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46화 (146/200)

# 146

52장 - 바람직한 상담사 (2)

차에 오르자마자 나를 추궁하기 시작한 아내는, 주영주와 나눈 대화를 듣고 나서 손뼉을 쳤다.

“그거 아마, 아버지 때문일걸?”

“아버지 때문?”

“응. 언제 칼럼 올라온 거 읽었는데, 아버지가 장성이던데.”

“이런. 당신도 영주 씨 팬이었어?”

“좀, 멋있잖아. 나보다 몇 살 안 많은 언니가 눈 부릅뜨고 늙다리 정치인들이랑 싸우는 게. 보면 대단하다 싶더라.”

“그랬구나. 아무튼, 아버지가 장성이라고?”

“응. 그 시절 장성이면 진짜 군기 엄청났을 텐데. 집안인지 내무반인지 모를 정도로 애들 잡았을 거고…… 그 과정에서 권위주의로 인해 의견이 묵살된 적도 많겠지. 그런 집에서 자란 아이는 둘 중 하나 아니겠어? 철저하게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거나, 처절하게 권력을 부정하는 사람이 되거나.”

“동갑입니다, 사모님. 철저와 처절의 라임도 좋군요.”

“……으, 흠.”

내 수행비서를 자처하며 그녀를 집에서부터 태워왔던 손바울에게, 아내는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핀잔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바울아. 그런 아부는 하지 마.”

“아부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저기, 바울 학생? 이제 그러지 말아요.”

“선생님의 제자로서 당연한 일인데요.”

“제발…….”

“그렇게까지 부탁하신다면, 언사에는 주의하겠습니다.”

말만 조심하고 행동은 똑같이 하겠다는 이야기다.

얼이 빠진 아내를 대신해, 옆자리의 유하늘이 속삭였다.

“저, 그, 바울이는 좀…… 무섭네요. 충성심이…….”

“하늘 씨?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결국 유하늘까지 입을 닫게 됐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주영주를 생각했다.

바람직한 세상에 대한 그녀의 염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과거엔 그저 젊은 혈기 아닐까 의심했지만, 110의 ‘진단’을 갖게 된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그녀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것이 장성의 딸인 까닭이었을까.

가정에서 겪은 어떤 사건이 그녀에게 권력에 대한 증오감을 안겨줘, 목숨을 걸고 부조리에 저항하게 만들었을까.

“도착했습니다. 사모님, 내리실 때 자갈 조심하세요.”

“으, 응. 고마워요.”

만찬장으로 예약해둔 간장게장집 앞에서는, 먼저 이동한 진대수와 팀장들이 후원자들을 안쪽으로 안내하는 중.

그 곁에 주영주와 보좌진이 서 있다.

그쪽을 일별하며 손바울에게 물었다.

“바울아. 네가 볼 때 주영주 의원은 어떤 사람이니?”

“흠. 100% 확률로 정신질환자입니다.”

“……근거는?”

“근거까지 필요하겠습니까? 사명감으로 일한다는 정치인 중 대부분은 가식 떠는 능구렁이겠지만, 그거야 선생님이 몰라보실 리 없는 거짓말이고. 위선이 아니라면 정신질환이죠.”

좀 염세적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는.

스웨덴의 국회의원은 봉사하는 명예직이라고 한다.

급여만 봐도 미 하원의원의 절반 수준.

어떤 특권도 혜택도 없이 그저 시민으로서 살아가며, 거기에서 정신적인 자긍심을 느낀다는 모양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특별시민.

국민 중 상위 2%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고, 공항 귀빈실과 재외공관 영접을 받으며,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을 누린다.

결국 위정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환경이다.

의원이 기득권이 아닌 사회라면, 일부 선량한 이들만이 봉사정신으로 의회에 등원할 것이다.

반면 의원 당선을 ‘장원급제’로 치부하는 사회라면, 가장 선량한 사람조차도 권력에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환경에 무심한 사람이라면.

당내 소장파와 무수한 청년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는 3선 의원이, 오직 자신의 신념을 위해 국민에게 봉사한다면.

