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라인 교체 (3)
김강산과 만남을 가진 뒤, 나는 성일환이 있는 명동으로 갔다.
예상대로 한 세트마냥 성일환 옆에는 황규혁이 같이 있었다.
그리고 나온 주제가 의외였다.
“군대요?”
“너 군대 갈 나이 됐잖아. 영장 아직 안 나왔냐?”
아- 군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컴컴해지는 마법의 단어가 아닌가.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영장이 나오기 전에 신체검사부터 받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 그런 공문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성일환과 황규혁은 내 얼굴을 보며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뭔가 알고 있는 것일까?
“뭘 그렇게 쫄아. 너 군대 안 가, 인마.”
“예?”
“큰 형님… 아니, 회장님이 그건 오래전에 해결하셨어. 그리고 너 김동욱 그 새끼한테 칼 맞은 적 있잖아. 그걸로 쉽게 면제받았지.”
성일환은 내게 서류 한 봉투를 던져 주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공익으로 가야 되는 거긴 한데, 그것도 아예 면제 처리해 줬어. 군부 쪽에 우리 라인이 한두 개냐?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끔찍한 곳을 또 들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그런 내 모습을 황규혁이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으휴, 저놈이 각개 전투 소리치면서 뛰어다니는 걸 해봐야 하는데. 유격의 꽃 8번 PT도 해보고. 거기다 혹한기도…….”
이 양반아, 내가 그걸 두 번이나 하라고?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꾹 참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뭐, 아무튼 그건 그렇게 잘 해결이 됐어. 그러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네 할 거 해.”
“감사합니다, 형님.”
“흐흐, 차기 회장님이신데 내가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
성일환의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 회장 안 될 겁니다.”
“그래, 차기 회장이 되어야… 뭐?”
“회장 될 생각 없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성일환과 황규혁 둘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둘은 내가 차기 회장이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모양이다.
“회장 될 생각 없습니다. 회장님 물러나시면 큰 아들인 권오준이 차기 회장이 될 겁니다.”
“무, 무슨 소리야? 널 놔두고 왜 그 버러지 같은 놈이…….”
“그래. 태산아, 네가 대주주잖아. 그럼, 회장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둘의 말대로 나는 언제든 회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언제든 될 수 있으니 아무나 선출해 허수아비처럼 부려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제가 대주주잖아요. 그 말은 제가 원하면 언제든지 회장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그 자리에 앉아서 묶여 있는 건 아무래도 싫습니다. 그냥 얼굴마담 하나 세워두고 뒤에서 조종하는 게 훨씬 더 편하죠.”
성일환은 그런 내 말을 금방 알아들었는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그래, 그게 바로 김태산이지. 이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좋은 건 혼자 다 하고 덤터기는 회장한테 다 씌우겠다, 이거냐?”
“하하, 말이 또 그렇게 와전되는 건가요?”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회장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는 건, 내가 어떤 위기에 빠졌을 때 적절히 희생양으로 쓸 만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오준이라면 희생양으로 쓰기 참 좋은 재료가 아닌가?
“그래도 전반적인 경영은 제가 맡을 겁니다. 권오준은 그냥 제가 승인하는 것에만 싸인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난 또……. 권오준 그놈이 회사 운영해 봐라. 아주 개차반 날 걸?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잘 좀 힘써줘. 그래야 우리도 지분으로 먹고살지, 흐흐.”
“예, 배당금도 두둑이 드릴 테니까 염려 마세요.”
나는 오랜만에 두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셋이 만난 시간은 아침이었지만 다음 날 새벽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때깔이 좀 나온다 싶었더니……. 쯧쯧.”
“인간적으로 네가 그런 말 하지 마라.”
내가 장난스럽게 혀를 짧게 차자 연욱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튼, 축하한다. 연수원도 잘 끝내고.”
“어휴, 말도 마라. 그 짓을 또 하려니까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사법 고시에 합격하면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 2년을 굴러야 한다.
