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9장 - 사랑받는 상담사 (3)
방송을 준비하면서는 전날의 녹화본을 주로 살폈다.
채팅창 쪽이 아닌 내 모습에 집중하면서.
BJ꼰마.
꼰대와 마스터의 결합형으로서, 때로는 불통으로 때로는 소통으로 시청자들을 대하는, 동안의 상담사.
그리고 NBSC를 통해 92의 ‘관계’를 갖게 된 아저씨.
녹화본을 통해 보는 내 모습이, 참 낯설었다.
그는 내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상냥해 보였다.
동시에 내가 인지해온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해 보였다.
종위보육원 상담으로 어렴풋이 느꼈던 것처럼.
그리고 현수나 선희의 이야기를 통해서 되새겼던 것처럼.
나는 호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나아간 무언가……
“대수야. 호구 같은데 좀 더 나은 사람을 뭐라고 할까?”
“엥? 호구보다 나으면…… 호십이? 호백이? 하핫, 웃겼죠?”
……괜히 물어본 것 같다.
젊은 녀석이 아재개그 하기는.
사실은, ‘관계’가 상담사의 능력치 중 하나로 나왔을 때 깨달았어야 했던 일이다.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의 관계란 그저 공감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니까.
상담의 근본은 지지적인 관계지만, 때로는 내담자의 부정적 전이를 거절하기도 해야 한다.
공감과 거절.
공감만 한다면 호구고, 거절만 한다면 개인주의자라 불린다.
일견 양립할 수 없는 개념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양자를 적절히 활용해야만 하는 것이 상담사일 터였다.
NBSC는 나를 ‘상담사’로 명명하고 ‘관계’를 추산했다.
그렇게 나온 수치가 82.
나는, 낮은 ‘진단’으로 인해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그때까지도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을 바꿔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외유내강의 전형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진갑수 같은 인물에게도 휘둘리지 않았다.
종국에는 민원식의 알랑방귀로 인해 잘리고 말았지만, 그 전까지 무수한 태클을 걸면서도 부장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다른 팀과의 관계에서는 손해를 자청하면서도 그들의 호의를 이끌어냈다.
나는…… 꽤 잘 살아온 어른이었다.
그 깨달음 속에서 살펴본 ‘관계’의 효능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우호적인 관심.
무수한 채팅을 집중해서 읽으며 그 하나하나에 반응해준다.
진대수가 희화화하곤 하는 사토라레 같은 표정이, 고민을 토로한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 법했다.
둘째는 맺고 끊는 단호함.
비록 모든 사람들을 선의로 대하지만, 때때로 과도한 관심을 바라거나 아집을 견지하는 이들에게는 냉정해진다.
일순간의 표정이지만 절로 공경을 부르는 느낌이었다.
정확한 진단을 하거나 멋진 화술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도, 그렇게 관계를 조율해가는 과정만으로도 쾌감을 줬다.
소통의 과정이 작은 불편함도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기에.
나 자신의 방송을 보는 거지만, 이건 정말 마스터라고 해도 되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과연 그럴 때마다 별사탕이 쏟아졌다.
특별한 미션이 아닌 소소한 대화인데도, 팬가입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져서 한 명 한 명 언급해줄 수 없을 정도였다.
71의 ‘진단’이라 모든 것을 파악한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나를 관찰하며, 조금쯤은 인간관계의 본질에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상담의 본질에도.
“대수야. 오늘은…… 그 페널티를 한번 해보자.”
“그 페널티? 어떤 거요?”
“전에 말했던 거. 업이 많은 구간마다 기부하는.”
“오, 기억하고 계셨구나? 근데 형님, 아직은 안 됩니다. 그렇게 공지하면 분명히 형님 당황시키려고 애들 다 다운만 누를 거란 말이야. 주간 랭킹 올리려면 금요일인 오늘 업 수가 중요한데, 여기서 다운 쌓이면 곤란해요.”
10분에 한 번 누를 수 있는 업/다운 중, 랭킹 산정에 포함되는 건 업 쪽.
그렇지만 구간별로 업과 다운 중 하나밖에 누를 수 없다.
다운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의 업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해보자. 이제는 기부 빌런 이미지를 굳혀야지.”
“오…… 자신 있으신 거? 형님, 애들 지금 형님 기부 안 시키려고 작정하고 있어요. 좋은 상담을 해주면 해줄수록 그 마음이 커질걸? 퇴직도 했고 딸도 있으니까 안정적으로 버시라는 의도로 그러는 거라, 설득도 안 될 거예요.”
“그래도, 그것마저 극복할 만한 상담을 할 거다. 그래서 외적인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업을 누르게끔 만들 거야.”
“……와우. 이건 뭐 정면돌파네.”
진대수는 턱수염을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까짓거, 가봅시다!”
