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86화 (8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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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태유준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박사님의 연구 일지 일부분을 봤습니다. 거기에 특수 체질을 가진 피험자 이야기가 나오던데요. 그거 제 이야기인가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말하자, 장 박사가 한숨과 함께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제가 모든 바이러스에 면역을 지니고 있다니, 좀 많이 놀랐습니다.”

“나도 처음 네 혈액 샘플을 채취했을 때 적잖이 놀랐다.”

“박사님, 혹시 제가 좀비에 물리고도 무사했던 게 특수 체질 덕분일까요. 좀비 바이러스에도 항체가 있다 보니까 살아남은 거겠죠?”

태유준의 물음에 장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바이러스는 구조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돼. 내가 연구한 좀비 바이러스 역시 현존하는 질병 바이러스 구조를 본떠 만든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제 혈액이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태유준이 본론을 꺼냈다.

“제 피가 연구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박사님이 만드실 약, 거기에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유준아.”

“이렇게 된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박사님의 연구를 돕는 것뿐이에요. 그 사람을 잃은 이상은요.”

태유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이 가늘게 떨렸다.

장 박사는 왜 우느냐고도 묻지 않았고, 울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태유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번 잃어버린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 * *

태유준은 장 박사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차례 채혈에 협조했다. 언제 일융의 수하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주어진 하루 동안 꼬박 일했다. 좀비에 물렸을 때 일어났던 일과 어쩌다가 성수를 만들게 되었는지, 언제 처음 능력을 깨닫게 되었는지 상세한 기록도 남겼다.

모든 문답과 연구가 끝난 후 장 박사와 태유준은 쪽잠을 자고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어느새 바깥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가시죠.”

“그래.”

두 사람은 차례로 트럭에 올랐다. 차는 어두운 길을 뚫으며 천천히 달렸다.

“유준이 너는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장 박사의 물음에 태유준은 그간 결심해 온 대답을 뱉었다.

“저는 박사님 청담동에 데려다드리고 서울 시내를 좀 뒤질 겁니다.”

“서울은 왜?”

“서울에 그놈들의 좀비 공장이 또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거기라면 내가 위치를 알 것 같구나. 디지털 단지 쪽일 거다.”

장 박사의 말에 태유준이 흠칫했다.

“그놈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 있어. 내가 고문으로 기절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별의별 소리를 다 하더구나. 디지털 단지 쪽에 음료수 공장이 하나 있는 거 알지?”

“아, 탄산음료 공장이요?”

장 박사가 말하는 곳은 태유준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디지털 단지 안쪽에 유명 음료 브랜드의 공장이 있었다.

“거기에서 일할 놈들을 새로 뽑니 마니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실제로 거기는 일융제약 본사랑도 가깝다.”

“맞네요. 일융도 그쪽 지역에 위치해 있죠.”

“그래서 아마 거기 공장을 점거하고 좀비들을 생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범위가 좁혀졌다. 태유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긴장 가득한 얼굴을 보며 장 박사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혼자 가면 위험하지 않겠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라도 해 봐야죠.”

당연히 이 상황이 불안했다. 늘 곁을 지켜 주고 든든하게 받쳐 주던 원혁을 잃은 지금, 태유준은 모든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몸을 쓰고, 목표를 만들어 달성해야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원혁의 생각만 하다가 미쳐 버릴지도 몰랐기에.

트럭은 황폐한 국도를 타고 달렸다. 가는 길에 버려진 주유소가 있어 기름을 넣고, 휴지와 물을 조금 챙겼다. 그들은 두 시간 만에 청담동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각이라 다행히 좀비는 몇 마리밖에 마주치지 않았다.

개중 공격성이 살아 있는 것은 차로 쳐 버리거나 태유준이 잠시 차에서 내려 성수를 끼얹었다. 이제는 원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 해야 했다. 손에 쥔 가위 하나로 좀비와 맞서 싸우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태유준은 혹여라도 장 박사가 다쳐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식은땀 흐르는 전투도, 좀비의 썩은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홀로 처리해야 했다.