분명 헌신적이고 존경스러운 위정자겠지만……

그것을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보. 주 의원, 내실로 안내해줘. 금방 올라갈게.”

“알았어. 흠, 왠지 좀 신난다. 내가 주영주 의원이랑 겸상이라니. 이런 게 잘난 남편 둔 행복인가?”

무심결에 빤히 쳐다봤더니, 아내는 금세 얼굴을 붉혔다.

“미안. 농담이었어. 그렇게 속물 보듯이 보지 마.”

“아니, 그렇게는 생각 안 했는데.”

“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잖아. 그냥 나 보지 마.”

내 아내도 정상은 아니지.

자연스러운 흐뭇함마저 스스로 단속하는 사람이니.

비정상이라 해서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식당에 자리를 잡은 후원자들과 일일이 공치사(空致辭)를 나눈 뒤에는, 또 다른 비정상과 마주했다.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는 한효준이었다.

“주영주가 자네를 참 많이 따르는 모양이군.”

“……따른다고까지 말씀하시면 좀 민망합니다.”

“사실관계를 논할 때는 겸양하지 말게.”

“예……. 교수님께선, 주 의원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괜찮은 정치인이지. 당적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은 청빈한 사람인 듯하니. 게다가 결혼조차 하지 않아 친인척 비리가 나올 가능성도 적어. 이 나라에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주영주 외에는 마땅한 인재가 없을 게야.”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후한 평가다.

어쩌면 일종의 동질감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으로 온화한 상담사를 갈망하게 된 그에게, 주영주의 헌신적인 행적이 어떤 데자뷰가 되었을지도.

“일각에서는 가정 없는 이가 국정을 알겠냐고 합니다만.”

“가정이 있건 없건, 적폐는 적폐고 인재는 인재야. 구태여 염려를 하겠다면 그쪽이 아니지.”

“염려할 다른 쪽이 있습니까?”

“그래. 주영주가 정계에 입문하던 시기에 은퇴한 어느 여권 인사는, 정계를 시궁창이라 평했어. 정당을 떠나 바른 정치가 기능할 수 없는 동네였다는 의미야.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네. 삿된 자를 피하라는 가르침이지만, 다르게 해석하자면 가까운 자들과 닮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도 되지. 제정신 박힌 정치인이 드문 시궁창에서 고군분투한 것이 8년……. 슬슬 한계가 아닐까 싶기도 해.”

내실로 이동하며, 그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며 세속적으로 변한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부조리라 해도 이득을 주는 일이라면 저항하지 않게 된다.

정치판은 그런 관습에 찌든 노인들의 세계다.

개개인의 도덕성을 떠나, 젊은 이상론자에게는 그저 시궁창으로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주영주는 30대에 그 정치판에 투신했다.

이번 415 총선으로 3선의 중진의원이 됐고.

그런 그녀는, 지난 8년을 어떻게 버텨왔을까.

그 세월이 전부도 아니다.

검사 출신 국회의원인 주영주는, 2011년 벤츠 청탁 검사 사건 등 비위검찰의 문제를 비난하며 법복을 반납했던 인물.

행동 자체는 정계 스카웃을 노린 퍼포먼스였을지 모르나……

바람직한 세상을 꿈꾸던 사람이 경직된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가시에 찔렸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던 까닭이다.

내실의 문 앞에서 엿듣게 된 대화가, 내게는 퍽 의외였다.

“봐요, 자. 꼰순이 계정 맞죠? 요즘 유명해요.”

“아…… 정말이네. 계정까지 알려져 있구나. 전 정말 걱정이에요. SNS 비공개로 전환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유명한 Z세대잖아요? 지켜보니까 생각도 올바르게 하고 있고, 귀엽기만 한 애던데요 뭘.”

“그렇지도 않아요. 귀여운 거야 초등학생 때까지였죠. 지금은 나름 머리 컸다고 ‘엄빠는 아무것도 몰라’ 소리만 하는데, 보고 있으면 누구 속에서 저런 애가 나왔나 싶어요.”

“후후. 주희 씨 속에서 나왔잖아요? 어렸을 때 주희 씨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어휴. 아녜요. 걔는 분명히 애아빠 닮았어.”