겉으로는 수습 기간이라고 해서 법치 국가의 기본과 법조인의 기본 소양을 배우게 되는데, 말이 기본 소양이지 실제로는 군대 뺨치는 무시무시한 군기를 다잡고 나온다.
선배 법조인에게 절대 반기를 들지 말 것. 절대복종할 것.
이것이 사법 연수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래서 법조인들이 썩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선배 기수가 A라고 하면 후배들은 A라고 할 수밖에 없고, B라고 하면 B라고 해야 한다.
공정성을 지켜야 할 검찰과 법원이 선배와 후배로 나뉘어 그들만의 리그에서 모든 걸 해먹는다면 어떻게 공정한 판결이 나오겠는가?
특히 검찰에서 뒹굴다 나중에 변호사가 되는 사람들은 전부 대기업에서 데려간다.
왜냐하면 그들이 검찰에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대단하기 때문이다.
선배의 말을 하늘처럼.
이것이 모든 법조인들이 가슴에 품고 다녀야 하는 문구이지 않던가?
“좀만 더 고생해.”
“돌겠네, 군대를 또 가야 하다니.”
“흐흐, 그러니까.”
“웃지 마. 죽빵 날리기 전에.”
사법 연수원에서 나오면 대한민국 남자들 모두가 가야 하는 그곳으로 가게 된다.
법조인이라도 군대는 다녀와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연욱이도 내가 빠진 것처럼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면 다녀오는 게 좋을 거다.
보통, 사법 연수원까지 졸업한 사람은 군 장교로 들어가 법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들으면 군대 생활을 편하게 할 것 같지만, 그 과정 중에 겪게 될 빡센 훈련과 선임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따까리 짓을 해야 한다.
일반 장교들보다 법조인 쪽이 더 진상이 많아서 연욱이는 지금쯤 앞이 캄캄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네가 들어가는 쪽 부대랑 거기 있는 장교들이 누군지 다 알아놨어.”
“무슨 말이야?”
“아무도 널 건드릴 사람 없을 거야. 편하게 휴가 나오고 싶으면 나와도 돼. 그냥 3년 동안은 도 닦는다고 생각해.”
연욱이는 검찰 총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미리 연욱이 뒤에 든든한 백이 있다는 걸 모든 법조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그 시작을 군대에서부터 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 연욱이가 들어가는 부대에는 미래의 검사부터 변호사, 혹은 판사가 될 사람들로 넘쳐 난다. 그들에게 연욱이만 특별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법조인들은 바보가 아니다.
제대로 된 라인이 깔려 있어야만 출세를 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미 출셋길을 탄 사람 앞에서 절대 밉보이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연욱이의 발가락이라도 핥으려고 발버둥을 칠지도 모른다. 그만큼 법 세계에서는 줄타기가 절대적이다.
나와 연욱이가 그걸 하지 못해서 그 모양 그 꼴이 나지 않았던가.
“얼른 나와서 이제 네 할 일 해야지.”
내 말을 들은 연욱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성격 알지? 나 한번 파면 석유 나올 때까지 파.”
“잘 알지, 그 불도저 같은 성격.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나와. 내가 일거리 많이 던져 줄게.”
연욱이가 정식으로 검사가 되면 그때부터 나의 칼이 마음껏 휘둘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칼에서 나오는 피로 연욱이는 이 나라의 영웅이 될 터.
그렇게 천천히 나와 연욱이가 이 땅에 잠식하면 된다.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그때가 오는 날까지.
* * *
“김 사장, 나 아주 섭섭해. 요즘 발걸음도 하지 않고 말이야.”
갑작스레 나를 초대한 이강혁 부회장은 익살스러운 말투로 내게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 양반, 벌써 눈치 깐 건가.
“말은 들었어. 화진 그룹이 이번에 지분 나누면서 우리 김 사장한테 다 몰아줬다고 하던데. 역시, 권용일 회장님이 보는 눈은 있는 거야, 그렇지?”
나는 슬쩍 미소를 띠며 김강혁의 잔에도 술을 천천히 따라주었다.
