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68화 (168/325)
  • 168화. 차가운 바람 (4)

    IMF사태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엮은 굴비처럼 일어나는 줄도산.

    뉴스를 틀면 부도 이야기밖에 나오질 않는다.

    “오늘 재계 4위 가야 그룹이 부도 신청을 냈으며…….”

    자동차 산업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던 가야 그룹까지 부도를 내버렸다. 거기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제품 생산 라인을 가지고 있는 삼업까지 부도를 냈다. 그 외에도 수백 개의 중소기업들이 동시에 부도를 외치면서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일자리를 잃은 직원들은 거리에 나와 구인에 들어갔고, 사장들까지도 함께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으로 모두가 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이제는 평생직장이 아닌 계약직이라는 것이 생겨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부회장님.”

    오늘따라 임원들은 더욱 깍듯하게 나를 대했다.

    재계 1위인 금양 그룹까지 흔들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화진 그룹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부회장님의 명확하신 통찰력 덕분에 화진 그룹은 미미한 피해조자 입지 않았습니다. 고객의 요청 외에는 해외에 투자한 적도 없고, 진행 중이던 해외 사업도 전부 스톱을 걸어둔 상태라 피해를 입지 않은 겁니다.”

    “하하. 자자, 부회장님을 위해 박수!”

    어느 임원의 발표에 성일환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임원들도 성일환의 말에 따라 격하게 박수를 쳐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 그들은 IMF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열심히 나를 씹어댔을 것이다.

    누구랑?

    지금쯤 거리에 앉아 있을 어느 대기업의 임원과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되었다.

    만일 화진 그룹이 해외 쪽 업무에 치중을 했다면 여기 있는 임원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 다들 사이좋게 텐트를 치며 라면이나 끓여 먹었을 것이다.

    “여러분의 공로가 큽니다. 납득이 안 되었을 텐데도 끝까지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임원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내가 창문 밖으로 뛰어들라고 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이미 그들은 금융사 전 사장이 어떤 식으로 매장되었는지를 보지 않았는가.

    여기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화진 그룹의 법이다.

    “보시다시피 지금 사방으로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끈기 있는 기업, 현찰이 두둑한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중에서 우리를 따라올 그룹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우린 이제부터 바닥에 깔린 음식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야 할 터. 과연 어떤 기업이 먹음직스러운지 각자 리스트를 정리해서 가져다주십시오.”

    “외환 위기로 궁지에 몰린 기업들을 우리 화진 그룹에서 매입한다는 겁니까?”

    “그렇죠. 공격적 M&A도 아닙니다. 그냥 거저줍는 겁니다. 아마 실적은 좋은데 외환 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는 곳들이 꽤 있을 거예요. 그런 곳을 노려 집중적으로 매입할 예정입니다. 이번 외환 위기가 지나가면 우리 화진 그룹이 재계 1위가 되도록 말이죠.”

    재계 1위.

    바라만 봐도 꿈 같은 목표일 것이다. 적어도 임원들에게는.

    “아셨으면 빠르게 움직이세요. 이런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닙니다.”

    “예, 부회장님.”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원들은 회의실 밖을 나갔다. 물론, 성일환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내게 다가왔다.

    “부회장님-”

    은근한 목소리로 부르는 게 심상치가 않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형님.”

    “하하. 그 형님 소리 오랜만에 들으니까 좋네.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렇지. 서로 얼굴은 봐야지.”

    성일환은 계열사 사장, 나는 이 그룹의 부회장이지만 우리 둘 사이는 이미 형 동생이었다. 물론, 성일환이 내 삼촌뻘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서프라이즈로 할 거였으면 말을 해주지 그랬냐.”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경황이 없었네요. 그리고 저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습니다. 뭔가 위기가 올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하긴.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잖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달리 생각해 보면 이리 되는 게 당연한 거야. 30여 개의 재벌 회사들 부채율이 500%을 넘었다고 하잖아.”

    한 가지 의문인 게, 훗날 교과서를 보면 IMF 발생 원인이 국민 탓이라고 가르친다.

    과소비가 불러일으킨 참극이라고 떠들어대는데, 잘 생각을 해보라.

    국민이 돈을 쓰면 쓸수록 소비가 원활해져 오히려 경제가 살아나야 한다. 그런데 일이 거꾸로 흘러갔다는 건 물건을 파는 기업이 잘못을 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현 정권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외환으로 돈놀이를 한 것도 문제이지만, 대기업들이 순 자본율보다 부채에 의존해 경영을 했다는 건 더 치명적인 문제였다.

    기업 부채율이 500%가 넘는다는 건, 망하려고 작정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경영을 해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도 한국 기업들은 돈놀이에 미친놈들이라며 욕까지 해댔다.

    그런데 어떻게 이게 국민 탓이란 말인가?

    “네 선견지명 덕분에 우리는 부채율도 거의 없잖아. 해외 쪽 일 접으면서 수익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냐? 망하는 것보단 낫지.”

    “저희 그룹이야 뒤로 들어오는 돈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외환도 다른 기업에 비해 많을 겁니다.”

    “조사 들어오면 아작 나는 거 아니야?”

    “그럴 일 없습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저한테 굽실거려야 하는데요, 뭐.”

    성일환은 기대감 어린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았다.

    “달러 좀 들고 있나 보다?”

    “하하. 좀만 들고 있겠어요?”

    그럼 그렇지 하며 성일환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너는 난 놈이야.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은 너한테 줄을 댄 거였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사실인데, 뭐. 아무튼, 나도 간다. 네 말대로 주워 담을 회사가 뭐 있나 구경이나 해야지.”

    성일환은 손을 흔들며 회의실 밖을 나갔다.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게 일 하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나저나 주워 담을 회사라…….

