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68화 (268/325)
  • 268화. 방해꾼 (2)

    “진짜 빨리 와주셨군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연구진의 숫자를 보니, 대충 구색을 맞춘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말로 예전부터 준비를 해놓은 것으로 보였다.

    내 눈길을 읽은 것인지, 이강찬이 설명을 덧붙였다.

    “단순히 북한에만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프로젝트인 만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연구진으로는 숫자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연구원을 계속 확충해 나가려 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지 않던가?

    베리칩 프로젝트를 전 세계에 실행하려면 그에 따른 인력이 필요한 법. 그래야 체계적이고 막힘없이 일 처리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강찬 뒤에 있는 연구진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다음, 그들에게 물었다.

    “최대한 빨리 인수인계가 가능하겠습니까?”

    이강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인수인계요?”

    “예, 여기 있는 프로젝트 팀에게 모든 걸 인수받으세요.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북한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완전히 당신들의 프로젝트로 만들라는 겁니다.”

    내 말에 다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들의 의문을 단번에 풀어주었다.

    “이들이 제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들은 제 허락도 없이 외국에서 여자들을 대거 불러들여 광란의 파티를 벌였고, 그 여성들 중에는 우리 프로젝트를 방해하려는 스파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프로젝트가 끝장날 위기에 처했었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연구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성 연구진들은 결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예, 회장님.”

    “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들어가서 빠르게 인수인계 작업을 하세요.”

    나는 연구진을 연구소 안에 들인 다음, 이강찬과 따로 자리를 잡았다.

    “노고가 많으셨겠습니다, 회장님.”

    “아뇨, 오히려 제 급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신 회장님께서 더 노고가 많으셨겠지요. 감사합니다.”

    “하하, 저야 준비를 해놓았기에 망정이었지요. 아니었으면 제대로 망신살을 당했을 뻔했습니다.”

    이강찬의 넉살 좋은 미소와 함께 우리는 오랜만에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은 내가 갑의 위치에 있긴 하지만, 한때 이강찬과 천성 그룹을 빼앗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이 참 빨리 흐르긴 했다.

    “그런데 그 스파이 말입니다. 어디 쪽 스파이인지 밝혀내셨습니까?”

    “아직 조사 중입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으니, 조만간 조사 결과를 가져다줄 겁니다.”

    “으음,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이런 짓을 벌일 정도면 우리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는 거라는 건데. 외부로 노출이 된 겁니까?”

    “웬만한 정보국이라면 제가 북한에서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겠지요.”

    “허허. 그럼, 좀 위험한 게 아닙니까? 베리칩 프로젝트가 무슨 의미인지 높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골든 연합이 베리칩 프로젝트 배경에 있다는 걸 안다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터. 하지만 프로젝트를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간구했을 것이다. 이번 스파이사건도 그 수단 중 하나라고 볼 수가 있다.

    “그에 대해서는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의 동태를 항상 체크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뚫리다니……. 좀 씁쓸하네요.”

    내 말에 이강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연구진들은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예, 천성의 회장님이라면 믿음이 갑니다.”

    선례도 있으니, 이번 연구진들은 아마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한국인이지 않은가?

    원래 프로젝트를 맡고 있던 연구진들은 대부분이 미국인이었고 그 외 다른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외국 여자들을 불러들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천성 연구진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를 바 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회장님, 제가 급히 나오느라 한국에서의 일이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강찬은 은근슬쩍 내게 원하는 것을 풀어놓았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주는 것이 이곳의 법칙이지 않던가?

    “요즘 정부가 열심히 움직이는 중이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예, 대북송금사건으로 대마 그룹이 저렇게 날아가지 않았습니까. 재벌 때리는 정부를 싫어할 국민은 없지요. 아예 이 기세를 몰아 천성까지 때리려나 봅니다.”

    항상 봐오던 군기 잡기다.

    물론, 화진은 거기에 포함되지가 않는다.

    정치계 사람들 쪽에서 누가 감히 화진을 건드리겠는가.

    그래서 주변에 있는 대기업에게 괜한 꼬장을 부리는 것이다.

    “정부가 뭘로 껀덕지를 잡았습니까?”

    “뻔하죠. 비자금입니다. 제 창구 몇 개를 털을 작정인 거 같더군요.”

    “그걸 막아드리면 됩니까?”

    “단순히 막는 정도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강찬의 말대로 천성의 힘이라면 통장 몇 개 던져주는 걸로 마무리를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강찬은 그 통장 몇 개를 주기가 싫은 것이다.

    “비자금 규모가 큰가 봅니다?”

    “예, 사이즈가 좀 됩니다. 7,500억가량 되는 돈이니까요.”

    7,500억이면 참 많이도 해먹었다. 확실히 정부에게 그냥 던져주기에는 아까운 돈이라는 것이다.