“그냥 절 어여쁘게 봐주신 거죠.”
“그래? 말 들어보니까 아주 거하게 한판 했다고 하던데.”
오성파와 이진용을 말하는 건가.
“불순물을 제거해야 물이 맑아지지 않겠습니까? 좀 번거롭긴 했지만요.”
“그렇구먼.”
나를 불렀다는 건 분명 무슨 용무가 있다는 건데.
난 이강혁이 본론을 꺼낼 때까지 여유로운 자세로 음식을 들었다. 결국 참다못한 이강혁이 운을 띄웠다.
“김 사장.”
“예, 부회장님.”
“내가 듣는 귀가 꽤 많아. 이번에 화진 그룹이 출범하면서 발 빠르게 미국과 일본에서도 투자를 받으며 사업을 한다는데, 벌써 그쪽으로 손을 뻗는 건가?”
저 말대로 나는 미국에 있는 메데인 카르텔과 골든 마피아, 그리고 일본에 있는 야마구치 구미의 힘을 이용해 사업장을 늘리는 중이었다.
일부는 불법적인 곳이고 다른 일부는 합법적인 곳인데, 한쪽은 비자금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쪽은 기업의 이익을 창출해 내는 곳이다.
“시대가 점점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언제까지 한국에 남아 있을 순 없죠.”
“음, 그 말이 맞아. 우리 천성도 한국에서는 대기업이지만, 외국 나가면 손톱의 때만큼도 취급을 못 받아.”
아직 천성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되지 못했다. 당장 금양 그룹과도 1위, 2위를 다투고 있는 실정이 아니던가?
“그래서 말인데, 나도 우리 회사를 외국 쪽으로 발을 디밀고 싶어. 어떻게 루트가 좀 있으려나?”
이것 때문에 날 부른 건가.
그나저나 외국 쪽 루트를 열어달라…….
그렇지 않아도 천성을 어떻게 하면 외국과 엮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강혁이 이놈이 알아서 물어다 주었다.
난 음흉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대답했다.
“외국 쪽 루트라고 하시면… 전자입니까?”
“오, 잘 아네. 일단 전자가 낫겠지? 다른 계열사들도 알아보고 있긴 한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하지만 돈이 꽤 많이 들 겁니다.”
“일단 여기서 돈 좀 땡겨야지. 뭐, 은행에다 말하면 알아서 줄 거긴 해.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
“예, 여기서 달러를 구하기가 쉽진 않죠.”
외국으로 나가려면 결국 달러가 필요하다.
이 나라의 돈으로는 외국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점점 이강혁이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와 주고 있다.
“외국에 제가 급전 땡길 수 있는 곳을 알긴 합니다만…….”
“그래? 생각보다 발이 넓은데. 나도 그쪽 은행을 알아보긴 했는데, 많이 쳐주질 않아서 말이야. 알다시피 우리가 아직 후진국 티를 벗어던지진 못했잖아.”
한국이 급격하게 발전을 하긴 했지만, 외국 투자자들과 기관에서는 아직 우리나라를 흥미로운 투자 모델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당연히 돈도 잘 안 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은행을 통하지 않아도 돈 빌릴 곳은 많지 않은가?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부회장님. 대신, 사업 계획서도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금액도요.”
“아. 물론이지, 김 사장. 역시, 김 사장은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김강혁은 껄껄 웃으며 다시 내 잔을 채워주었다.
이놈이 이렇게 넘어오는구나.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운구기일이다.
천성이 이렇게 내 덫에 알아서 들어와 주다니.
“저도 부회장님과 함께 일하니,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렇게 말을 해주니까 내가 또 부끄러워지네. 자자, 한잔 쭉 들어, 김 사장.”
이강혁은 자신의 목에 줄이 채워진다는 것도 모른 채 실컷 술잔을 들이켰다. 아마 저놈은 지금쯤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천성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저 상상대로 언젠가 천성은 세계에 뻗어나가게 될 터.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일단 천성은 먼저 내 손아귀에 들어와야 세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