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월가의 신 (3)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야?”
블라디미르 푸틴은 아침 세수도 하지 못하고 급하게 국정 회의실로 달려왔다.
이미 대통령부터 장관들이 전부 모여 있는 긴급회의.
그곳에서 푸틴은 당연 1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두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회의를 시작하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해외 자본들이 미친 듯이 러시아에 유입되고 있습니다. 벌써 그 금액만 1,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1,000억 달러!
이 무슨 무식한 수치란 말인가.
간격을 두고 들어온 게 아니라 한꺼번에 쏟아붓고 있다.
“500대였던 RTS 지수가 벌써 1,000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 투자 열풍이 불어 1,500억 달러는 단순히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1,000억 달러는 단순히 시작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렇다는 건 더 많은 외국 자본이 유입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우리가 새로 시작한 산업들 때문에 그런 건가?”
“아뇨. 그랬다면 진작 투자를 받았겠죠. 그동안 우리나라에게 등을 돌리던 외국 투자자들이 아닙니까?”
“그럼 왜?”
푸틴의 물음에 대답을 한 것은 재정부 장관이었다.
“그 배후에는 리턴 쉐어즈가 있습니다, 총리님.”
“리턴 쉐어즈?”
“예, 월가를 주름잡고 있는 리턴 쉐어즈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월가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이 어떤 말을 하냐에 따라서 투자 열풍이 시작될 수도, 꺼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리턴 쉐어즈를 푸틴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무시무시한 성장으로 순식간에 월가를 장악한 놈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성장시킨 동력은 바로…….
“그 뒤에 메데인 카르텔… 아니, 골든 연합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골든 연합이 모든 걸 주도하고 있다는 게 저희 측의 판단입니다.”
“SVR의 판단은 어때?”
SVR은 1991년에 KGB를 대신해 만들어진 해외 정보국이다.
SVR 국장도 똑같은 대답을 푸틴에게 주었다.
“골든 연합의 소행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골든 연합의 수장이자 미스터 블랙이라 불리는 김태산이 미국으로 넘어가 월가를 대표하는 투자사 임원들을 전부 초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은밀하게 회동을 가졌는데, 그 후부터 투자 전문가들이 러시아에 투자하라며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딱딱 맞아떨어진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일은 김태산의 머리에서 나온 게 분명하다.
“만약 이런 투자 열풍이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러시아는 이제껏 누려보지 못한 호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항상 저게 문제다. 하지만.
“외국 자본이 깊숙이 침투해 러시아에 모든 걸 장악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던 것처럼 다시 한꺼번에 밖으로 나간다면?”
푸틴은 그 뒤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IMF 위기에 아시아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다행히 러시아에는 그리 큰 피해가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멕시코, 아르헨티나, 태국을 보십시오. 그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해외 자본에게 배신을 당해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일본도 버블 경제가 폭발하면서 폭삭 주저앉았고요.”
“그렇다는 건 우리도 똑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리턴 쉐어즈는 이미 돈으로 러시아의 경제를 사고 있습니다. 그들이 폭탄 스위치를 누르면 아시아가 침몰했던 것처럼 우리도 끝없이 침몰하게 될 겁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는 건가.
푸틴은 얼굴을 가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든 연합의 수장, 김태산.
미스터 블랙이라 불리는 그를 자신이 너무 하찮게 봤던 것은 아닐까.
그저 마피아들을 움직이는 대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돈으로 압력을 가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
이 정도였단 말인가.
김태산, 그자의 힘이?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나…….”
이 주일 전부터 갑작스럽게 해외 자본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정부는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해외 투자가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러시아 경제에 힘이 될 테니까. 그런데 그 수치가 비이상적으로 올라가더니 지금의 상황까지 다다랐다.
미국에 있는 개미들부터 전 세계 개미들까지 러시아에 달려들어 주머니에 있는 푼돈을 뿌리고 있는 실정.
푼돈이 모이고 모이면 히말라야 산맥처럼 높아질 수 있지 않던가.
그 거대함을 지금 푸틴은 실감하고 있다.
“해외 자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이대로 가면 저놈들이 경제권을 포로삼아 협박을 할 수도 있어.”
“그게…….”
회의실에 모인 누구도 푸틴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제동을 걸려고 했으면 빨리 걸었어야 했다. 이미 1,000억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건 단순히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1,000억 달러가 금방 1조 달러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일 터.
1조 달러까지 금액이 치솟는 건 러시아의 GDP를 뛰어넘는 일이다.
“방도가 정말로 없나? 이렇게 앉아서 당하기만 해야 한다고?”
“차라리 이 열풍에 순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들이 꼭 우리를 협박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기회를 살려 러시아 경제를 일으킨다면…….”
푸틴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위원에게 재떨이를 던져 버렸다.
“병신 같은 소리를 지껄이려면 여기서 썩 꺼져!”
“초, 총리님.”
“이게 호의적인 투자로 보여? 이건 미스터 블랙, 그 자식이 우리 러시아를 흔들려는 수작이야. 그런데 이 열풍에 순응해? 순응해서 뭘 어쩌자고. 춤이라도 출까?”