“하하. 믿어줘서 고맙다.”
“엥? 어, 그런 건 아니고 어차피 방송 출연하실 거니까.”
“어?”
“그쪽에서 인지도 낼 수 있으면 여기 랭킹은 큰 의미 없으니까요. 형님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십쇼.”
신뢰를 받지 못해 약간 민망해지긴 했지만.
그 대수마저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방송을 켠 뒤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어나갔다.
“나는가끔님. 처음 뵙네요. 고3이 되셨다고요. 정시로 인서울 노리고 있는데, 꿈이 없어서 고민만 많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고3이시면 정말 압박감이 클 거라고 생각해요. 수능은 참 커다란 문턱이죠. 저도 나름대로 수능 세대입니다. 의외로 세대차가 크지 않죠?”
「ㅋㅋㅋㅋ아재 몇차임ㅋㅋㅋㅋ」
「거의 1차교육과정 아님??ㅌㅋㅋ」
“어, 아마 5차일 겁니다. 수능을 두 번 보긴 했지요. 그때는 한 해에 두 번 봤거든요.”
「헐.. 언젯적..」
「이것은 현역인가 재수인가 ㅋㅋㅋㅋㅋ」
구분할 부분은 부드럽게 구분해주고.
“저는 나는가끔님 같은 고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공부하라고 해서 했어요. 그래서 서울대에 왔죠. 좋은 대학교 가고 싶으시면 저처럼 모든 질문을 덮어놓고 공부하세요. 요즘은 정시 비중 줄어서 안 그래도 힘들잖아. 그런 정신자세로 어떻게 인서울을 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핸드폰 끄고 책 파는 애들이 있는데, 이길 수 있겠어요?”
「아재가 아니라 천재였나..」
「꼰대지니어스 ㅋㅋㅋㅋ」
「나는가끔 : 아 너무해여ㅠㅠㅠ 꼰재ㅠㅠㅠ」
지적할 부분은 확실하게 지적해주고.
“그런데, 하나만 솔직히 얘기해보죠. 아저씨는 그렇게 이겼어요. 핸드폰…… 그땐 물론 핸드폰이 없었지만, 아무튼 TV도 끄고 라디오도 끄고 공부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가끔님처럼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왜 선생님께서 비전 좋다고 추천해주신 컴공만 바라보고 살아왔을까. 조금 더 일찍 적성을 찾았다면, 더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그 고민이 좀 부럽네요.”
「나는가끔 : ㅎㅎ 글쿠나.. 근데 고민이안끝나여.. 하고싶은건 성적이 안나오구.. 쌤들이 추천해주는건 재미없구..」
“쉬운 일은 아니겠죠. 아저씨도 이 나이 먹고 알았어요.”
공감할 부분은 느긋하게 공감해주고.
그 뒤에 말하는 것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볼까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소녀가 있었어요. 많은 남자들이 접근했지만 뭔가 하나씩 안 맞아서 밀어냈어요. 그리고 일흔이 되었습니다. 그때 말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도 안 만나본 내가, 어떻게 왕자님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가끔님이 그래 보여요. 어떤 것도 경험해보기 전까진 알 수 없어요. 고민만 하지 말고 부딪쳐봐요. 고3이라 늦었다고요? 괜찮아요. 직업탐색 프로그램은 하루 안에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매일 고민하느라 집중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직접 찾아가서 경험해보고, 꿈을 꿔봐요.”
「나는가끔 : 아.. 한번해보께요ㅠㅠ 고마워요 아저씨」
[마구니님 별사탕 500개. 맞음. 경험안해보고 상상만하면 답안나옴.]
해답 없는 고민에 부족한 조언을 해준 뒤, 오늘의 메인 미션을 공개했다.
“모든 문제가 해소되진 않겠지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셨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러셨다면 업 버튼 부탁드려요.”
「왜 업??」
「다운빌런 타락했네?? 기부하기 시름??」
“예.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방식을 바꿔보려고요. 업이 많은 구간마다 10만원씩 기부금을 누적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운 절대 누르지 마세요. 다들 업 부탁드립니다.”
「ㅋㅋㅋㅋ뭔데이건ㅋㅋㅋㅋㅋ」
「시른데 시른데ㅋㅋㅋㅋ」
「아재 감못잡네 이러면 다운폭발인데스??」
[케바케님 별사탕 1000개. 성님 크크 왜이런다요 크크.]
자연히 다운이 올라가기 시작하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10분 이내라면 얼마든지 업으로 바꿀 수 있다.
시청자들의 손이 절로 업 쪽으로 옮겨질 만큼 좋은 상담을 한다면, 나는 강제 기부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래를 믿으며 굳건하게 컨텐츠를 이어갔다.