또 한 마리를 처리했다. 쓰러진 좀비에게서 썩어 빠진 비린내가 풍겼다. 그 역겨운 냄새를 맡기 싫어 태유준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청담동 연구소는 상가 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다. 장 박사와 인사를 나누며 태유준은 잠깐 눈물을 보였다. 장 박사가 태유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데려다줘서 고맙다.”

“박사님….”

“우리 꼭,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꼭 만날 거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치료제를 만들 거고, 너는 평화로운 세상을 마주할 거다.”

장 박사가 태유준을 꽉 껴안았다. 장 박사의 체온에서 태유준은 작은 위로를 받았다. 살아남아서 평화로운 세상을 마주하자. 그게 내게 남겨진 유일하고도 최선인 길이니까.

“고맙습니다, 박사님.”

“절대 다쳐선 안 돼.”

“박사님도요.”

“우리… 사태가 끝나는 날 꼭 보자.”

“물론입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태유준은 눈물을 닦고 뒤돌았다. 힘겨운 걸음을 옮기며 그는 막연한 미래를 꿈꿨다.

그런 날이 올까요. 언젠가 이 좀비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 아래 태양을 듬뿍 쬘 수 있을까요. 대낮에 사람들이 거리를 걸어 다니는 그런 날은 대체 언제쯤 우리에게 돌아올까요.

트럭으로 돌아온 태유준은 운전석에 올라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차 내부는 당연히도 고요했다. 혼자임이 너무나도 사무치게 느껴져, 태유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이 차 안에 아직도 원혁이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왜 함께이고 싶은 사람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가장 간절한 것을 갖지 못하는 이 삶은 너무도 가혹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를 하러 간다. 살아 있는 한, 뭐라도 해야 인간이다.

한참을 운 다음, 태유준은 눈물 자국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그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바로 디지털 단지로 가는 건 무리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구체적인 위치도 알지 못하기에, 홑몸으로 적진에 뛰어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어딘가에서 쉬면서 오늘 밤을 보내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확실한 전략을 짜야 한다. 이 근처에 안전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

태유준은 한참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건물, 잠실의 랜드마크. 원혁과 갔던 호텔이 보였다.

“키… 카드 키를 내게 줬었지. 맞아.”

태유준은 트럭에서 내려 황급하게 짐칸 쪽으로 향했다.

“그걸 어디에 뒀더라….”

태유준은 짐칸을 뒤적이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신부님이랑 나랑 한 팀이잖아.’

뻔뻔하게 말하며 내게 키를 쥐여 주었던 사람. 나는 그 카드 키에서 온기를 느꼈다. 얄팍한 플라스틱 카드 키 한 장이 뭐라고, 참혹한 세상 속 작고 아늑한 은신처가 생긴 기분이었지.

그리고 나는….

“맞아. 성경책.”

태유준의 머릿속에 그날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 평소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 페이지에 카드 키를 꽂아 넣었었다.

창세기 8장 14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홍수가 발발한 지 370일 되던 날, 노아는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방주에서 나왔다. 그 희망에 가득찬 광경이 마음에 들어서, 태유준은 이전부터 그 구절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성경책을 펼치자 키는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태유준은 잠시 눈을 감고 카드 키를 꼭 쥐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이었다. 어느덧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려오고 있었지만 키는 따뜻했다. 마치 원혁이 세상에 남겨 놓고 간 온기의 한 자락처럼.

태유준은 다시 운전석에 올라 잠실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그의 흔적이 제 손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눈물과 뒤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원혁과 함께 호텔에 은신했던 그날은 몹시도 추웠다. 하지만 한 침대에 누운 순간은 더없이 안락하고 따뜻했었다.

그곳에 간다면 그 추억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태유준의 발걸음은 조급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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