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140화 (140/325)
  • 140화. 후계자 (3)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권용일을 만류했다.

    “형님. 그만하시면 됐습니다.”

    그때 난 보았다.

    권용일 입가에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미소를.

    이런. 이거 처음부터 내가 이 영감 손바닥에서 놀아났던 건가.

    권용일은 내가 말려 주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젠장. 이 음흉한 영감탱이.

    “뭐, 태산이 네가 그렇게 말린다면야….”

    권용일은 못 이기는 척하며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눈물 콧물 다 빼놓고 있던 권오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권용일이 아니다.

    “어디서 긴장을 풀어! 아직 얘기 안 끝났어!”

    그 노성에 권오준은 벌떡 일어나 꼿꼿하게 차렷 자세를 했다.

    권용일은 그런 큰아들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태산아.”

    “예, 큰 형님.”

    “내가 자리를 비켜 줄 테니까, 너희 둘이서 얘기를 나눠 봐. 이렇게 앙금을 남긴 채 끝낼 순 없잖으냐?”

    권용일은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고 있다.

    즉, 내가 권오준과 훈훈하게 서로를 용서하는 장면을 보여 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 형님. 잘 알겠습니다.”

    권용일은 슬쩍 자리를 비켜 주며 서재 밖을 나갔다.

    이제 나와 권오준, 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웃긴 건, 권용일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180도 변하는 권오준의 태도였다.

    “참나. 아버지는 뭘 저렇게까지 하시는지. 김 사장도 그냥 맞춰 드린다 생각하고 잊어.”

    이런 미친놈.

    이놈이 정말 권용일의 큰아들이란 말인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란 놈이.

    이럴 줄 알았으면 권용일이 칼 들고 설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걸 그랬다.

    “김 사장도 우리 아버지 성격 잘 알잖아? 그냥 잘 맞추고 끝… 악-!”

    난 냅다 권오준의 정강이를 차 버렸다. 그러자 이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너, 너 이 새끼!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아무래도 이 새끼는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요한 걸 여기서 일깨워 줘야 한다.

    “입 안 닥치면 큰 형님 대신 내가 네 모가지를 비틀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또 겁은 많은지, 이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난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권오준 사장님. 잘 들으세요. 큰 형님이 우리를 이곳에 놔두고 간 건, 단순히 서로 화해하라고 놔둔 게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

    권오준은 뭔가 말을 꺼내려다 내가 눈빛을 번뜩이자 다시 삼켰다.

    “이제는 좀 자각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누가 위인지. 권오준 당신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위로 갈 수가 없어. 그걸 아직도 모르겠으면 이 자리에서 내가 저 칼로 당신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보여 줄까?”

    나는 권용일이 놔두고 간 칼을 들고 권오준의 목에 댔다.

    이놈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치기 시작했다.

    “기, 김 사장!”

    “그러니까 위아래를 좀 깨달으시라고요. 내가 여기서 당신을 죽인다고 해도, 큰 형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 거란 말이요.”

    죽일 생각은 요만큼도 없지만, 내가 정말 권오준을 죽이게 되면 권용일이 가만히 있을까?

    그래도 큰아들이지 않은가.

    당장은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겠지만, 두고두고 이 일을 곱씹으며 내 뒤통수를 치려 할 것이다. 결국, 내가 권오준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건데….

    “내가 미안해. 정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위협은 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려나.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난 권오준에게 손짓하며 소파에 앉았다. 이놈도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다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권오준 사장님. 사장님은 화진 그룹의 회장이 되고 싶으신 겁니까?”

    내 물음에 권오준은 눈알을 굴리다 대답했다.

    “아, 아니야. 내가 감히 그런 자리를….”

    단단히 겁을 먹은 모양이다.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정말이십니까? 전 권오준 사장님께 회장 자리를 드리려고 했는데.”

    “저, 정말이야!?”

    권오준은 깜짝 놀라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내 찌푸려진 눈살에 엉거주춤 다시 소파에 앉았다.