“착한치킨님. 부평에서 치킨집을 운영 중인 30대 자영업자입…… 잠시만. 혹시 부평에 착한치킨이라는 가게 있어요?”
「엌ㅋㅋㅋㅋㅋㅋ 우리동네네 진짜있음ㅋㅋㅋㅋㅋㅋ」
「착한차칸 라임좋네ㅋㅋㅋ」
“아무리 시청자님이셔도 PPL은 안 됩니다. 이제부턴 칙힌차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게그거아닌가ㅋㅋㅋㅋ」
「부르기힘든데ㅋㅋㅋ」
「치킨땡기는데 주문해야게따 기름깨끗함?」
“죄송한데 지금 상담 중이니까 나중에 주문하세요. 방송 못 보시고 칙힌…… 차칸…… 튀기러 가시면 곤란합니다.”
[착한치킨님 별사탕 100개. 유유유 상담도 좋지만 주문도 좋은데여 유유유 저희 기름 깨끗합니다 유유유.]
“칙힌님, PPL 광고료로 이따 1000개 더 주고 가세요.”
가벼운 농담과 함께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자, 치킨 놓고 집중해주세요. 홀 알바 한 명이 3일 교육만 받고 근무시간 5분 전에 그만두겠다고 연락했습니다. 그래서 시급 지급해주긴 했는데, 당황스럽습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3년 영업하며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요. 절 호구로 본 걸까요. 예전 알바생 불러서 시키고 있는데, 그 친구가 시험기간이라 너무 미안하네요.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아 이런일 많지」
「근데 꼰마아재 회사원이라 이런거 모르잖아ㅋㅋ」
「실패각인가ㅋㅋ 다운에 커서대놨음」
「알바생도 먼 사정이있지않았을까여 ㅎㅎ」
“물론 양쪽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하는 부분이겠죠.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기 마련이거든요. 칙힌차칸님. 혹시 그 뒤에 알바생한테 따로 연락 해보셨어요?”
사실 이런 문제에서는, 상대의 사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관조해야 한다.
스스로를 호구라고 믿고 살아온 나는, 그걸 잘 안다.
「착한치킨 : 아뇨 바빠가지고 그냥..」
「착한치킨 : 모르겠어요 나쁘게굴지는 않았는데..」
「착한치킨 : 여자애고해서 힘든일도 빼줬는데..」
「착한치킨 : 뭔 사정이 있었으면 얘기라도 해주지..」
“그렇군요. 제 생각은 이래요. 일을 편파적으로 시키시면 됩니까? 공평하게 하셨어야죠. 또, 요즘 애들은 세상 무서운 걸 몰라서 겁을 줘야 돼요. 기간 안 채우고 그만두면 동네방네 소문내서 알바 못 구하게 할 거라고요. 그러질 않으셨으니까 쉽게 그만두는 거죠. 백수인 제가 봐도 참 답답하네요.”
「꼰대나왔다ㅋㅋㅋㅋㅋ」
「이것은 꼰마인가 꼰머인가 ㅋㅋㅋㅋㅋ」
「ㄲㄷㅇ!」
「착한치킨 : ;;아니 그러긴 좀.. 애들이고 한데..」
그 채팅으로 알 수 있었다.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
그는 나와 닮은 사람이었다.
“그렇습니까? 제가 자영업을 잘 몰라서. 그럼 됐네요. 예, 하던 대로 하세요. 그렇게 사세요.”
「착한치킨 : 어.. 꼰마님 삐쳤어요?? 지성..;;」
“반대예요. 3년에 한 명. 매장 규모는 여쭤보지 않았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예전 알바생이 시험기간인데도 도와주러 왔다고요? 그게 어떻게 호구입니까?”
「착한치킨 : 그건 걔가 애가 착해가지고..ㅎㅎ」
이렇게까지 말을 해줘도 확신하지 못한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럴 거면서 왜 호구처럼 후지게 사는 걸까.
머리로 확신하지도 못한 채로, 왜 남들부터 생각하는 걸까.
아마 그게 인간이 가진 본능이리라.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함께 살아가는 본능.
삶에 치이다보면 부서지고 깨지고 마는 마음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배려가 참 좋았다.
“어떤 사람이든 존중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호구인 걸까, 앞으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들죠. 그때는 이 말을 되뇌어보세요. 좋은 토양에도 잡초는 생긴다. 좋은 사장도 가끔 배신당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악덕사장에겐 필요할 때 도와줄 내 사람이 없다는 점이에요. 그것만 기억하신다면 고민하실 게 없을 것 같네요.”
「착한치킨 : 아.. 그런가.. ㅎㅎ;;」
“착한치킨님. 괜찮습니다. 호구여도 돼요. 지금 문자 하나 보내세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마웠다고. 사정은 모르겠지만 다 잘되길 바란다고. 한 마리 공짜로 줄 테니까 다음에 손님으로 오라고. 알바생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착한치킨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세요. 마음이 정말 편해지실 테니까요.”