“대민 씨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외모는 안 닮았지만.”

내 얘기까지 엿듣기는 불편해서 미닫이문을 열었다.

보좌진은 따로 자리를 옮긴 건지, 안에는 둘뿐이었다.

“당신, 빨리 오지 않고.”

“미안해. 영주 씨,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참…… 호칭이 영 불편하네요.”

“혹시 주 의원 쪽이 나으시다면-”

“그게 아니라요. 우리 그래도, 이 넓은 세상에서 대학 동문이고, 와중에 얼굴도 봤던 사인데. 동갑끼리 친구나 하죠?”

친근함 가득한 얼굴로 웃는 주영주에게 답할 말은……

아무래도 이것밖에 없겠지.

“전 74년생입니다.”

“네? 어? 75 아니고요? 94학번 동긴데……?”

“국민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지요. 그땐 그랬잖습니까.”

“아…… 그렇구나. 오빠였네요.”

나이에 따라 위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꼰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주영주와 가까워지는 것은 부담스럽다.

한효준이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상담이 필요할지도 모를 인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해둘 필요가 있을 듯했다.

“친구는 더 친해지고 난 뒤에 하시지요. 이번 일에만 참여해주신다면, 앞으로 만날 일이야 많을 테니까요.”

“뭐야, 벌써 본론이에요? 너무하신다 참. 식사부터 하시죠?”

“그것도 미안합니다. 곧 방송을 시작해야 할 입장이라, 빨리 이야기 마치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안 그러면 차에서 방송을 켜야 해서요. 양해해주신다면 식사하시는 동안 설명하지요.”

“……진짜 너무하신다. 안 그래요, 주희 씨?”

“음…… 죄송해요. 이이가 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는 아내는, 못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명 정치가에게도 당당한 태도가 흡족한 모양이지.

반면 주영주 쪽은 실망감이 큰 듯했다.

“어휴. 친구 내외랑 느긋하게 식사한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친구도 아니었고, 느긋하지도 못하네요. 못살아 진짜. 그래요. 어디 한번 그 중요한 본론부터 말씀해보세요.”

이럴 때면 110의 ‘진단’이 참 고마워지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주영주는, 사실 불쾌함 따위 없는 상태.

예의상 고개만 숙여 보이고 입을 열었다.

“미국 대통령이 SNS를 통해 유권자들과 소통하는 시대입니다. 한국 정계에도 새 바람이 불고 있지요. 귀 당의 당대표 출신인 정치인조차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유명한 영주 씨는, 그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있지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미 짐작하고 계신 거 아니고요?”

“……영상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본의와 다르게 해석될 것을 염려하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면도 있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의가 드러나는 일 쪽이 무섭지만요. 실시간 방송이란 게 그렇잖아요? 순간순간의 소통이 전부 기록으로 남게 되는 셈이니까.”

“그 본의라는 건……”

“기억 안 나세요? 아니, 달라졌을 거라 믿으시는 걸까? 전 여전해요. 아니지…… 더 심해졌죠. NL과 PD 정도나 곁눈질하던 제가, 이제는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니까요.”

아나코 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e).

한국에는 주로 노엄 촘스키의 저서와 결부되어 알려졌고, “부패한 정부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라는 문구가 유명하다.

본질적으로 대기업과 부동산을 포함해 개인을 강압하는 모든 사유재산이 부도덕하다고 보는 견해다.

그렇기에, 사유재산을 보호하며 공공자산마저 민영화하는 국가의 해체를 목표로 삼는다.

심지어 그들은 사회주의적 노동자국가조차도 거부한다.

자본주의라면 최종보스 같은 타깃.

‘오성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의 공인이 그런 의견을 드러낸다면,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미친놈 취급을 받게 되리라.

좌파도 고개를 저을 급진 좌파니까.

그것이 주영주가 꿈꾸는 ‘바람직한 세상’이라니.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25년 전의 주영주는, 그저 대물림되는 가난과 심판받지 않은 과거사 정도에 대해서만 열성적으로 논설했었다.

그런 그녀가 아나키즘을 논하고 있다.