    “윗대가리들이 그거 찢어 먹는 걸 보느니 차라리 없애거나 제가 가지고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강찬의 힘은 딱 여기까지였다.

    통장으로 수사를 막는 것.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너머의 것이다.

    비자금도 꿀꺽하고 죗값도 치르지 않는 것.

    난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강찬에게 주의를 주었다.

    “수사를 막을 순 없습니다. 또 재판은 받아야 할 겁니다. 그 후의 상황은 대충 아시겠죠?”

    이강찬은 원하는 대답을 얻었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의 아니겠습니까?”

    아마 1심에서 이강찬은 징역 5년을 받을 것이다. 그럼, 여론이 드디어 정부가 재벌을 잡는다고 칭송할 터. 하지만 2심부터는 다르다.

    2심에서 이강찬은 2년 6개월 징역을 받게 되고 집행유예로 끝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상 3년 이하부터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복잡하게 1심에서 5년을 때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불법 비자금 생성은 최소 5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5년을 선고받은 사람은 항소로 2분의 1까지 감형받을 수 있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3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집행유예를 해줄 수가 있다.

    대부분의 재벌집 회장들이 이렇게 법의 심판을 받는다.

    1심은 5년, 2심에서는 감경 후 집행유예.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가 이 세상의 진리니까.

    난 그대로 대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 * *

    인수인계를 시작한 지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모든 인계 작업을 마친 연구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베리칩 프로젝트는 천성 연구진이 맡게 될 겁니다. 그리고 기존 연구진들은 오늘부로 해고입니다.”

    해고라는 말에도 다들 덤덤한 표정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들을 그냥 해고시킬 생각이 없다.

    “정무문 박사님.”

    “예, 회장님.”

    허벅지에 맞은 총상 때문에 목발을 집고 다니던 정무문 박사의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증오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저런 자를 다시 미국에 돌려보낸다?

    안 될 말이다.

    저놈이 돌아가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기존 연구진들도. 하지만 당신들은 절대 이 나라를 빠져나갈 수 없어요.”

    “…예? 그, 그게 무슨.”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고 시작한 일이 아닙니까? 설마 내가 기밀 누설 금지 서약서라도 받고 보내줄 줄 알았다면 큰 착각입니다.”

    난 손뼉을 치며 뒤에 대기 중이던 북한 측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데려가서 죽이세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시체는 불에 태우던가, 아니면 길바닥에 버려도 좋습니다. 당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북한 병사들이 연구진들을 붙잡았다.

    “이, 이거 놔!”

    “사, 살려주세요!”

    “으아악-!”

    반항을 하며 도망치려는 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몽둥이를 휘둘러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린 뒤, 질질 끌고 가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천성 측 연구진들은 입만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몇몇 여자 연구원들은 애써 신음 소리를 감추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강찬도 마른침을 삼킨 채 내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잘 보셨습니까? 왜 저 사람들이 저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잘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저들이 제게 한 짓은 배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신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여러분도 저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할 겁니까?”

    “…….”

    흐느끼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릴 뿐.

    내가 원하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예, 회, 회장님!”

    이제야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이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저는 자비심이 많지 않아요. 삼진 아웃이라고 하지만, 저는 스트라이크 한 번에 모든 걸 갈아치웁니다. 그만큼 조심성이 많아요. 부디 제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강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나머지는 회장님께 맡기겠습니다. 부디 연구원들을 잘 다독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똑똑히 전해주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하라고 말입니다. 여자가 필요하면 여자를 줄 것이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줄 겁니다.”

    “아, 예. 회장님. 꼭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강찬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이것으로 이들은 항상 경계를 하게 될 터.

    이들의 미래는 결국 이들 스스로의 손에 달렸다.

    * * *

    “그러니까 아직은 확실하게 모른다는 겁니까?”

    “예, 미스터 김. 그러나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니엘 로페즈의 말에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합니까?”

    “예, 확실합니다. 그에 대한 조사는 전부 마쳤어요.”

    CIA를 들들 볶아서 가져온 결과물이다.

    그럼, 이 나라들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유럽인가요?”

    “미스터 김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똑같은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대담하게 나올 수 있는 건 유럽밖에 없을 겁니다.”

    유럽이라면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MI6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놈들이 결국 잘 자고 있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있다.

    베리칩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때까지는 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지 않았건만. 이런 식으로 먼저 선공에 나서는 것인가.

    “MI6가 마음을 제대로 먹은 것 같군요. 겁도 없이 날뛰는 것을 보면 말이죠.”

    “영국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렇겠죠. 그런데 이놈들이 이처럼 자신만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MI6가 우리 골든 연합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하, 물론 그것도 있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MI6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지 아십니까?”

    여러 이름이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이 영국에서 이름난 부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러다 문득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로페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 김, 로스차일드 가문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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