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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19화 (18/200)

19화

풀벌레 소리가 조용한 마당을 울렸다. 면회소의 계단은 연회장이던 성 바그라트 전당보다 높은 2단이었다.

“거의 왔네. 이 계단만 올라가면 곧장 눈에 보이는 정면 건물이야.”

일부러 맞춰 지은 건지는 몰라도, 달빛이 현관으로 쏟아져 내렸다. 바누라트는 앞에서 걸음을 이끌며 묵묵히 걸었다. 오래되어 마모된 계단 양쪽 손잡이의 용 조각이 달빛을 받아 굴곡이 살아났다.

‘흔적으로 보나 생김새로 보나, 고대 난쟁이족 시절의 물건이야. 이번엔 고블린이 이 용무늬 난간의 주인이 되게 두지 않겠어.’

네마냐는 난간을 매만지며 계단을 하나씩 올랐다. 바누라트는 성큼성큼 올라, 문지기와 인사를 나눴다.

“그래, 수고가 많소. 전하께선 아직 서류 결재 중이신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시는 중이셨습니다. 들어가시죠, 각하.”

네마냐는 최대한 자연스레 움직였다. 삼십여 걸음을 옮기자 건물 안쪽의 알현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색 차림인 인물이 지팡이를 한 차례 내리치자 조합장은 바로 무릎을 꿇으며 엎드렸다.

‘의전 담당관인가 보군.’

네마냐 역시 박자를 맞추며 조금 뒤에서 함께 머리를 조아렸다.

“신께서 신성한 의지를 위임하사 그 지상의 처소에 그림자를 드리우셨다. 다시 그 신성한 그림자가…….”

노인이 다시 지팡이를 내려치려고 할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낮에 보았던 하코브 왕이었다.

“됐네, 아샤길. 온종일 그 소릴 들으려니 골치가 아프군. 나머지는 당직 환관에게 맡기고 가게.”

“……전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로 환관이 물러갔다. 얼마 정도 살면 저렇게 흔들림이 없어질까. 20년? 30년? 네마냐는 바누라트를 따라 한동안 입구에 조용히 엎드리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왕관을 쓴 늙은이가 손사래를 쳤다.

“됐다, 바누라트. 그만 됐으니 어서 일어나 이리로 와라. 귀한 손님도 무릎이 까질까 봐 내가 다 두렵구나……. 귀빈도 안으로 드시게.”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다시 십여 보쯤 걸어 하코브 왕과 눈길이 마주칠 거리까지 다가갔다. 건강한 바누라트와 달리 10년 정도는 더 늙은 듯한 왕이 작은 신음을 터뜨리며 맞이했다.

‘행사장에서 봤을 때는 건강해 보여서 의외다 싶었더니. 정말 건강이 안 좋은 모양이군.’

국왕과 조합장은 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주제는 최근의 이슈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는 다른 주제로 흘러갔다.

“오늘 행사에서도 조합의 수고가 많았다. 특히 장식용 비단은 조합이 아니면 얻을 데도 없더군……. 그래, 요즘 길드 소속 상공인들은 아직도 불황이더냐.”

‘보통 왕과 절친한 조합장이라면 그런 이야기는 진작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는 건, 단지 예의상 이야기라거나…….’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서로의 의중을 파악한 상태로 들어왔는데 예의상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의전관도 보내지 않았는가.

‘나한테 공유하고 싶은 상황 인식이 있단 의미겠지. 기다려 보자.’

네마냐가 원하는 답을 쥐고 있을 바누라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왕에게 대답했다.

“불황이야 조합에서 어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형님. 다만, 개인적인 견해란 점을 먼저 짚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뭐든 말해 보렴.”

느긋한 하코브 왕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듣기 편한 자세를 잡았다.

“정말 걱정되는 건 3년 전부터 식량 수확량이 무섭게 줄어든다는 겁니다.”

“정말 체감이 될 정도더냐?”

왕의 무거운 목소리에 맞추듯, 조합장의 가벼운 대답이 다시 전해졌다.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고 해도 상인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물가 상승이나 수요 감소 등이 문제입니다.”

‘역시 그 이야기군. 근본적인 원인.’

네마냐의 관심과도 맞닿아 있는 얘기였다.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지금 하야스단은 여러 가지 고질병을 앓고 있었고, 기존 광산이 고갈되어 원자재 수출은커녕 자급도 불가능했다.