개혁의 바늘이 눈곱만치도 스며들지 못한 시절의 검찰에서, 그리고 개혁파조차 아주 중도적인 주장만을 혁신으로 포장하는 보수당에서 웅크린 세월 동안……

짓눌린 순수는 용암이 되어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건 알아요. 너무 잘 알아요. 인간은 이상적인 존재가 못 되죠. 애들이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리거나 말거나, 그저 자기 등 따뜻하고 자기 배부른 것에 만족하며, 위대한 오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폰을 찬양하는 족속이니. 그래서 당연해요. 동반자살한 가족 뉴스가 한 달에 두 번꼴로 나오든, 해년마다 3천 명 이상이 생활고로 자살하든, 코로나가 창궐하든 뭘 어쩌든, 있는 것들은 돈을 벌며 파티를 벌이죠. 지금도 세입자들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 임대료 올리며 200원 오른 최저임금을 욕하라 외치거든요. 대단하죠?”

“영주 씨.”

“부동산 성장 주춤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목소리 높이는 자들에게, 단돈 몇백만 원 때문에 벌어진 살인사건은 남의 일이에요. 그냥 이렇게 말하면 돼요. 정부가 복지 사각지대를 메우지 못한 탓이다! 복지정책 하나하나마다 핏대 세워 반대한 게 누군데? 거지 같은 부양의무자 제도 폐지할 마음 없는 기득권 대통령들한테 선거자금 바쳐댔던 놈들이 누군데? 그 천민자본주의의 부조리 위에서, 대체 뭐가 나아질까요?”

주영주는 고개를 흔들고 이마를 짚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이, 나지막이 마음을 이야기했다.

“참았어요. 올라가기 위해서요. 대민 씨가 말한 대로, 아래에서는 뭘 해도 의미 없는 게 사실이니까요. 잘도 참았어요. 팔순 부모 모시는 60대 노인이 고기 한 근을 훔쳐서 기소했고, 며칠을 굶어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는 고물상이 당근 두 개를 훔쳐서 벌금을 구형했어요. 그리고 몇억씩 몇십억씩 횡령한 기업인들을 유려하게 놔줬어요.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린 부장검사는, 그날 회식 자리에서 저한테 블루스를 권했죠. 도우미 값 아꼈다면서 엉덩이 주물럭거리던데요.”

“……예.”

“이제는 충분하겠다 싶을 때 집어던졌어요. 벤츠 사건 덕분에 이름값이 꽤 올랐거든요. 그래서 기대주로 입당하긴 했는데…… 그쪽에서도 할 일은 대동소이하더라고요. 공천권 가진 어르신 계신 호텔로 가요. 가보면 무슨 주지육림이 따로 없죠. 거기서 술도 받아먹고 춤도 추고, 기쁨조 노릇을 해요. 얼굴 벌건 늙은이들이 아이고 잘한다 해주면 된 거예요. 그나마 이쪽에선 여자가 편하데요. 별다른 무기 없는 사내들은 돈도 갖다 바치고 개처럼 기어 다니기도 하고……. 그 비루먹은 과정을 거쳐서 당선됐어요. 이제 좀 올라왔다 했는데, 그래서 내 사람들을 만들 수 있겠다 했는데, 이건 뭐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냥 다 하향식이에요. 토의도 없고 표결도 없어요. 그저 위에서 넌지시 눈치 주면 우르르 가서 찍고, 몸싸움하고, 인터뷰든 뭐든 자의적인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예.”

“그렇게 조직적으로 한 짓들이 뭐였는지는…… 아시죠? 그간 뉴스 보셨으면 아시겠죠. 민중을 수호한다는 검찰이나 민의를 대변한다는 정치인들이나 다 똑같아요. 촘스키가 세계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아본들 뭐 해요. 인간에게 유토피아는 오지 않아요. 사실상 개돼지 수준의 시민성이라서.”

따뜻하고 차가운 이야기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는 이 냉소로 버텨왔던 것이다.

인권과 공존에 흥미가 없는 사유재산의 향락자들 속에서 이상을 파묻으며 살아온 20년은…… 나 때문이었다.

꿈은 있으나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국회의원 따위 될 생각도 없었다.

