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후계자 (2)
“그 몸으로 나와도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큰 형님 앞에 가면 저 양반 죽은 목숨일 텐데, 그 전에 얼굴은 봐야죠.”
황규혁은 내 상처를 슬쩍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세히 보니까 크게 다친 것 같지도 않네.”
“좀만 비켜 맞았으면 죽었을 거랍니다.”
“원래 돌팔이 의사들이 다 그렇게 말해.”
말은 저렇게 해도 황규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걱정했던 것이 기억난다.
내게 있는 몇 안 되는 진짜 아군이랄까.
참 고마운 사람이다.
“들어가도 되겠죠?”
“그래. 괜히 다 늙은 양반 얼굴에 주먹이나 날리지 마.”
“최대한 공손하게 말하고 끝내겠습니다.”
황규혁은 들어가 보라며 손짓했다.
나는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처량한 몰골로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이창호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의 앞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창호 씨.”
이미 오성파는 화진파에 의해 완전히 분해됐다.
이창호가 더는 오성파의 보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사라진 조직에 두목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을 아직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인가 보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싸가지 없이 말하는 건 여전하네.”
“그럼, 형님으로 불러드릴까요? 딱 까놓고 말해서, 오성파는 이제 역사 속에 사라진 곳이 아닙니까? 아직도 큰 형님 대접을 받고 싶으세요?”
“입 닥쳐, 이 건방진 새끼.”
“하하. 여기서 누가 더 건방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그냥 이제 나이 먹은 사람에 불과하잖아?”
“이, 이 새끼가… 컥-!”
감정이 격동했는지 이창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정식이가 발길질을 날려 이창호를 다시 무릎 꿇렸다.
“아저씨. 그냥 성질 죽이고 가만히 좀 있지? 괜히 험한 꼴 볼 필요 없잖아.”
정식이의 충고에 이창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진용 그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썩은 동아줄이나 잡을 거였으면 차라리 저한테 올인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적어도 목숨은 살려 드렸을 텐데.”
“내가 너 같은 핏덩이 밑에 들어가라고? 나 이창호야. 이창호라고!!”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빠져 있는 것인가.
역시, 이래서 사람은 낮아지기가 참 힘든 것이다.
“옛날의 이창호라면 몰라도 지금의 이창호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그걸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자존심을 내세우고 싶으십니까?”
이창호도 현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완벽한 패배.
이것이 그에게 닥친 현실이지 않던가.
하지만 가오마저 버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내가 지금이라도 빌빌거리면 살려 줄 마음은 있고? 설령 네가 나를 살려 준다고 해도 권용일 그 양반이 가만있을 거 같냐?”
틀린 말은 아니다.
이창호가 내게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난 이 사람을 제거했을 것이다.
즉, 이창호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사람 대쪽 준 거 끝났으면, 이제 그만 꺼져. 너랑 말 섞기도 싫으니까.”
“아. 사실, 이창호 씨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뭐?”
나는 당황해하는 이창호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 뒤에 있는 이재욱을 불렀다.
“이재욱 씨.”
“…저 말씀이십니까?”
“예. 제가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이재욱 씨를 찾아뵙기 위해서입니다.”
이재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이창호처럼 자신도 개죽음을 당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재욱 씨에게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한테요?”
“예. 이제 오성파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썩은 줄은 버리시고, 저한테 붙으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재욱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은 듯한 얼굴이다. 난 다음 말을 바로 이었다.
“당신은 오성파 같은 허접한 곳에서 썩을 분이 아니었어요. 이제부터 저와 손을 잡으시죠. 전 실장님과 앞으로 많은 걸 하고 싶습니다.”
정식으로 건네는 스카우트 제안.
이창호는 눈이 뒤집힐 것 같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어디서 개수작이야!”
“개수작이라니요.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리고 지금 나는 이재욱 씨와 얘기를 하는 거지, 당신과 하는 게 아닙니다.”
“뭐, 뭐야?!”
나는 이창호의 말을 무시하고 이재욱에게 말했다.
“잘 선택하세요. 여기서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재욱, 당신도 똑같이 여기 있는 이 영감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고 싶으세요? 솔직히 이 양반한테 충성심이 있어서 따른 게 아니잖아요.”
이창호는 얼굴까지 시뻘겋게 변했다.
“재욱아. 저런 개소리를 듣는 거 아니지? 나 이창호야. 여기서 절대 안 끝나!”
이재욱은 그런 이창호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내 말문을 열었다.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요?”
“적어도 오성파에서 맡겼던 일보다는 몇 배 더 대단할 겁니다. 제가 보증하죠.”
“야! 저 소리를 믿는 거야?!”
이창호가 계속 딴지를 걸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정식이에게 손짓했다.
정식이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이창호에게 연달아 발길질을 날리며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제 선택은 이재욱에게 달렸다.
그는 과연 나의 손을 잡을 것인가.
“…죄송합니다, 형님.”
내 예상대로 그는 내가 건넨 손을 잡았다.
“이, 이 배신자 새끼!!”
“거참. 좀 닥치라니까, 겁나게 말 안 듣네.”
