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52장 - 바람직한 상담사 (1)
오랜만에 서울대에 찾아온 진대수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협찬받은 엘피 코트를 펄럭이며 초여름을 만끽하더라.
그러다가 내 첫마디에 퍽 당황했다.
“엥? 인터넷언론이요?”
“그래. 가십과 어뷰징으로 점철된 언론계에 대안을 제시해주고 싶다. 순수하게 애독자들의 구독료로만 운영되는 인터넷언론. 조회수가 아니라 기사의 질을 평가하는 언론. 그 기획에 대해서 신방과 출신인 네 조언을 얻고 싶어.”
“어…… 응? 에…… 호? 후음…….”
해괴한 소리로 신음한 끝에, 고개를 휙휙 젓더라.
“안 되죠. 안 돼요. 아무리 형님 팬덤이 짱짱해도, 인터넷언론 후원하게 만들기는 미션 임파서블. 왜, 오마이뉴스라고 있잖아요? 진보 계열에서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뿌리를 내려온 인터넷언론인데, 거기서 경제적 자립으로 양질의 기사만 쓰겠다며 10만양병설…… 10만인 정기구독을 외쳤거든요? 근데 그게 지금…… 최근에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만 명도 안 됐어요. 딱 거기까지예요. 진보는 여전히 한줌단임다.”
“음. 일단 진보 계열 언론을 만들고자 함은 아니야.”
“앗. 그렇다면 설마 포스트 조중동?”
“그 설마도 아니고.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대안언론이다.”
“대안…… 중립 말씀이시죠?”
“중립이 아닌 대안. 지금 그리는 그림은…… 첫째는 이거야. 메인페이지 최상단에 바로잡기 기사가 뜨는 언론. 우리 기사건 남의 기사건, 오류, 명예훼손, 가짜뉴스를 바로잡아서, 그에 대한 사과문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언론.”
“오? 그건…… 어그로는 쩔겠는데요?”
그럴 것이다.
어느 언론 메인페이지 가봐도 조회수 나올 만한 이슈들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시대니.
다른 언론의 기사들까지 바로잡으며 대신 사과하는 언론이라고 하면, 네티즌에게 호기심을 주기엔 충분하리라.
“하지만 형님, 딱 거기까지일 것 같은데요? 호기심에 들어와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 갖고 후원을 하진 않을 듯요.”
“그래. 핵심적인 플랜은 다음이야. 각 기자들에게 자기만의 페이지를 만들어주려고 한다. 기사와 취재 영상 등을 일관성 있게 게시할 수 있는 각자의 뉴스룸을. 물론 레이아웃 면에서는 화제의 기사나 편집국 추천기사 링크도 주요하게 삽입되겠지만, 그 외에는 기자 개개인이 에디터가 되는 거지.”
“엥……? 그러면 그거, 약간 커뮤니티처럼 되는 겁니까?”
“그렇지. 분야별 전문가들에 의한 뉴스 커뮤니티. 단방향이 아닌 양방향 언론. 각 사안에 대해 네티즌이 쓴 첨언들을 에디터가 직접 피드백해주는 거다. 독자들의 구독료도 그 개별 채널로 지급될 거야. 그런 직접관계를 통해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여가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반향이 있지 않을까?”
“와우. 역시 프리챗의 창시자다운 발상.”
“창시자까진 아니고……”
“맞잖아요? 기획부터 레이아웃까지 다 형님이 짠 거라고, 갑수 형이 칭찬 많이 했었음요. 자기가 이상한 짓거리로 말아먹지만 않았으면 지금도 최대 커뮤니티 유지했을지 모른다고. 뭐 이제는 한물간 포맷이라고도 했지만.”
한때 대한민국 인터넷 커뮤니티를 지배했던 프리월드의 프리챗은, 내 작품이었다.
그 특장점은 철저한 양방향 소통.
‘free chat’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용자들의 의견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서 애썼다.
진갑수의 무관심과 몰이해가 그 근간을 무너뜨리긴 했지만.
물론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후발주자로 난립했던 커뮤니티들이 모두 사장돼가고 있다.
이제는 뭘 새로 만들어본들 조용히 묻히리라.
하지만 뉴스라면 얘기가 다르다.
유튜브 등에서는 신생 언론이 점점 더 수익을 내고 있다.
