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85화 (85/93)

[email protected]

배는 몇 시간을 달려 인천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사람도 좀비도 없었으며 그저 어둑한 가운데 칼바람만이 존재했다.

지훈의 아버지는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 내색이었다. 하지만 태유준과 장 박사를 무사히 데려다주었다는 사실에 뿌듯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럼 잘 가십시오. 선생님들, 부디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장 박사와 태유준은 지훈의 부친과 오래오래 악수했다. 살아남은 자들끼리 나눌 수 있는 온기가 손바닥에 잔상을 남겼다.

지훈의 부친을 보내고, 두 사람은 외진 곳에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유준아.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니.”

“아까 배에서 말씀드린 대로 트럭을 타고 박사님 댁으로 갈 겁니다.”

“너랑 미스터 어빙이 타고 다녔다는 그 트럭 말이지?”

“네. 맞습니다. 저쪽에 세워 놨어요.”

태유준이 마지막으로 차를 세워 놓았던 장소를 가리켰다. 어둠 속이었지만 트럭의 형체가 보였다.

“여기서 박사님 댁이 멀지 않으니 일단 이동해서 대책을 세웠으면 합니다.”

“그러자.”

둘은 사방을 경계하며 트럭까지 걸어갔다. 마지막에 태유준이 차 키를 챙긴 것이 신의 한 수였을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는 복선이었을까.

태유준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차 키를 꺼내 들고 운전석에 올랐다. 장 박사가 조수석에 오른 것을 확인하고, 그는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었다.

“….”

운전석에 앉아 앞을 보자 또다시 원혁 생각이 났다. 눈앞에 원혁과 나누어 먹던 간식의 껍질이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었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일이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살아 돌아올 것이라 믿고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키스를 했고,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던 좀비의 비가 그치면 할 일을 논했다. 함께 오늘을 살았고, 미래를 꿈꿨다.

가까스로 눈물을 참을 수 있었던 건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있기 때문이다. 장 박사를 걱정시킬 수는 없기에 태유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차를 출발시켰다.

장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불은 켜지 않았다.

“난 이제부터 치료제 개발에 전념할 생각이다.”

“이곳은 이미 놈들에게 들킨 장소지 않습니까. 여기서 연구를 진행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삼의 장소를 찾을 생각이다. 놈들이 모르는 청담동 연구소로 갈 생각이야.”

“청담동이요?”

청담동 연구소는 태유준도 처음 듣는 장소였다. 장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일에 대비해 준비해 둔 연구소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게 청담동 한복판에 있다고 했다. 온갖 미용실과 부티크가 입점한 건물에 위치해 있어서 오히려 남들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완성해서 세상에 약을 뿌릴 거다. 일융제약 놈들이 더는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래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모든 게 헛된 일이 되어 버리니까요.”

“하지만 청담동에 함께 갔다가는 네가 위험해질 수 있다. 일융 놈들이 지금 눈에 불을 켜고 날 찾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린 오늘 밤만 여기서 같이 보내고 다시 헤어져야 할 것 같구나.”

태유준은 그 누구보다도 장 박사의 연구가 성공하길 바랐다. 설계도의 절반을 갖고 있던 원혁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말로는 장 박사에게 나머지 반쪽 설계도를 얻어 내 떼돈을 벌겠다고 했지만, 태유준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원혁은 약이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기 싫었던 거다. 자신의 모친이 그랬던 것처럼, 살 수 있는데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구해 내고 싶어서.

그 마음을 알기에 태유준은 언제부턴가 그와 동질감을 느꼈다. 태유준 역시 가족과도 같은 장 박사를 찾겠다는 개인적인 이유에서 여정을 시작했지만, 사람들을 돕고 살리면서 선을 선택했다.

그건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이득을 편취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망해 버린 세상에서도 자신은 떳떳하게 살아간다는 증거를 얻고자 함이었다.

나는 인간이다.

그런 자기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어둠이 끝나고 평화를 수복했을 때에도 진정한 인간이고 싶어서.