‘이걸 해결할 만한 사람도 없었고, 방법이 나왔을 때는 너무 늦었지.’

방랑하는 고블린 군단과 부족은 시시때때로 인간의 마을을 공격하며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그 모든 장기 말들이 날씨라는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거든. 이 양반들도 뭔가 있다는 건 알지만 미래와 연결된다는 점은 모르겠지.’

아직 이서준의 몸에 있었을 때는 툭하면 기후 변화로 난리를 치던 현대였다. 기후란 곧 사회와 나라마저 박살 낼 수 있는 위력을 가진다는 걸 너무 잘 날고 있었다.

‘그나마 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현대국가와 달리, 이곳의 나라들은 대응은커녕 상황 인식조차 못 하겠지.’

설마 이 세상의 누가, 한랭 현상으로 고블린이 남하해 문명이 망할 줄 알았을까. 기가 차는 노릇이다. 하지만 당장은 국왕과 조합장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경우는 일단 한시름 덜어도 될 게다. 식량 부족분은 공급될 게다. 아까 행사장에 왔던 총독부 참사관이 필리피코스 총독의 전언을 전하고 갔지.”

제국 총독부 이야기가 나오자 바누라트는 한결 목소리를 낮추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주위에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럼 얼마 전에 보냈던 식량 요청 건이겠지요. 뭐라고 합니까?”

“우선 논의는 해야겠지만 군량 3천 자루를 당장 지원한다더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직은 부족분이 크지 않아 당장은 문제가 사라질 겁니다.”

‘어디까지나 예정은 그렇겠지.’

언제라도 영악한 고블린이 내려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확신은 언제나 금물이었다.

“뭐, 앞으로 얼마나 총독부가 지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아까 들어 보니 정부에 대략 3만 포대 정도를 요청할 모양이야.”

“당장은 급한 일부터 막고 봐야 하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곧바로 협상이 진행되는 겁니까?”

“곧바로 결론이 나진 않을 거다. 조합 측에서 1년간 왕국에 필요한 식량을 계산해 주겠느냐? 배급량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더군.”

“위기 상황일수록 상인 조합이 맡기 좋은 역할이군요. 바로 조사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내가 동생 하나는 잘 두었군.”

격의 없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는 형제는 확실히 관계에 대한 신뢰로 가득해 보였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던 하코브 왕은 이내 시선을 돌려 멀뚱히 서 있는 네마냐를 바라보았다.

“아, 손님을 모셔 두고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음, 나자리안 경이라 했던가? 좀 더 가까이 오게.”

“실례합니다.”

왕의 말에, 네마냐는 바누라트와 몸이 맞닿을 정도로 다가갔다. 하코브 왕은 네마냐가 다가오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잠깐의 침묵은 국왕이 말문을 열면서 깨졌다.

“바난드에 어서 오게, 젊은 손님. 아니, 이제는 바가반드의 영주라고 해야 하나?”

대뜸 당황스러운 물음. 아니, 애초에 물음이기는 한 소리인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하코브와 눈을 맞추었다.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는 강렬한 눈빛. 그 앞에서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형님,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부터 꺼내지 말라니까.”

바누라트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대충 엘레나와 이야기를 나눈 덕에, 국왕이 네마냐 자신을 어찌 여기는지는 알고 있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가스파리얀은 이미 안중에도 없군. 이상한데. 가스파리얀이 독자노선을 선언하는 건 훨씬 뒤의 일이었어. 단순 기존 원한 관계를 이유로 왕이 나서진 않을 텐데. 그렇다면?’

흐름의 변화.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네마냐 자신의 출현. 그것이 얽혀 새로운 결과를 낳은 것이 틀림없었다.

‘더 충성스러운 장기 말을 찾았다, 이거군.’

확신을 얻은 네마냐는 마침내 빙그레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환대에 감사합니다, 전하. 다만 저는 바가반드의 영주가 아니고, 바가반드에서 작은 농장을 가진 소영주일 뿐입니다.”

잠시 좌중에는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의 청아한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는 시간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네마냐를 바라보던 바누라트와 하코브. 하지만 몇 초 만에 그 침묵은 스러졌다. 벽력과도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으핫핫핫!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구만. 바누라트, 너도 들었지? 과연 네가 말한 대로 평범한 소년은 아니군.”