글이 아닌 영상 클립을 위주로 한 신개념 언론의 대두였다.
“프리챗의 몰락에서 많은 걸 배웠어. 이번에 만들 커뮤니티는 그렇게 되게 두지 않아. 영상언론 시장을 뚫을 셈이다.”
“역시. 아무래도 그게 정답이겠죠?”
“그래. 문자언론이 사장되고 영상언론이 대두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야. 첫째는, 문자열 페이지를 불편해하는 Z세대의 특성. 둘째는, 대중의 호기심에 민활하게 반응해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대는 젊고 자유분방한 게시자들. 그런 환경이 낚시뉴스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현대의 언론환경을 만든 셈이겠지. 그걸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어. 내 그림은 이거다. 각 페이지에 올라오는 기사 영상마다 일시정지 상태에서 동기화된 댓글을 달 수 있게 할 거야. 그게 영상 아래가 아니라 영상 내부에, 반 실시간으로 PIP 되는 방식이다.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누구든지 정정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시청자를 뉴스 제작 과정에 포함시키고 싶다.”
“와우. 니코동처럼요? 그거 재밌겠네요.”
일본 니코니코동화의 특색인 리얼타임 코멘트 시스템.
거기서는 시청자들의 채팅이 영상 위를 날아가는 문자열로 오버레이(overlay : 덧씌우기) 된다.
혐한 재특회 등의 근거지로 전락한 플랫폼이지만, 시스템만큼은 배울 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예능에 웃음소리가 깔리는 것과 대동소이.
우스운 장면이 나왔을 때 ‘ㅋㅋ’가 날아가고, 무서운 장면이 나왔을 때 ‘ㅗㅜㅑ’가 날아가는 식이다.
그로써 남들과 함께 시청하는 듯한 몰입감이 형성된다.
다만 거기서 그치기엔 아까운 시스템이었다.
종이신문은 물론 인터넷언론조차 사실상 단방향 서비스.
댓글 기능이 있다지만 악플의 온상일 뿐이다.
어지간히 사회적으로 관심을 끄는 사안이 아니면, 그 댓글조차도 잘 달리지 않는 것이 실상이고.
물론 유튜브에 판치는 영상뉴스들에는 댓글도 많다.
연예인의 가십이나 이미 정정보도된 가짜뉴스를 자극적인 워딩으로 편집한 영상들이기에.
그것들이 호기심 넘치는 네티즌에 의해 SNS에 공유되며 루머를 재생산하고, 자연히 댓글 역시 무수히 달리지만……
정정 기능 면에서는 유명무실한 측면이 크다.
점화 효과(priming effect) 때문이다.
인간은 먼저 제시된 자극에 더 쉽게 공감한다.
영상을 다 보고 나서 접한 댓글에는, 인지부조화를 막기 위해 무의식이 반감을 쥐어짜기 마련.
애써 작성한 정정 댓글이 베스트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시청자는 많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동일 시점이라면 어떨까.
뉴스를 시청하는 동시에 댓글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신도 영상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다면.
일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반대 관점의 댓글을 보며 중립적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댓글 참여자들은 스스로 뉴스의 오류를 교정함으로써 유능감과 자기효능감을 얻을 수 있다.
뉴스 제공자 역시 자기 기사에 대한 피드백을 빠르게 확인함으로써, 좀 더 정확한 취재를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런 변혁의 언론.
점화 효과에 잠식된 대중이, 과거 밥상머리에서 함께 TV를 보며 토론했던 것처럼,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니코동처럼 ‘탄막’ 같은 형태는 아니야. 티비플의 ‘구름’ 형태가 적절하겠지. 더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이 보다 오래 표시되는 형태라면 더할 나위 없을 거고.”
“흐으음. 이건 좀 먹힐 것 같은데요? 오키요. 혹시 세 번째 플랜도 있슴까?”
“있긴 하데…… 이건 확신이 잘 안 선다. 우리 크루 멤버들에게 참여를 독려해보면 어떨까? 호정이나 보람이는 음악산업에 지식이 많고, 진석이는 예능 쪽으로 인맥이 넓고, 뜨갱이는 의외로 사업체 쪽에 관심이 있고. 그런 식으로 각기 파트를 나누고, 기자들과 팀을 짠 합동채널을 권장할까 생각 중이야. 그 아이들 팬덤을 끌고 온다면 초기에 바이럴마케팅이 될 테니까. 하지만 참여할 의욕이 있을지 모르겠네.”
