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07화 (107/200)

# 107

39장 - 상담사와 연애 (3)

“참 훈훈한 커플이었지?”

내 질문에, 대수는 평소처럼 히죽 웃어 보였다.

“아, 그러니까요. 이게 이렇게 갈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장면이 나와버렸어. 이건 레전드 각이에요. 준나 커플로 실검 장악해서 또 8만 찍어버렸으니까. 보람이 수철이 용식이 형 다 넘어서, 이번 건 무조건 500만 찍을 것 같슴다. 이별 생각하던 BJ 커플이 단숨에 프로포즈까지 가게 만드시다니, 진짜 짱짱!”

“……그게 다야?”

“엥? 그게 다죠? 하하. 형님, 이 좋은 날 왜 표정이 그러세요? 기뻐하셔야죠? 제가 턴테이블로 풍악 좀 울립깝쇼?”

“대수야. 태준이 보면서 느끼는 게 있었잖아.”

“느끼는 거요? 아 많았죠. 이런 개자식! 아파트도 있고 여친도 돈 잘 버는 놈이 뭔 고민이 그렇게 많아? 우리 후원자들이 양극화 현상에 눈물을 흘리겠구만! 이랬죠, 하하.”

“너도 마찬가지잖아, 대수야. 지금도 대출 끼면 아파트 충분히 구할 수 있고, 시내 씨만큼 돈 잘 버는 아이가 널 많이 좋아하잖아. 같은 상황 아니야?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가?”

대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 그런 면도 있긴 하려나. 근데 전 괜찮아요. 그런 거 말고 미래를 보죠. 뉴스는 무조건이고, 예능은 뭐 잡을까요?”

웃으며 말을 돌리려는 청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연애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

내가 간섭해도 되는 건, 어디까지나 계기 정도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물러나야 옳으리라.

그렇지만 대수는 내게 특별한 사람.

이 아이의 고민 하나 해소해주지 못하고서야, 대체 무슨 자격으로 상담사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생각으로 마침내 결심할 수 있었다.

[완전한 공감]을 사용할 시간이었다.

“대수야. 넌…… 은진이를 참 좋아해. 은진이 역시 마찬가지야. 그간 통화만 몇 번 했지만, 금세 알겠더라. 너도 알고 있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에게 계속 선을 긋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거니?”

“에이. 형님, 그 얘긴 이제 그만 해요. 진짜로요.”

진지한 말을 하면서도,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이는 대수.

내 의식이 곧 그의 마음속으로 침잠했다.

형님도 참, 뭘 또 이렇게 진지하게 캐묻고 그러시나.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일인 건데. 걔한테 내가 가당키나 하냐고.

형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야.

레알 문제지.

이러니까 뭐라고 말을 꺼낼 수도 없잖아.

사실을 알면, 분명히 경멸하실 텐데.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갑수 형 찾아가기 직전에, 머리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그 녀석한테, 진짜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냐고 추궁하고 싶었던, 내 씨발 개좆 같은 마음을.

이기적인 거짓말쟁이 새끼.

전부 거짓말이었어. 믿는다고 한 것도, 갑수 형한테 얘기하면 다 잘 해결될 거라고 했던 말들도.

선의의 거짓말? 선의는 개뿔. 그냥 무서웠던 것뿐이야. 내가 모르는 은진이가 있진 않을까, 겁에 질려 있었을 뿐이야.

이런 날 잊지 못하겠다는 은진이는, 진짜 바보지.

나는 안 돼.

난 저 형님처럼 진심으로 사람을 믿을 줄 모르는 놈이야.

아니지. 형님하고 비교할 것도 없지. 차라리 당당하게 못 믿겠다고 말했던 갑수 형이 나보다 훨씬 나아.

그런 내가 곁에 있어봤자 은진이는 계속 상처만-

……의식이 돌아왔을 때, 진대수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자책으로 스스로를 비하하며.

입이 절로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수야. 넌, 착각하고 있어.”

“엥? 뭐가요?”

“난…… 그 사건 때, 은진이를 인간적으로 믿었던 게 아니야. 그저 내 머릿속 알고리즘으로 분석해봤을 뿐이야. 그 아이가 누군가에게 돈을 뜯어내고 배신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오……?”