    나도 그런 회사가 하나 있지 않던가?

    * * *

    “많이 급하셨나 봅니다. 여기까지 다 찾아오시고.”

    “전화라도 받지 그랬어! 혹시 내 연락을 피한 건가?”

    이강혁은 파랗게 된 안색으로 내 사무실을 거의 쳐들어오다시피 했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나라가 뒤집어졌잖아요. 그것 때문에 저도 수습하며 다니느라 연락이 늦었습니다.”

    “수습? 나도 다 알고 왔어. 화진 그룹은 아무런 피해가 없다면서. 이미 금융권에 소문 다 퍼진 거 몰라? 너희들이 파산 신청한 회사들 전부 삼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를 수 있겠는가?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나인데.

    그 덕분에 화진 그룹 주가가 엄청나게 치솟고 있는 중이다.

    다른 주식들은 전부 휴지 조각이 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 주식만 올라가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하. 운이 좋았죠. 해외 쪽 일이 영 맞지 않아서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게 이런 복을 불러들이네요.”

    이강혁은 의심 어린 눈초리로 날 노려보다 내 허락도 없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난 관대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물 한 잔을 건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왜냐하면 이게 나의 마지막 관대함일 테니까.

    “미국 쪽에 난리가 났어. 우리한테 7억 달러를 빌려준 곳 있잖아. 거기서 갑자기 돈 갚으라고 난리를 쳐대고 있어. 그런데 알잖아. 지금 외환 위기라서 우리도 들고 있는 달러가 없다는 걸.”

    로이가 일을 잘해주고 있다.

    하긴. 메데인 카르텔의 수장인데 남의 돈 뜯는 건 귀신같이 잘할 것이다.

    “그래서요?”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막아줄 수 있겠나?”

    난 모른 척하며 이강혁에게 되물었다.

    “막아요? 어떤 걸요?”

    “어떤 거긴. 우리가 해외에 손 벌릴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자네잖아. 돈 빌릴 수 있게 중개 역할을 한 것도 자네고. 그러니까 이번에도 중개 역을 맡아줘서 이번 고비만 넘기게 해달라고. 우리도 공장 팔고 해외 업무 싹 접으면 어떻게든 돈이 좀 나오긴 할 거야. 나머지는 정부에 지원받아서 세금 좀 뜯어내면 해결되겠지.”

    역시, 천성다운 해결법이다.

    IMF사태의 영향으로 천성도 삐걱거리며 주가가 몇 천 원대로 떨어진다.

    내가 회귀하기 전만 하더라도 200만 원 대를 상회하던 그 유명한 블루칩 천성 주가가 말이다. 하지만 천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국민의 혈세 덕분이었다.

    그들은 정부에 퍼져 있는 라인들을 이용해 국민의 귀한 세금을 뜯어오도록 했고 긴급 수혈을 받아 살아났다. 그에 반해 다른 기업들은 천성이 가져간 혈세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해 쓰러져 버린 것.

    그로 인해 천성과 더불어 몇 개의 대기업들은 IMF사태를 통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들이 된다. 전부 아랫사람들의 희생으로 그리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꼴을 나더러 두 번이나 보라는 건가?

    그럴 순 없지.

    “회장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데, 저도 중개 역할을 간신히 해드린 겁니다. 있는 말 없는 말로 그쪽 사람들을 겨우 설득해서 자본을 끌어들인 건데 저더러 어음을 막아달라는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자네가 힘을 좀 써준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전혀요. 제게 그런 힘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회장님께 돈을 빌려준 그 금융권은 제1금융권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강혁도 이미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제1금융권에서 미쳤다고 천성에게 돈을 퍼다 주었겠는가?

    이런 때를 대비해 내가 오래전부터 만들어 놓은 제3금융권을 통해 이강혁은 돈을 빌렸다. 그것도 무려 7억 달러나!

    이 외환 위기에 어떻게 7억 달러를 갚을 수 있겠는가.

    “제1금융권보다 지독한 게 제3금융권 놈들이에요. 이놈들은 전부 마피아들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돈을 마구잡이로 떼어먹진 않지만, 빌려준 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갚아내게 합니다. 오히려 저도 피해자라고요.”

    “그, 그건…….”

    “회장님이 무리하게 일을 벌이시는 바람에 저도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쪽 사람들이 회장님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면 저한테도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게 아닙니까? 그럼, 앞으로 화진 그룹이 미국 진출을 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요.”

    이강혁은 멍한 얼굴로 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김 부회장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가?”

    “제가 달러라도 있으면 빌려드리겠는데,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나라에서 달러 쥐고 있는 사람 없어요. 전부 다 휴지 조각만 들고 있지.”

    “다른 회사들을 매입한다고 하던데……. 그러려면 달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당장 쓸 달러는 있죠. 그리고 금융권에 퍼진 소문은 전부 뻥입니다. 그냥 주가 올려보려고 우리 쪽에서 퍼뜨린 거죠. 그래도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그룹인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알겠네…….”

    이강혁은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 들이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런 그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던져주었다.

    “일단 저도 최대한 힘을 써보겠습니다. 그쪽에다 전화라도 걸어서 날짜만 조금 조정해 달라고요.”

    그 말에 이강혁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준다면야 바랄 게 없지.”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쪽에서 얼마나 늦춰줄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미국에 직접 찾아가셔야 할 수도 있어요.”

    “당연히 가야지. 회사가 망해 버리는 것보단 낫잖아.”

    그 말, 꼭 지키길 바란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이강혁은 빙긋 웃으며 사무실 밖을 나갔다.

    국민 혈세를 다 뜯어 7억 달러를 갚을 생각을 하다니.

    참 뻔뻔한 놈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더 뻔뻔하게 대갚아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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