“페이지뷰만 나온다고 하면 참여는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걔들 입장에서도 뉴스 커뮤니티라는 신선한 채널은 새 팬 유치에 도움이 될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기사 클립들이 프리TV에 저장된다는 얘긴데.”
“그래. 그 문제로 갑수 형과 몇 차례 통화했다. 지원은 부족하지 않을 듯해. 그쪽에서는 기업이미지 증진이란 측면에서 손 안 대고 코 푸는 이득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겠네요. 영상을 주축으로 한 대안언론에…… 거기에 커뮤니티 기능까지 있다고 하면, 프리TV는 얻을 게 많죠. 장년층 이상에서 상당히 이미지 증진이 되겠고…… 유튜브의 국산 대항마라는 포지션도 강해질 거고요. 반대급부라고 해봐야 리얼타임 코멘트 기능 만드는 거랑 남아도는 서버 제공하는 거 정도니까, 사실 별일도 아니죠. 잘만 하면 유튜브로 뉴스 보는 수백만 폰티즌을 상당수 흡수해서…… 흐음.”
대수는 잠깐 코를 긁적이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 뒤에, 손을 코 위에 올리며 결론지었다.
“엔딩이…… 보였다!”
“……엔딩?”
“이건 되겠다는 거죠. 조중동 수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디오머그 레벨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문제점만 보완하면요.”
“한 가지 문제점?”
“예압. 엑소더스입니다. 초기에는 참여형 미디어라는 특성이 모든 계층의 관심을 부를 수 있겠지만, 점차 특정 계층이 헤게모니(주도적 패권)를 형성하게 될 거예요. 아무래도 젊은 백수들이 여러 채널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야 점점 한쪽 시각만 넘쳐나게 돼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짜증나서 꺼버리는 경우가 많겠어요. 대안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겁니다. 형님이 바라시는 게 그런 모양새는 아니죠?”
“물론,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야.”
“에구. 그 대사 생각나네요. 대중은 개돼지입니다. 그들은 술자리, 인터넷에서 씹어댈 안주거리가 필요할 뿐입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저게 영화 <내부자들> 속 주간의 말이랬나.
현대 언론이 추구하는 왜곡된 이상향을 잘 드러낸 대사다.
또한, 인간 본연의 어두운 속성 역시.
“그래. 인간은 입맛에 맞는 뉴스를 선호해. 유튜브에서 진실과 무관하게 자극적인 소리나 하는 편향성 뉴스들이 판을 치는 게 그래서겠지. 제일 어려운 문제겠구나.”
“제일 어렵긴 한데, 또 제일 쉽기도 합니다. 프로파간다(선동)는 양면성을 갖는 법이거든요.”
“프로파간다가 양면성을 갖는다……?”
“옙. 이거 꽤 재밌는 얘긴데요, 북한에서 대남 비방용으로 선전 영상 많이 만들었었잖아요? 근데 그게 역으로 작용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겁니다. 들어보셨죠?”
“아, 그래. ‘남조선 인민들이 미제의 압제에 괴로워한다’면서 송출한 촛불시위 영상에서, 우리 시위대가 혈색도 좋고 옷도 액세서리도 고급스러운 것만 착용하고 있던 게 은밀한 화제가 됐다지. 그로 인해 되려 탈북이 가속화됐다고.”
“맞습니다. 저 대학 다닐 때 제일 열심히 공부했던 소재기도 한데…… 그걸 한번 써먹어보죠.”
“그걸 써먹는다니?”
“어떤 진영에서든 볼 수밖에 없는 셀럽을 초빙하는 겁니다. 대중이 개돼지처럼 입맛에 맞는 것만 원한다면, 누구 입맛에나 맞을 사람을 쓰면 되죠. 그러고 나서 댓글 관리만 철저하게 한다면 충분히 장기적으로…… 근데 이거 누가 진행하게 되는 프로젝트예요? 설마 저한테 시키실 건 아니죠?”
디렉터 찐데스는, 내 영상 편집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을 얼굴 가득 피력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동료를 소개했다.
가짜뉴스를 참회하며 죽음을 갈망했던 유하늘.
옆 테이블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아, 안녕하세요…… 유하늘이라고 합니다.”