“그러니까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주렴. 사실인지 아닌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심지어 그 본인조차도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이 있었는지 고민했을 정도잖아. 거기서 작은 의문을 가졌다 해서, 그게 자책해야 할 일은 아닌 거야.”

“와우. 그걸 맞추시네? 역시 셜록꼰즈. 모든 걸 아시네요.”

그제야 흠칫해서 말을 멈출 수 있었다.

이런 멍청한 짓을.

감정에 치우쳐 부주의하게 접근하고 말았다.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함부로 추론할 일이 아닌데.”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신기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그때도 그러셨잖어요. 혼전순결, 그걸로 은진이 거절한 거냐고. 떠보듯이 물어보신 게 아니라 거의 확신하고 계셨던 거 같았는데. 거기다 오늘도 한태준 반지 맞춰버리셨죠? 아예 노대본이었는데 말이야. 진짜 독심술 하세요?”

NBSC의 비밀인 까닭에, 하릴없이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이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야 했던 이야기인데.

한순간의 실수로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다만, 그 일침에 진심이 가득하진 않았던 모양.

대수는 씩 웃으며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저도 불쾌하셨다면 죄송요. 그냥 전 아직……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슴다. 형님 생각대로 자격지심이 메인 문제인 건 맞는데…… 그냥 마음이 좀 그래요. 은진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요. 도저히 안 될 것 같어요.”

부지불식간에 움찔거리는 대수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사업의 실패보다도 무거운 마음의 짐으로 인해, 사랑의 행복 앞에 거칠고 깊은 해협을 두른 아이.

울돌목의 조류 앞에서 대화는 평행선이다.

이순신에 이르지 못한 나는, 배설처럼 진중에서 물러섰다.

“그래, 그랬구나. 하지만 어쨌든 내일은 같이 얼굴을 좀 봐줘야 될 것 같다. 기억하고 있지?”

“아…… 그 개인전이요? 거기 은진이도 부르셨어요?”

“그래. 어머니 모시고 와달라고 부탁했어. 외로움 많이 타신다고 했잖니. 문화행사도 보시고 하면 좀 도움이 될 거야.”

“그러면 뭐…… 엄마도 볼 겸 형님 모셔야죠.”

“고맙다.”

“고맙긴요. 아무튼 오늘은 이쯤 할까요? 워낙 옵션이 많아서 형님도 따로 살펴보셔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일찍 돌아와서 회의하는 걸로 해요. 그럼 형님, 아디오스!”

대수는 끝까지 실실거리며 원룸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아는 나로서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간 별다른 관심을 기울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연애의 고민이란 수백만 청년들의 일상이고, 그렇기에 사연이 올라와도 유쾌한 상담으로 답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잘것없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특별한 경험이기에.

대부분의 아이가 멀쩡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시대지만, 어린 시절에 그 유대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가정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처지들이니.

작은 새장 속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것이 아이의 본질인지라, 교우관계의 갈등과 해소에서도 바뀌는 것은 표면뿐.

그런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연애다.

인간을 은하에 빗대자면, 이것은 최초의 은하충돌.

사랑은 말 그대로 서로에게 빠지는 일이다.

본능적인 끌림으로 정신과 육체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연애 속에서야말로, 우리는 진짜 소통을 경험하게 된다.

그 교류의 가장 커다란 소득은, 다름.

유전과 환경으로 인한 개인차는 내면으로 갈수록 커진다.

자연히 전혀 다른 상식이 넘쳐날 터.

그것을 편견 없이 바라보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에,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는 건 그러지 못했을 때다.

병합된 은하의 분리 과정은 잔재를 남긴다.

정신병리적으로 보자면 트라우마라고 해도 되겠지.

PTSD까지 진단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슬픈 이별을 경험해본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 기억으로 눈물짓곤 한다.

워낙 보편적인 일이기에 병원을 찾지 않을 뿐.

많은 경우 이별의 경험은 부정적인 추동을 만든다.

대표적으로 현 세대의 화두인 혐오는, 대부분 가족역동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부적절한 은하의 분리 때문일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수는……

연애나 다름없던 유대관계를 거짓말로 청산하며,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됐다.

그 자기혐오가 어떻게 건강하다 할 수 있으랴.

나는 동반자의 괴로움을 오래도록 외면해왔던 것이다.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되지.