“총리님, 진정하십시오. 저 사람도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닐 겁니다. 분명히 이건 그놈들이 우리 러시아를 흔들기 위한 짓일 터. 그래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최대한 우리도 이 사태를 이용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일 겁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화를 내던 푸틴은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우리가 최대한 취할 수 있는 이득은 전부 챙겨놔. 그리고 이게 만약 폭탄처럼 터지게 된다면 그 피해 규모가 어떻게 될지도 유추해 보고. 그에 대한 방비도 만들어놔야 돼.”
“예, 총리님.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총리님-!”
푸틴이 뭐라 말을 이으려고 할 때 SVR국장이 그 말을 끊어버렸다.
찌푸려진 푸틴의 미간에 국장은 사과부터 건넨 다음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 일단 앞에 있는 화면을 좀 봐주십시오.”
국장이 부리는 부하들이 TV를 조작하더니, 이윽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큼지막하게 나왔다.
조지 워커 부시.
미국 재벌들이 밀고 있는 공화당 후보로 이번 대선 승리가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후보님의 방금 발언은 러시아와의 대립각을 이을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맞습니까?”
인터뷰를 하고 있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부시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미국은 그 어떤 나라에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러시아의 독단적인 행동에 우리는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지요.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많은 게 달라질 겁니다. 절대 러시아가 우리 위대한 미국의 주권에 영향을 끼칠 수 없게 할 예정입니다.”
“그 말씀대로라면 냉전 시대가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네요?”
“이미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미국을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푸틴은 손에 잡히는 대로 TV에 던져 버렸다.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떠드는 거야!”
경제적으로도 지금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정치적으로도 흔들고 있다.
당선이 확실시 되는 후보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건 무슨 뜻이겠는가? 앞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예전처럼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이것도 그놈 짓인가?”
“그게… 골든 연합이 전적으로 부시를 밀고 있는 터라 그쪽에서 원하는 방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시가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 그 덜떨어진 놈이? 어차피 그놈도 미스터 블랙, 그놈의 허수아비에 불과하잖아. 거기서 지원해 주는 돈이 없으면 바로 선거에서 떨어질 놈이 감히…….”
이정도의 치욕은 참 오랜만에 느껴본다.
푸틴은 생수 통에 있던 물을 다 들이켠 다음 말을 이었다.
“메데인 카르텔이 지금 뭘 하고 있나 다 알아봐. 러시아에서 골든 연합과 관련이 되어 있는 곳이라면 전부 알아 와! 그리고 철저히 감시해. 언제든지 다 싸잡아 죽일 수 있게!”
“예, 총리님!”
이미 대통령은 뒷전에 물러난 지 오래다.
푸틴의 명령에 따라 장관들과 위원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개같은…….”
푸틴은 들고 있던 생수병을 찌그러뜨리며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건 자신과 미스터 블랙. 러시아와 골든 연합의 전쟁이지 않은가.
그러나 자꾸만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기분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 * *
“로이, 뉴스는 봤습니까?”
“응, 잘 봤어. 그런데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로이 루스테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뉴스와 보고에 벌써부터 어지러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푸틴이 단단히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이다.
“일단 몸부터 피하세요. 마련해 둔 세이프 하우스 없어요?”
“있긴 있지.”
“푸틴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세요. 거기서 휴양 좀 즐기다가 연락받으면 그때 나오시고요.”
“그럴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끽하면 푸틴 손에 죽겠는데.”
“그러니까 피해 있으라는 겁니다. 아무튼, 조심하시고요.”
“알겠어, 워커.”
로이 루스테는 전화를 끊고 길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조직원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보았다.
“이게 뭔 난리야?”
거리에는 광기에 젖은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는데, 아주 열광의 도가니였다.
“해외 자본으로 인해 주식 시장이 급격하게 팽창하지 않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미친 듯이 시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아마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주가가 오르는 걸 보고 기뻐하는 걸 겁니다.”
“쯧쯧, 그게 꿀사과인지 독 사과인지도 구분 못하고 좋아하기는…….”
“그런데 카포. 주변에 벌써부터 FSB 요원들이 붙은 것 같습니다.”
부하의 말에 로이 루스테는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과연 행동거지부터가 수상한 놈들이 주변에 쫙 깔려 있다.
“저놈들 눈 피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까? 우리 세이프 하우스까지 말이야.”
이런 일을 대비해 오래전부터 러시아에 세이프 하우스를 마련해 두었다. 그것도 한 채가 아니라 수십 채를 말이다.
언제 어디서 암살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자리가 아닌가.
과하게 조심을 떤다고 해도 절대 과한 게 아니다.
그만큼 메데인 카르텔은 세계적으로 성장했고 그 정점에 있는 자신은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문제없습니다, 카포. 모시겠습니다.”
“내가 이래서 너희들을 좋아한다니까.”
거기다가 든든한 부하들까지 곁에 있다.
이들은 몇 번이고 로이 루스테가 거르고 걸러 뽑은 조직원들이다.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서라도 메데인 카르텔 카포를 지킬 줄 아는 충견들. 로이는 이들의 인도에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다시 밖으로 나와도 좋다는 연락이 오면 그땐 이와 같은 풍경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