“오, 유 스카이? 반가워요. 전 진대수요.”
“아, 네, 네.”
“흠. 하늘 씨는 원래 기자 하셨던 분?”
“네. 항상인포 연예부에서 근무했어요.”
“항상인포 유하늘……? 아, 우리 형님 기사도 쓰셨었죠? 기억나네. ‘개인 SNS 없는 대형 스트리머’ 특집이었나.”
“네…….”
“어디 뭐, 신방과 나오셨고요?”
“어…… 관련 학과 다니다가…… 중퇴했어요.”
그 말까지 들은 대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접때 말씀하신 연언홍 중퇴가 쟤예요?”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니?”
“뭐…… 졸업장이 중요하진 않겠죠. 개개인이 에디터가 된다면, 대표는 국장이나 주간이 아니라 사업자 개념이니까. 그냥 신뢰할 만한 인재인지를 모르겠네요. 형님이 뽑으신 사람이라면 물론 이유가 있겠지만……”
“신뢰해도 된다. 목숨 걸고 일할 아이야.”
“와우. 뭐 목숨까지 걸 필요야 있겠슴까?”
필요는 몰라도, 유하늘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죄책감이니까.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할 때, 인간은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열심히 일할 거란 뜻이야. 중퇴 뒤로 쭉 인터넷언론에서 일해서 경력도 충분하고, 젊어서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 진실한 뉴스를 전하겠다는 사명감이 있어. 저 친구여야 된다.”
“예압. 형님 말씀 옳은 말씀. 하늘 씨? 오키여. 전 지방대긴 하지만 신방과 졸업자니까, 하늘 같은 선배로 모시세요.”
그렇게 유하늘과 인사를 나눈 뒤.
마침내 진대수가 자신의 플랜을 털어놨다.
“자. 지금 중장년층에게는 아이돌이 한 명 있슴다. 아시죠?”
“……미스터트롯 말이니?”
“아니, 연예계 말고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사랑받는 소장파 의원이 한 명 있죠. 하늘 씨? 정치 쪽으로는 좀 아세요?”
“아, 저, 네. 저, 주영주 의원 말씀하시는 거죠?”
“캬, 정답입니다.”
“우와…… 그분이 하신다고 하면 엄청 화제가 될 텐데…… 절대 안 하시지 않을까요? 시청자들 댓글이 영상에까지 올라가는 플랫폼이면, 유튜브에 비해 리스크가 클 텐데요.”
“일단 그분 성향 자체가 소통하는 방향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형님이 추진하시는 프로젝트니까요. 그렇죠, 형님?”
능글능글한 대수의 웃음과, 동그래진 유하늘의 시선 속.
나는 가만히 주영주에 대해 생각했다.
보수당의 초·재선 소장파를 이끄는 3선 의원이다.
개혁적인 성향 탓에 극우파에게 욕을 먹고, 적폐 논란의 당색 때문에 극좌파에게 욕을 먹기도 하지만, 그 스타성은 이미 정치 이념을 막론하고 있다.
적어도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는 전무(全無).
그런 인물이 새 인터넷언론에 자신의 페이지를 개설한다면, 그때의 화제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
다만 나로서는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문제였다.
“음…… 문제는 득실인데. 특정 정당의 정치인을 메인으로 내세운다면, 언론으로서의 가치가 퇴색되지 않을까?”
어렵사리 건넨 질문에, 유하늘이 입을 떡 벌렸다.
“아, 그, 그게 문제인 거예요? 허락은 기정사실?”
“기정사실까지는 아니다만-”
“기정사실이죠. 애초에 형님 때문에 정치 하신 분인데.”
“어흠. 꼭 그런 건 아니래도.”
“아무튼요. 하늘 씨는 몰랐어요? 정계에선 꽤 이슈였는데. 대민재단에 사재를 1억이나 쾌척하셨거든요.”
“우, 우와…….”
“그런 것도 있고, 마침 오늘 만날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하늘 씨도 갈 거죠? 주영주 의원까지 참석하는 대민재단 첫 행사에, 빠지시면 곤란해요.”
유하늘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어가는 분위기 속.
과거의 인연과 마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아, 한참 일 시키고 나서야 보러 오시네요? 너무하셔.”
주영주는 장갑을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 손톱에 누리끼리한 진흙이 끼어 있다.
