경 조약 맺은 지가 몇 달이나 됐다고…….”
호위병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덧붙였지만, 상관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한때 왕가를 쳐서 나라를 무너뜨린 천하의 역적 놈들 아니냐! 한 번 역적질했으면 또 침공하지 말란 법도 없지.”
쉴 새 없는 투정과 함께 사내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상당한 실력이 없이는 기사들도 엄두 내기 힘든 기술이었다. 호위병이 미처 따라 내리기도 전에 경박한 발걸음이 허술한 진지 안으로 이어졌다.
“대충 알아서 따라와라! 난 성질이 급하니 바로 본론부터 따지러 갈 테니까.”
그렇게 몇 발짝이고 옮겼지만 최소한의 검문 병력조차 없는 이상한 상태였다. 역시나 성국 놈들이란 엄한 데서 정신을 빼놓는단 말이지. 말을 멈추면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하는지 구시렁거림은 끊임이 없었다. 그렇게 좀 더 걸어가노라니.
“어이, 자네.”
“어라, 누구십니까?”
“난 미크라야크 기사단의 국경경비대장 호바니스다. 너희 대장은 어딨나? 당장 물어볼 게 있으니 데려오너라.”
기사로 보이는 녀석들은 싹수없게도 난처한 표정을 서로 교환했다.
“뭐 하는 태도지? 지금 바로 안내하라니까.”
“손님은 내가 맞도록 하지. 모두 가서 안장이나 챙겨 두도록.”
난처해하는 기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는 또 다른 기사. 처음 이야기 나눈 기사보다도 훨씬 어렸다. 호바니스는 바라지 않은 이야기 상대라 짜증이 솟구쳤다.
“넌 뭐냐. 애가 왜 나와? 건방지게 막지 말고 어서 대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말씀하시죠. 내가 그 대장이니까.”
“허허, 요즘엔 꼬마도 기사들 대장으로 보내는 법이 있나? 하인인지 생도인진 모르겠다만 감히 기사에게 장난질을 쳐?”
호바니스가 손을 번쩍 들어 뺨을 후려치려는 순간. 네마냐가 손가락을 보였다. 오직 영주만이 가질 수 있는 인장 반지. 낮은 목소리가 상황을 휘어잡았다.
“바난드의 전하께서 인정하신 바가반드의 영주, 네마냐 나자리안이다. 이 정도면 신분 입증은 충분하겠지, 호바니스.”
“……바가반드, 네마냐?”
당혹스럽다는 눈빛의 늙은 기사.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몇 주 전에 들었던 이름이었다. 무엇보다 분명한 건, 영주에게나 허락되는 노란색의 수정 반지. 잠시 신음을 삼키던 늙은이가 갑자기 시끄러운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으하하. 이거 설마하니 진짜 영주였을 줄이야. 아무쪼록 무례를 용서하길 바라오, 바가반드 경. 이렇게 어린 영주를 보긴 오랜만이거든.”
“내가 영주가 된 것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네마냐는 손을 내리며 무심하게 답했다. 마치 지하철 명물이라는 괴팍한 노인이 떠오르는 인상이었다. 한마디로,
‘진상 느낌이 쎄하군.’
그나마 이 사람은 상황을 가릴 줄은 아는 모양이다. 사과가 부족한 걸 알긴 하는지 호바니스는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례한 이름이 모쪼록 제 주인에게까지 미치지 않기만 바랍니다. 경께선 양해하시길.”
“이해한다. 네 주인에게 영예가 있기를.”
역시나 의례에서 배운 대로 답하는 네마냐였다. 두 세력이 벌써 부딪치는 건 제발 좀 피해 보자는 마음에서였다. 호바니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웃는 표정으로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성국이 바가반드 군까지 더해 국경을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방금까지 잘 보지 않았나? 우리 연합은 단지 고블린을 소탕하기 위해 나왔을 뿐이네. 필요하다면 국경 통과를 요청했겠지.”