그랬는데, 인권을 유린당하고 일상을 파괴당하며 위를 향해 달리게 됐다.

정치가 뭔지도 모르던 이상론자의 한마디 때문에.

“……뭐야. 동정하시는 거예요? 참 너무하신다니까. 이제 와서 연민의 시선을 보내시면…… 전 뭐라고 해야 하는 거죠?”

“미안합니다. 계속 경청하지요.”

“네. 그래서 이상적인 세상은 이미 포기했어요. 체제를 유지하고, 욕심꾸러기들의 사리사욕을 충분히 보장해주며, 부동산 투기건 민영화건 공익성 규제건 다 풀어주면서도, 조금은 더 도덕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생전에는 이데아를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본의예요.”

그렇게 말한 뒤, 주영주는 코를 훔치며 아내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주희 씨한테는 많이 불쾌한 이야기였죠?”

“……괜찮아요.”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이렇다니까요? 조금만 마음이 풀어지면 욱하고 얘기들이 튀어나와서…… 이러니까 라이브 방송은 무리예요. 절대 안 될 거예요. 그런 건데, 대민 씨? 어때요? 이런 저라도 소통하는 방송을 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 미디어에 녹화방송만 트는 거면, 사실 소통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잖아요. 기조에 안 맞을 거예요.”

정말로 욱하는 마음에 마구 말했을 리는 없다.

이미 20년 동안 기득권 사이에 스며들었던 사람이니.

그저 내게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순진하고 정의로웠던 자신에게 무저갱(無底坑)을 경험하게 만든 박대민에게, 그 괴로움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리 보좌진을 내보낸 것도 그래서였겠지.

그걸 알기에 마음이 참담해졌다.

횡령과 직권남용으로 구속된 두 대통령 아래에서 범죄를 보필해온 이에게,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절망한 이에게 설득은 무의미하다.

“……말씀이 없으시네. 그러면 일단 그 건은 캔슬인 걸로 알고, 제 본론도 말씀드릴게요. 대민 씨, 입당하세요.”

“입당……이요.”

“네. SNS상에서 청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시대의 멘토. 직장생활도 오래 하셔서 중장년층에게도 인기를 끌 만한 이력. 당에서 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어요. 말씀하신 인터넷언론까지 잘 정착한다면, 상담은 그만두시고 썰전 같은 방향으로 나가보세요. 제가 힘 보탤게요. 다음 총선 때 비례대표 10번 안쪽에 공천되실 수 있게요.”

아내가 입을 떡 벌리고 옷깃을 잡아당긴다.

다만 내게는, 그것도 썩 반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셨어요? 얘기가 빨라서 다행이네요. 맞아요. 제 필요성이기도 해요. 20년을 바쳐서 스타성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당내 입지는 좁죠. 보수적인 이 당에서는 쉽사리 대권에 도전하기 힘들어요. 확실한 카드가 필요해요. 그런 면에서 대민 씨는…… 외모가 워낙 젊으셔서 노인층 표까지는 어렵겠지만, 행보 하나하나가 청년층을 움직일 만하죠. 2024년 총선에 나란히 이름 올리고 나서, 그다음 대선. 그때라면 가능성이 있어요. 협력해주세요.”

“협력이라고요.”

“네.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영주 씨가 대권을 잡는다면, 바람직한 세상이 오겠습니까?”

“물론이죠. 절 믿으세요, 대민 씨. 국가를 넘어 세계 빈민을 착취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서도, 잘 참을 거예요. 미국이든 중국이든 고개 숙일게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부패한 세력들에게 설설 기고, 부정한 청탁에도 고개 끄덕이며, 아주 조금씩만 바꿀게요. 그냥…… 굶어 죽는 사람은 없게.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은 없게. 그것만이라도 하고 싶어요. 대민 씨가 도와주신다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내는 이미 손을 떨기 시작했다.

내 손 역시 조금쯤은 떨리고 있다.

설렘이 아니라, 자책과 분노로 인해서.

“될 리가 없잖습니까? 한심해서 원.”

눈을 부릅뜬 주영주를 보며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말했던 마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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