…그런데 이제는 그 뜻을 함께해 줄 이가 없다.

“청담동까지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태유준은 쓰디쓰게 웃으며 장 박사에게 말했다.

청담동으로는 내일 해 질 녘에 출발하기로 하고, 오늘 하루는 일단 쉬기로 했다. 태유준은 대충 씻고 장 박사가 건네는 옷을 입은 다음 손님방 침실에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자 또다시 기분이 이상했다.

이 집 역시 원혁과 들렀던 곳이었다. 갈 때는 두 사람이었으나 돌아온 것은 혼자뿐. 늘 같은 침대를 썼던 사람이 없다. 옆자리를 더듬어 봐도 싸늘하다.

이 방에는 원혁의 체온도, 숨결도, 목소리도 없었다.

태유준은 옥죄어 오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제 더는 나올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숨죽여 우는 그의 눈가에 짜디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는 둥 마는 둥 한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동이 텄다. 밤새 연구 자료를 뒤적였다는 장 박사를 위해 태유준은 주방으로 가서 밥을 차렸다.

두 사람은 인스턴트 밥과 국, 눅눅해진 김과 참치 캔을 식탁에 올려놓고 마주 앉았다. 식사는 침묵 속에 이루어졌다. 장 박사는 하루 사이 더 여윈 태유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굴빛이 말이 아니었다.

“통 먹질 않네. 입맛이 없는 게냐.”

“네.”

“그럴 만도 하지.”

밥을 깨작거리다가 말다가 태유준은 결국 물만 마셨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박사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남가도에서… 좀비들이 물에 맞고 돌로 변하는 것 보셨죠.”

태유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장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태유준도 장 박사도 서로 궁금해하는 화제였다.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 장 박사도 태유준이 진정되는 대로 이야기를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거, 제 손이 닿은 물이었어요. 실은 어느 시점부터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제가 만진 물은 좀비를 퇴치하는 효과가 있어요.”

“….”

장 박사는 말이 없었다. 태유준은 그 침묵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유준 자신조차 원인을 모르는 현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힘이었다.

태유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뗐다.

“박사님 같은 과학자가 보기에는 터무니없으시겠지만,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도 분명히 봤다. 그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어.”

태유준은 결심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만 놨던 이야기를 장 박사에게도 털어놓기로.

태유준은 한참을 이야기했다. 때로는 주저하면서, 때로는 망설임 없이. 태유준의 그 ‘힘’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양부모에게 파양당했는지까지 그는 장 박사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그때 제가 파양당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능력을 보여서였어요. 물과 불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알았거든요. 양부모님은 사탄이 씌었다며 절 내쫓은 거예요.”

장 박사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일이. 어떻게… 상상도 못 했다.”

뭔가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장 박사는 깊이 묻지 않았었다. 괜히 상처를 헤집을까 봐 조심스러워서였다. 하지만 그 배경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그는 깊이 탄식했다.

태유준은 말을 할 때마다 목이 멨다. 그는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울음을 삼키느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현상은 여의도에서 좀비한테 물리면서 깨어난 것 같습니다.”

태유준이 고개를 떨궜다. 장 박사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간 많이 힘들었겠구나.”

“힘들었어요. 하지만 저랑 짐을 나누어 짊어 준 형제님이 있었기에… 덜 힘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너한테는 정말 큰 의미였나 보다.”

태유준이 달아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식혔다. 어느새 국은 다 식어 차가워져 있었다.

“박사님은 과학자시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으세요?”

장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다. 나는 분명히 과학자이지만 그 이전에 종교인이기도 하단다. 과학과 신앙이 양립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지. 그런 것은 내 오랜 고민의 대상이기도 했지.”

장 박사는 태유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니다. 네가 깊이 고민하고 털어놓는 이야기라는 것도 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장 박사는 태유준에게 있어 커다란 그늘막 같은 사람이었다. 힘든 세상에서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사람. 그 점은 태유준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꺼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태유준을 믿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이, 태유준의 상처투성이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