역시, 국경 부근에 조금 머무니 우려하던 문제가 생겨났다. 민심이 떠난 잔인한 왕세자 미스라다트와 사촌 형이지만 널리 인정받던 하코브 사이에서 터진 내전은 아직도 서로의 의심을 깊게 했다.
“여기서 내전기의 불편한 감정을 끌어오고 싶진 않군. 우린 곧 돌아갈 것이네.”
네마냐는 분명히 선을 그으며 문제를 최대한 축소시키려 했다. 물론 호바니스는 계속 따지고 들었지만.
“하오나 국경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며 몰래 진지를 구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문제가 되나? 이곳은 성국의 영역이 맞는데 통보 없이 진영을 지어도 그게 문제가 되는지 궁금하군. 정작 당신들은 도망치는 고블린은 신경도 안 쓰던데?”
첫 대면부터 정말 비호감이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시비를 걸기 위한 명분 쌓기였다. 마탑이나 경쟁 상단도 매사 태클 걸기 바쁘다지만 이놈들은 대놓고 싸우자는 수준이다.
“중요한 건, 우리 군주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이번 국경 무력시위는 이의 제기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득바득 우겨 가며 호바니스는 이번 사건을 ‘국경 무력시위’라 규정했다. 자신의 정당함을 어떻게든 세우겠다, 이런 뜻이다.
‘네놈들 뚝배기를 터뜨릴 이의 제기 말인가.’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애써 억눌렀다. 미크라야크의 비협조적인 자세는 비단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블린이란 공공의 적 문제에서마저 이렇게 비타협적이면, 앞으로 꽤 애로 사항이 되겠지. 어쩌면 고원의 정치적 분열을 바라는 마탑과 연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분명히 전합니다. 우리는 이번에 고원 회담을 열어 이번 사건을 엄중하게 다루겠습니다. 어떻게든 공식적으로 다룰 문젭니다.”
이걸 원한 모양이다. 고원의 군주와 대표를 모아 여는 「고원 회담」. 이곳에서 잠재 적성국인 성국과 바난드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
‘참, 너무 속 보이는 움직임이군.’
저쪽에서 굳이 드러내 놓고 호소할 예정이라면 이쪽에서도 피할 것은 없다. 네마냐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발적인 멘트를 날려 주었다.
“황량한 산악에 계신 ‘꼬마 군주’님 말씀 잘 들었소. 가서 미리 토론 연습 좀 해 두시라고 전하게. 산촌에서 그런 걸 배우기도 힘들 테니.”
“무례하지 않습니까, 대공 전하께?”
크고 부유한 백작령이라면 대공도 우습게 보는 세상이라지만 네마냐는 그렇지는 못하다. 그러나 초면에 윽박질부터 하는 대공 전하와 좋은 사이를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고블린으로부터 고을을 지키는 것뿐이다. 가짜 싸움으로 명분을 얻기 전에 영지나 질 지키시라고 전해라.”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호바니스는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을 던지고 떠났다. 굳이 담아내기도 지저분한 말이라 네마냐는 떠나는 등 뒤에서 가볍게 일갈해 주는 것으로 끝냈다.
“건방진 새끼.”
주변의 기사들은 방금 전 사건을 두고 웅성거렸다. 물론 걱정도 있다지만 대부분은 흥미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네마냐는 강한 위화감을 느껴 웃을 수만은 없었다.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 내가 회유할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거슬린단 말인가?’
자꾸만 핵심인 고블린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배후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역시, 눈을 감아 보면 알겠지.’
그 고민이 정답임을 알려 주듯, 임무창의 <고원 통일> 및 <고블린의 비밀> 항목이 동시에 갱신되었다. 그러니까, 고원의 정치적 분열과 고블린의 문제는 어딘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란, 이렇게 복잡해서 싫었다니까, 참.”
철군 준비가 마무리되는 진영에서 네마냐는 맞닥뜨린 심연에 한숨을 퍽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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