    “예. 정말입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없으신 것 같으니….”

    “아, 아냐. 내가 그럴 리가 있겠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잡아야지.”

    말 바꾸는 건 권용일 뺨 치게 빠른 놈이다.

    뻔뻔한 새끼.

    하지만 내가 이놈에게 회장 자리를 던져 주겠다고 한 건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큰 형님과 지분을 어떻게 나눌지 상의를 하긴 하겠지만, 아마 비등할 겁니다. 제가 좀 더 많을 수도 있고요. 그럼, 제 허락 없이 사장님은 회장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수틀리면 언제든 그 자리를 갈아 치울 수도 있고요.”

    “그, 그 말은 김 사장은 회장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건가?”

    “제가 왜 그런 욕심을 갖겠습니까? 전 소유만 할 뿐, 경영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경영에 도움을 줄 순 있어도 앞에 나서서 경영에 참가하진 않을 겁니다.”

    내 말뜻을 권오준이 조금은 알아들었을까.

    지배하되, 경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나의 철학이다.

    즉,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생겼을 경우에만 나선다는 것이다.

    권오준은 나의 꼭두각시가 되어 가림막이 될 것이며, 나는 그의 숨통을 붙잡은 채로 흔들 것이다. 그래야 밖으로 나의 모습이 노출되지 않고 어둠 속에서 회사를 지배하게 될 것이 아닌가?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권오준의 얼굴을 보니, 이놈은 자기가 회장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였다.

    벌써 한숨이 나온다. 정말 이런 놈을 회장에 앉혀도 되는 걸까. 괜한 사고만 칠 거 같은데.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런 멍청한 놈이 필요하다.

    허수아비 회장. 그리고 그런 상대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지배자.

    이것이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지 않던가.

    “그, 그럼. 내가 앞으로 김 사장 말이라면 뭐든지 따를게.”

    이제야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정확하게 헤아린 듯싶다.

    “예. 꼭 그러셔야 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화진에서는 제일 지독한 놈이거든요. 그러니까 괜히 딴짓을 하셨다가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 김 사장. 내가 잘할 거야.”

    권오준도 원하는 것을 얻고, 나도 원하는 것을 얻었다.

    이게 권용일이 바라던 장면일까?

    훈훈하진 않지만, 그래도 엇비슷하게 마무리가 되었으니 권용일도 이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 * *

    “얘기는 잘 끝냈고?”

    “예, 큰 형님.”

    권오준이 밖을 나가면서 권용일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 멍청한 놈과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권용일과 쇼부를 볼 때다.

    권용일은 내게 잔을 건네며 씁쓸하게 말을 꺼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내 아들 녀석이지만, 너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그 마음, 충분히 헤아려진다.

    나라도 저런 놈이 큰아들이라고 하면 주먹부터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자식 농사라는 것이 다 그렇지 않던가.

    자식 농사만큼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 없다. 물론, 애 하나 낳아본 적이 없는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아닙니다, 큰 형님.”

    “허허.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잘 이끌어 줘라. 나를 봐서라도.”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란 건가.

    멍청한 큰아들이라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자. 이제 우리도 슬슬 일 이야기를 해야지.”

    잠깐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권용일은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내가 제일 고대했던 주제를.

    “어떻게 나눴으면 좋겠냐?”

    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한테 선택권을 주려는 것인가?

    “전 큰 형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를 생각입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버릇없이 냉큼 먹을 순 없다.

    그래도 위아래는 잘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허허. 이런 음흉한 놈. 어차피 네가 다 가지려고 덤빌 거 아니냐. 그런데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그럴 리가요. 전 큰 형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내가 전부 내놓으라고 해도?”

    잠깐 멈칫거렸지만, 난 포커페이스를 되찾으며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설령 권용일이 내 지분 전부를 갈취하려 든다고 해도 나는 가만히 놔둘 생각이다. 언젠가 저걸 다시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난 알고 있으니까.