내 곁의 사람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변혁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첫걸음은, 주변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박중민 개인전의 리플렛을 펼쳤다.

표지에는, 피카소와는 또 다른 추상적인 느낌의 인물화.

그 녀석 설명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얼굴 위에 그리려고 노력했다는 듯했다.

솔직히 문외한인 나로서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시작해야지.

박중민의 첫 개인전 속에서 여러 마음을 마주하자.

그럼으로써 그들이 멋진 우주로 나아갈 수 있게 돕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의 우주로 귀가한 직후였다.

“여보! 왔어? 얘 박지수, 빨리 아빠한테 말씀드려.”

“아 왜. 아…… 안 말할래.”

“얘가 진짜. 여보, 지수 고백받았대.”

“어, 어? 그게 정말이야?”

“아, 말하지 말라니까!”

“시끄러워. 여보, 그게 누군 줄 알아? 진호래. 유진호.”

“뭐? 진호라면, 설마, 종위보육원 진호?”

“그래! 얘가 어쩜, 누굴 닮았는지 중3 오빠를 홀려버렸네.”

이토록 충격적인 소식이 또 있을까.

당혹감과 염려 속에서, 나는 아내를 신중히 관찰했다.

“저…… 주희야. 이 문제는 그러니까…… 참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우선은 간섭할 일은 아닌 듯해.”

“누가 뭐래? 간섭 안 해. 지가 알아서 할 일이잖아. 그런데 얘가, 받아줄 것 같아서 그래.”

“아 뭐래! 내가 언제 받아준대?”

“니 표정이 그래 보이거든? 진짜 걱정돼 죽겠어.”

“어, 주희야? 그러니까 이건…… 걱정할 일은 아니잖아?”

“걱정할 일이지! 당신 딸 몰라? 센 척하느라 생각하는 거 바로바로 입 밖에 내버리는 거? 혹시라도 그 철없는 꼬마한테 상처라도 주면 어떡해? 지금부터라도 교육해야지. 받아주든 거절하든 지 맘이지만, 지하고 전혀 다르게 자란 애랑 어떻게 소통해야 되는지 정도는 당신이 알려줘야지!”

……그 얘기였나.

고아와의 연애를 덮어놓고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진호를 편견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이성으로 감정적 거리낌을 제어하는 나보다도, 한참은 더 나아간 사고방식이었다.

그렇기에 참 멋진 우주다.

나와는 생각의 본질이 다른 사람.

그녀는, 먼지 같던 내 우주의 빅뱅이었다.

*

“10만, 10만을 보자!”

운전석의 대수는 몹시 흥겨워 보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기정사실화하는 게 그리 기쁠까.

“대수야. 아무리 주말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시청자가 폭증하리라고 예측할 수는 없어. 두 번이나 8만 시청자를 돌파한 건 어디까지나 운이었잖아.”

“그래도 10만, 10만을 보자!”

“……대수야.”

“형님. 이건 무조건임다. 이미 평일에 두 번이나 8만 찍었어요. 그게 실검뿌셔 태그뿌셔 하고 있고, 오늘은 트립크루 예고까지 뜰 예정이죠. 그 상황에서 10만을 못 찍겠냐고요. 이건 뭐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이 없죠. 아, 정해진 하니까 정 과장님 생각나네. 이번에 PPL 많이 딴 게 그 형님 덕분도 좀 있을 것 같어요. 담에 제가 술 한 잔 대접하겠슴다.”

“하이라이트 편집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잖아? 그 친구 술은 내가 살게.”

“하핫. 그럼 전 옆에서 얻어먹을게요. 공짜 술이 꿀맛이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지만, 내게는 그의 불안이 보인다.

차량이 이미 홍대 골목으로 접어드는 와중.

마음속 그녀를 만나기 100미터 전이 되어, 뭐라도 떠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인 듯했다.

하지만 그건 110의 ‘진단’을 가진 나라서 알 수 있는 일.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송은진은, 터무니없이 자연스런 태도로 모친을 끌어안는 대수를 보며 그저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 우리 엄마 너무 오랜만이야, 흑흑.”

“오이야, 대수 잘 지냈나? 마이 바빴나?”

“오빠야! 내는 안 보이나!”