[dosena님 별사탕 1000개. 이런 흑우상담이 있나 크크.]
[착한치킨님 별사탕 100개. 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시고 흐흐. 그래도 같이 고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한참 뒤에, 착한치킨은 다시 별사탕을 보냈다.
[착한치킨님 별사탕 1000개. 저 아까 칙힌차칸인데요 흐흐. 말씀하신대로 했는데 진짜 마음이 편해졌네요. 호구 중의 호구가 되니까 오히려 속이 후련해요 흐흐.]
“……호구 중의 호구…… 호십이라고 할까요? 아님 호백이?”
「야잌ㅋㅋㅋㅋㅋㅋㅋ」
「아.. 맞다 이아재 부장님이었지ㅋㅋㅋㅋ」
[보람보람보님 별사탕 500개. 도랏 크크 제발 그만 크크.]
원망의 눈초리로 진대수를 쳐다봤다.
엄지를 치켜들고 있더라.
그 손 모양처럼, 업 버튼 옆의 숫자 역시 자꾸만 늘어났다.
그날 방송에서 나는 5만 2천 개의 별사탕을 받았다.
그리고 최초 10분을 제외하면 전부 업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230만원의 기부금을 누적했다.
안타깝게도 남는 장사였다.
호십이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
오랜만에 꿈에서 김 이병을 봤다.
동기들과 마주쳐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김 이병이 막내 생활 뭐 힘드냐며 허세를 부렸다.
나는 빨래를 널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뭐 보냐? 어, ET네?”
“ET……가 뭔지 말입니다?”
“쟤. 얼굴 작고 눈 크잖아. 그래서 별명이 ET랜다.”
“아…….”
“아는 무슨. 씹새야, 일이나 열심히 해. ET 쟤처럼 맨날 쳐맞고 싶어? 니 맞선임이 착해서 다행인 줄 알아.”
“저는 그래도 잘하지 말입니다.”
“이 씹새. 진짜로 잘하니까 뭐라고 못하겠네.”
기억나는 대목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대화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김 이병의 마지막 모습뿐.
……그때가 어떤 기점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영웅심리로 남들 일에 나섰던 거라면, 그 일 이후로는 마치 강박처럼 타인의 마음부터 살피게 됐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어떤 마음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만들게 될까봐.
잠깐 ET를 닮은 얼굴을 그리다,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오늘은 퇴직 이후 두 번째로 맞는 토요일.
한번 솜씨를 부려보기로 하고 레시피를 연습해뒀다.
거기에 자칭 자취생활 마스터라는 진대수가 도움을 주긴 했는데, 막상 보니 계란찜 정도나 할 줄 아는 수준이었다.
결국은 같이 유튜브 보며 공부해야 했다.
그렇게 차려놓은 볶음밥을 보며, 아내가 입을 크게 벌렸다.
“와……! 비주얼 봐. 이거 진짜 당신이 한 거야?”
“응. 불맛 가득한 달걀볶음밥. 지수 깨워줄래?”
“알았어. 와, 냄새 좋다. 얘 지수야! 얼른 일어나.”
행복한 아침이다.
풍족한 식량과 따뜻한 목소리가 있는.
그 현실 속에서, 문득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말도 안 되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돌이켜보면 오늘이 NBSC를 얻고 딱 일주일째.
지난주 이 시각의 내 모습을 회상해보면……
문득, 이 따뜻한 아침이 꿈이 아닐까 불안해졌다.
“주희야…… 내 볼 좀 꼬집어볼래?”
“응? 왜 그래?”
“아니. 혹시 꿈인가 싶어서.”
“……당신이 나 꼬집어주시지 그래? 박대민 씨가 차려주시는 아침밥상 받는 게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니까.”
그렇게 서로의 볼을 꼬집게 됐지만, 꿈이 깨진 않더라.
우리는 머쓱한 얼굴로 한참 마주봤다.
그리고 딸애가 달려와서 내 등에 매달렸다.
“읍. 어, 미안. 괜찮아?”
“으…… 박지수! 너 그렇게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지!”
“헤헤. 뽀뽀했대요.”
“그럼, 부분데, 뽀뽀를 안 하니? 어쩜 저렇게 장난꾸러긴지.”
“하하.”
“웃어? 웃음이 나와? 당신 진짜…….”
그렇게 성을 내던 아내는, 딸이 화장실로 들어간 걸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지수 학원 가면…….”
“어?”
“낮에, 다른 할 일 없지?”
“어…… 어?”
잠깐 멍해져 있다가, 픽 웃었다.
이것까지 행운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아내의 허리를 감싸안고 말았다.
딸애 학원 갈 시간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