    “예끼! 이놈아. 내가 네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알았더냐? 그래 놓고 나중에 다 빼앗아 갈 놈이 어디서 앙탈이야!”

    내 속을 꿰뚫어 본 권용일이 껄껄 웃으며 상을 두드렸다.

    “깔끔하게 하자. 55대45 어떠냐?”

    55대45?

    권용일이 55를 갖겠다는 건가?

    내 눈빛을 읽은 모양인지, 권용일은 내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내가 45하고 네가 55하라고. 이놈아.”

    아. 그런 거였나?

    “내가 그런 머리도 없는 줄 알아? 어차피 건설, 화학 쪽 지분 다 섞이면 네가 더 많을 거 아니냐. 그거 복잡하게 계산하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하자는 거지.”

    이미 나는 계산을 마친 상태다.

    외부에 있는 내 국내 기업들을 전부 화진에 합병하면 나한테 떨어지는 지분이 50%는 충분히 넘는다. 그걸 권용일도 알고 있기에 55%를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55%는 너 갖고, 나머지 45%는 좀 뿌려 둬야지. 내 새끼들한테도 몇 %는 떼어 주고…. 아, 우리 막내딸한테도 아낌없이 팍팍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잊고 있던 권윤아의 이름을 꺼내 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구.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놈아. 줄 때 받아.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우리 윤아가 자기 지분을 안 내놓을 거 같냐?”

    권윤아와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부터 관계가 더욱 깊어진 건 사실이다. 그리고 권용일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이미 그는 나를 미래의 사위로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차피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오면 누구 하나는 위에 서야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어. 내 새끼 중 너처럼 뛰어난 놈이 없거든. 그런 놈들에게 가문을 맡기느니, 차라리 네가 맡아 주는 게 낫지.”

    “저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나는 농사를 망쳤지만, 그래도 너는 제대로 할 거 같아서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던져 줄 때 냉큼 받아가, 인석아.”

    권용일은 지분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는 내게 전부 퍼 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55%를 주고 자신은 45%를 가지겠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화진 그룹이 본격적으로 활성화가 되면 지금 있는 간부들도 지분을 가지긴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더욱 책임감을 갖고 그룹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권용일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45%를 쪼개어 나눠 줄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지배력을 더욱 키우겠다는 것.

    “넌 내 후계자야. 그리고 주변에서 분명 잡음이 새어 나올 거다. 옛날 같았으면 그놈 찾아가서 다리를 분질러 놓으면 됐지만, 이젠 그럴 수 없는 거 아니냐?”

    권용일은 그룹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

    그룹이란 결국 누가 더 많은 지분을 들고 있느냐에 따라 상하 관계가 정해진다. 그렇기에 누구도 나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도록 권용일은 튼튼하게 지배 지분을 나누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왕권을 강화하여 나로 하여금 화진 그룹을 완벽하게 통제하도록 하려는 의도다.

    이렇게까지 밀어준다면야 나로써는 더 바랄 게 없지 않겠는가?

    “내가 확실하게 밀어주긴 하겠다만, 너도 약속 하나만 해라.”

    “예, 큰 형님. 말씀하십시오.”

    “내가 널 밀어줬으니, 너도 우리 가족들을 지켜줬으면 한다. 지금 당장은 내가 살아 있으니까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지만, 내가 눈을 감게 되면 분명 우리 가족을 건드리려 하는 놈이 나올 거야. 그게 네가 아니었으면 한다. 그리고 네가 지켜줬으면 해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다.”

    권용일도 사후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건가.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가 가족을 건드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예, 큰 형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누구도 감히 큰 형님의 가족을 건드릴 수 없게 말입니다.”

    권용일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고맙다, 태산아.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이런 약한 권용일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나도 그와 함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훈훈하게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확신은 하지 못하겠다.

    나는 과연 권용일의 가족을 가만히 놔두려고 할까.

    나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그놈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