“응! 당연히 잘 지냈지. 엄마 밥은? 맛있는 거 먹었어요?”

“그라모. 집에서 먹고 안 나왔겠나.”

“나도 먹었거든! 내는 안 보이나! 엄마 안 놓나!”

유쾌한 재회……라고 해도 되려나.

송은진이 쉽게 주눅 들지 않는 성격인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그들에게서 잠깐 시선을 뗄 수 있었으니.

우리 차 직후에 세단 한 대가 추가로 도착한 까닭이었다.

“……교수님, 오시는 길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불편할 것이 뭔가. 운전은 지연이가 했는데 말이야.”

“김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그런데…… 어? 와! 은진 씨네요?”

“은진이도 아세요?”

“알죠? 선생님이랑 술먹방 했던 거 얼마나 재밌게 봤는데요. 어머님도 같이 오셨네요? 교수님, 교수님도 그거 보셨죠?”

“어흠. 한가할 때 보긴 봤는데, 내 보기엔 썩 재미없었어.”

어쩌면 난장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려 세 쌍의 커플을 염두에 둔 관람이기에.

내 동생과 김지연, 진대수와 송은진, 한효준과 송은진의 모친까지.

그 여섯 명이 동시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시작은 한효준의 귓속말이었다.

“흠. 이봐. 좋은 인연이란 게, 저분을 이름이었나?”

“아, 예. 그렇긴 하지만 오늘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우연은 무슨. 자넨 참으로 못된 자야. 내 오늘은 자리가 만들어지고 말았으니 분위기를 깨지 않게끔 노력하겠지만, 이 문제는 아주 단단히 혼을 낼 게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렇게 콧김을 뿜으며 성을 낸 직후, 누구보다 인자한 모습이 되어서는 송은진의 모친을 에스코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저쪽은 안심해도 되리라.

한효준에게 혼나는 일이야 하루이틀 겪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로 두 사람을 친밀해지게 만들 수 있다면, 몇 번이든 혼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와 유사한 과정이 한 차례 더 발생했다.

문 앞의 소란에 머리를 긁으며 걸어나온 박중민이, 김지연 쪽을 흘끔거리며 내 곁에 다가섰다.

“형. 하…… 진짜, 저분은 왜 데리고 온 거야?”

“흠. 오해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한 교수님 모시기 위해서 대학원 선배에게 부탁했을 뿐이니까.”

“돌겠네. 내가 형 속 모를 줄 알고? 일단 이렇게 된 거니까 친절하게 안내해드리긴 할 건데, 난 절대 아냐. 저렇게 과분한 분이랑 잘돼볼 생각 없어. 그건 좀 알아줘, 형.”

그 뒤에는 환하게 웃으며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이렇게 된 거라는 얘기는 핑계일 뿐이고, 사실 동생도 설레는 마음이 없지는 않음이 느껴져서.

김지연 역시 퍽 즐거운 듯했다.

내 동생이라면 만나봐도 좋겠다고 이미 얘기했던 친구다.

그 와중에, 홍대 인근의 작은 갤러리라곤 하지만, 나름대로 개인전까지 열고 있는 전문적인 모습을 보게 된 상황.

그래서인지 호감 가득한 태도로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와…… 작품들이 참 신선해요. 여기 얼굴 위쪽으로 지나가는 이 파란색 선은, 예술적으로는 어떤 의미인 거예요?”

“그게, 말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이성의 가닥이라는 의미로 생각하며 그렸습니다. 분출되는 감정들을 묶으려 노력하고 있는…… 그렇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아서, 이렇게 다른 색에 뒤덮이기도 하는……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제 주관을 설명해버리면, 졸작이나마 감상하시는 데 좋지 않을 텐데.”

“아뇨, 아니에요. 제가 미술 쪽으로는 정말 아는 게 없어서, 작가님께서 설명해주시니까 훨씬 더 이해가 잘 돼요. 아무튼 작품들이 참 예쁘네요. 혹시 제가 구입할 수도 있나요?”

“아…… 안 됩니다.”

“네? 아, 죄송해요. 판매는 안 하시나봐요.”

“그런 게 아니라…… 형한테 말씀 많이 들었거든요. 이래저래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시라고요.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전시 끝나면 드리겠습니다.”