“제가 뭐라 했습니까. 그래도 떠보는 질문에 예리하게 빠져나갈 생각은 못 했는데.”

“바가반드에서의 영주(Lord in Vagaband)이지, 바가반드의 영주(Lord of Vagaband)는 아니라니. 썩 괜찮은 말 돌리기야.”

왕은 희끄무레한 회색빛 수염을 어루만지며 강인한 눈빛을 거두었다. 아직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싹 사라졌다.

‘과연, 단순한 떠보기 질문에도 위엄이 서리는군. 하야크 내전이 터지기 전까지 차기 대왕 후보였던 것도 이상하지 않아.’

좀 전의 질문을 통해 하코브 왕은 네마냐가 바가반드의 백작을 원하는지를 직접 떠보았다. ‘내가 직접 백작을 줄 수 있다’라는 메시지와 ‘그것이 네 목적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진 것이다.

“아까 말씀에 진지하게 답변해 보겠습니다. 국왕께서 명분을 정하시고 제가 실력을 보이면, 바가반드의 영주가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래. 그럴 만한 능력이라고는 하더군. 가스파리얀처럼 게으름을 일삼는 자와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

그렇다고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건 면접의 연속이다. 같이 계획과 작전을 공유할 수 있는 동맹인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적어도 그런 걸 알고 싶겠지.

“하지만 제가 원하는 목표는 그런 소소한 데 있지 않습니다.”

“소소하다? 하긴, 바가반드가 영지 자체론 대단한 게 아니지. 그럼 어딜 바라는가? 이바니 계곡이나 평화로운 이라크시스 협곡? 그것도 아니면 아칼치헤 계곡?”

“너무 작군요.”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그것보다 큰 건 없다네. 정말 원한다면 바난드 왕이라도 원하나? 그게 내 전부지만.”

“형님!”

무심하게 가라앉는 왕의 눈길에 바누라트가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답을 얻기 전에 저 노회한 정치적 짐승은 바람 한 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네마냐 역시 바라던 바기도 하고.

“……일단 제 소원을 성취하려면 하야스단 전체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일단은 두고 보자는 듯 잠자코 듣고 있는 하코브. 하지만, 바누라트는 이미 대화의 스케일이 국경 밖으로 팽창하는 데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

하지만 국왕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동생을 제지했다.

“좋아, 계속 얘기해 보게.”

“감사합니다. 저는 제 고향인 바가반드,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제 농장이 제발 멀쩡하게 돌아가서 이윤이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잠시 여운을 남기고 청중이 따라올 수 있도록 쉬어 주었다. 비싼 돈을 내고 들은 대학교 스피치 수업이 뜬금없이 여기서 활용된다고 생각하니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사소하고 작은 농장을 위해서 바가반드와 바난드, 더 나아가 하야스단 전체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는 데 제 능력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그렇군. 큰 것을 원한다는 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부귀와 명예는 관심 밖이라.”

국왕의 요약과 함께 대화의 흐름은 안정되었다. 바누라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지만 아직 두 사람의 칼춤은 멈추지 않았다.

“네마냐 경 자네의 원숙한 판단력은 잘 알아들었네. 정말 그렇다면, 자네 역시 내가 한 순수한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 탄복할 사람이 아님도 이해할 수 있지.”

‘물론. 가스파리얀의 끝없는 정치질에 시달렸는데,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이지.’

네마냐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상을 좇는다면서 자신의 몸마저 불태워 버린 인생은 적지 않으니까요.”

“후, 맞는 말이야. 자네는 그럼 그네들과 다른가 보군?”

잠시 주춤했다. 국왕은 처음처럼 노려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만은 않은 눈빛을 보였다.

“……신뢰가 된다고 판단될 때까지 바가반드와 바난드, 그리고 전하와의 계약 아래에서 봉사하겠습니다.”

숨을 길게 들이쉰 왕은 다시 눈을 마주치며 물어왔다.

“구체적으론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제가 제시한다며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

조금 의외라는 듯 크게 놀란 국왕의 대답. 네마냐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혓바닥 아래에 남아 있다. 뭔가 말을 끝내고 나면 더 좋은 단어나 논리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 건넨 제안이 적어도 진실하게 보이길 바랄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제는 다시 국왕의 말을 경청할 차례였다. 조금은 긴장한 자세로, 네마냐는 하코브 국왕의 딱딱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 2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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