6월 1일을 맞아 열린 대민재단의 첫 후원총회가 보훈요양원 자원봉사와 결부된 까닭.
덕분에 한효준을 비롯한 교수들까지 텃밭에 쪼그려 앉았다.
교수들의 인맥인지라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여한 행사다.
요양원 앞에서부터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하지만 그 모든 관심을 더해도 이 한 사람의 이름에 못 미쳤으리라.
“영주 씨…… 미안합니다. 인사드려야 할 분들이 많아서요. 아무튼…… 오랜만에 뵙네요.”
“정말요. 24년 만이네요. 근데 참, 그때나 지금이나.”
“음. 운이 좋아 동안이 되었습니다.”
“아뇨, 얼굴 얘기가 아니라 하시는 일요. 참 대단도 하세요.”
썩 대단한 일은 아니다.
기왕 열 후원총회를 의미 있는 일로 만들고 싶었을 뿐.
나이차가 크지 않은 보훈유공자들을 만나는 일은, 전후의 참상을 보고 들은 후원자들에게 오히려 호응을 받았다.
어느 정도는 기자들의 이슈화를 생각한 까닭도 있겠지만.
주영주 역시 그 이슈화를 필요로 할 인물이다.
인도적인 측면이 훨씬 더 중요하다곤 해도, 보훈유공자들과의 관계는 보수적인 시민들의 호의를 끌기 좋은 요소니.
그렇기에 참석하겠다는 연락에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만나본 결과가 이렇다.
주영주는 장사진의 기자들보다 내게 더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행사 내용에 대놓고 투덜거렸다.
“이게 뭐예요, 이게. 연회 차려놓고 대접하는 후원의 밤도 모자랄 판에, 냅다 일만 시키고. 이러면 누가 후원을 해요?”
“……할 사람은 하겠지요. 그보다, 누가 듣습니다.”
“다들 땀 빼고 일하는데 들리겠어요? 그쪽 뒤에 분들이야 대민 씨 일행이고. 안 그래요?”
“네, 네…….”
“물론입니다. 신경 쓰지 말고 대화하세요.”
유하늘과 손바울이 각자의 색깔로 대답한 뒤.
뺀질거리며 두 사람에게 일 시키던 진대수가, 주영주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반갑습니다, 의원님. 제가 박 선생님 비서 진대수입니다.”
“아, 그래요-”
“아닙니다! 수행비서는 접니다. 손바울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흠. 아무튼 일이 이렇게 돼서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아무리 말려도 저희 선생님께서 워낙 완고하셔서요. 돈만 달랑 보내는 후원자라면 필요 없다고, 실제로 땀을 흘려야 된다고.”
“그래요. 참 대단한 분이시네요. 뭐라고 말도 못 하겠지 뭐야. 설립자 본인에, 그 아내인 이사장님까지 일하고 계시니.”
텃밭 가꾸기 봉사를 총괄하는 아내는……
지금은 쪼그려 앉은 채 이쪽을 째려보고 있다.
아마 무슨 얘길 나누고 있는지 궁금한 거겠지.
가능한 짧게 마무리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영주 씨. 혹시 유권자들과의 소통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럼 없겠어요? 쓸데없는 걸 묻고 그러셔.”
주먹을 움켜쥐는 손바울에게 손을 휘저어 보였다.
저 녀석에게야 불쾌한 대꾸겠지만, 내게는 사소한 투정일 뿐이기에.
110의 ‘진단’은 대부분의 감정을 꿰뚫어본다.
“현재 프리월드와 연계해 전문가 기자단이 영상을 통해 소통하는 인터넷 미디어를 기획 중입니다. 그 내용이 3선 의원인 영주 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일 마친 뒤에 식사를 대접하며 말씀드릴까 합니다.”
“……도움이 된다. 표현 재밌네요. 전 그런 말이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게 다예요? 나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끝?”
뜻밖의 대답에 고개가 기울여졌다.
저 표정은, 불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진단’으로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뭔가 큰 기대를 배신당한 듯한……
불현듯 과거의 한 장면이 플래시백 됐다.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백골단의 곤봉에서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 나에게, 주영주는 무엇을 이야기했던가.
“……바람직한 세상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하. 그러면 가야죠. 궁금하네요, 그 바람직한 세상.”
그때 주영주는 말했었다.
바람직한 세상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