“어, 초면에 그렇게 선물을 받아도 괜찮을까요?”

“예, 그냥, 저, 초면이니까요. 자주 보는 사이면 안 하죠.”

“하핫. 아쉽네요. 앞으로는 자주 뵙게 될 텐데.”

“어, 어어…….”

“형님 분- 박 선생님하고 오래 알고 지내고 싶거든요. 그러면 화가 선생님이랑도 뵐 수밖에 없잖아요?”

“아…… 예. 그렇죠. 그렇겠네요. 하하.”

마지막으로 진대수 쪽은, 엄마엄마 하며 붙어 있던 송은진의 모친을 한효준에게 빼앗기고는,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바깥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그 꽁무니를 송은진이 바짝 따르고 있다.

아마 한 대도 피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겠지.

두 사람의 역학관계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결과적으로 나 혼자서 갤러리를 거닐게 됐다.

썩 넓은 공간이 아닌지라 일행들과의 거리가 멀진 않지만, 처음으로 보는 동생의 전시전에 집중하기엔 충분했다.

집중해서 본다고 이해가 쉬운 노릇은 아니었지만.

다만, 그중에 의외의 그림이 하나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웃고 있는 커플……

이건 아무리 봐도 나와 아내 같은데.

“형님 형님, 아, 이 껌딱지 좀 떼주…… 어라? 형님이네?”

“어? 맞네? 부장님 그림도 있네요?”

“음, 그러네. 동생이 나도 그려준 모양이다. 아내하고 못 본 지 오래인데…… 아마 웨딩화보를 관찰해서 그린 거겠지.”

“그러셨겠네요. 근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선남선녀네요.”

“진짜! 완전 잘 어울려요! 이거 보니까 막 연애하고 싶다.”

“좀 하지 그러냐?”

“응? 뭐! 오빠가 남소 해줄 끼가?”

“내 알 바냐. 저리 좀 가라. 감상하는 데 방해돼.”

“엄마! 대수 오빠야가 내보고 방해된대!”

“오메야…… 대수 니 참말이가? 그래 말했나?”

“아이고. 그게 아니라……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글쎄, 나야 뭐. 교수님?”

“허. 날 끌어들이는 겐가?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하게.”

“헉……? 와우. 효준좌, 유행어도 아시네요?”

“유행어는 무슨 놈의 유행언가? 그리고 자네, 사람 면전에서 효준좌라니?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서야. 에잉, 쯧.”

“아우, 죄송합니다…… 아! 젼쓰! 너 와서 얘 좀 데려가라.”

“어머. 화가 선생님, 죄송해요. 저 친구가 좀 몰상식해서, 갤러리에서 저렇게 함부로 소리까지 지르고 그러네요.”

“아, 하하. 지금은 괜찮아요. 아직 다른 관람객 없으니, 편하게 대화하셔도 됩니다. 다만…… 대수 씨, 발에 흙이 좀…….”

“앗, 이게 언제, 으. 얘 피해 다니다가…… 죄송합니다.”

공동의 적이 있으면, 무리는 빠르게 가까워진다.

내 사람들도 대수를 놀리며 점차 친해지기 시작하는 중.

대수만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팔뚝을 붙잡았다.

“형님, 저 집에 갈래요. 먼저 가도 되죠?”

“어른들이 뭐라 하겠어?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으아. 썸바리 헬미…….”

“오빠야, 여기 재밌는 거 있다. 이 봐봐라. 오빠 닮았다.”

“아 진짜. 뭔데. 뭐…… 야, 이건 개잖아?”

“히히, 닮았다 아이가?”

……이 정도면 화기애애하다고 말해도 되겠지.

저마다 웃음꽃을 피우는 남녀를 바라보며,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걸출한 해결사는 못 된다.

그보다는 PTSD에 시달리며 진중을 이탈했다는 배설 쪽에 차라리 더 가깝겠지.

그렇지만, 그런 나라서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

한심하고 연약해서 매일 고민에 고민을 더하는 나지만, 그렇기에 여리고 상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셜록꼰즈 같은 해결사가 아니었다.

그저 발 벗고 나서주는 오지랖.

그것만으로도 많은 고민이 스스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믿으며, 나 역시 그림처럼 밝게 웃었다.

아내가 몹시도 보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