이창호는 배신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참다못한 정식이가 더욱더 거칠게 발길질을 날려댔다.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사방에 진을 치고 있던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예, 형님.”
“너희 형님, 밧줄 풀어드려라.”
“예.”
이재욱은 자유가 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창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런 그를 노려봤지만, 이재욱은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싸움 못 합니다.”
“압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당신 상사가 될 사람인데, 말은 편히 해도 상관없겠죠? 내가 몸이나 쓰자고 한다면, 당신을 고용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재욱은 그야말로 오성파의 브레인이었다. 그리고 실무 담당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이재욱은 권용일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화진 그룹에 들어가 자리를 꿰차게 된다.
하지만 미래가 바뀌면서 그는 나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일할 기회를 얻은 일꾼.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마무리 지은 거 같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 이창호 씨에게는 다음이 없으려나요?”
“이 개 같은….”
이창호는 이를 빠드득 갈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재욱과 함께 창고 밖을 나왔다.
이렇게 오성파와의 질긴 인연도 끝이 나는구나.
정말이지 십 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 * *
모든 치료를 받고 안정을 되찾은 권용일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권용일에게는 총 다섯 개의 별장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임시 거처로 쓰게 되었다.
말이 임시 거처지, 내가 볼 땐 앞으로 쭉 여기서 살 거 같다. 천안에 있는 곳보다 훨씬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상처는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다 나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허허, 새끼. 엄살은.”
칼을 세 방이나 맞고 열 번 넘게 베인 사람 앞이라 차마 반박을 못 하겠다.
“제가 좀 엄살이 심한 편이죠.”
권용일은 짧게 웃으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렇게 피셔도 됩니까?”
“뭐 어때. 이거 핀다고 뒤질 거 같냐? 살 놈은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어.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사람은 다 인생이 정해져 있는 거다. 하늘이 정해 놓은 생명줄은 함부로 끊을 수 없는 거라니까?”
저렇게 담배를, 그것도 시가를 뻑뻑 피우는 사람이 검진을 받으면 건강하다고 나오니, 참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는 맛있게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진지한 톤으로 말이다.
“이번 일로 내가 느낀 게 참 많아.”
“죄송합니다, 큰 형님. 제가 좀 더 일찍 이진용의 계획을 알았어야 했는데….”
“아니다. 내가 진용이를 20년 가까이 봐왔어. 그런 나도 녀석을 너무 신용했던 거지….”
권용일은 씁쓸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내서 다행이다. 태산이 네가 없었으면 그냥 홀라당 다 먹혔을 거야. 고생했다.”
“아닙니다, 큰 형님.”
단순히 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말을 꺼내는 것 같지 않았다.
권용일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못을 박는 게 나을 것 같다.”
“못을 박아요?”
“그래. 내가 없어도 화진파가 잘 돌아가야 할 거 아니냐. 정식으로 널 후계자로 삼고 내부 결속을 다져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어.”
순간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드디어 권용일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사실, 화진 그룹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권용일의 재가가 절대적이다.
비록 기업의 이미지를 갖추긴 했으나, 여전히 화진은 과거의 모습이 여실히 남아 있지 않던가.
즉, 권용일이 다 엎어 버리기로 마음먹으면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공 들여쌓아 놓은 탑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권용일이다. 하지만 그가 내게 전권을 위임하고 화진을 맡긴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대가 열리게 된다.
화진파에 속해 있는 간부 중 몇몇은 불만을 품겠지만, 결국 그들도 내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그만큼 후계자 선출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야. 여기서 무너지면 밑도 끝도 없이 무너진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예, 큰 형님. 잘 알고 있습니다.”
화진 그룹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이때에, 더 이상의 혼란은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권용일의 말에 동의한다.
“내일 간부들 전원 소집해서 발표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혹시라도 불만이 있는 놈은 그 자리에서 해결하면 되니까.”
지금쯤이면 간부들도 내가 권용일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불만이 있는 놈을 해결한다는 건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남았다.”
권용일은 구겨진 얼굴로 시가를 재떨이에 비볐다. 그런 다음 밖에다 소리쳤다.
“데려와.”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조직원 두 명이 권용일의 큰아들 권오준을 끌고 데려와 바닥에 던져 놓았다.
얼굴이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두들겨 맞은 듯 보였다.
“아,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난 너 같은 새끼 둔 적이 없으니까.”
차가운 권용일의 목소리에 권오준은 몸을 움찔거렸다.
권용일은 한숨을 푹 쉬며 내게 물었다.
“이 새끼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맘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저기 있는 골프채로 매우 치고 싶다. 하지만 내가 권용일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이 있겠는가.
그건 권용일도 마찬가지다.
권용일이 권오준을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건 단순히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저 빌어먹을 놈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다.
나에게 용서를 빌게 하고 목숨은 건질 수 있도록.
이 후레자식은 이진용과 한 패이지 않았던가. 이놈도 분명 이진용의 계획을 알고 있었을 터. 그럼에도 권오준은 모른 척하며 권용일을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넣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죽여도 전혀 아깝지가 않은 놈이다.
그야말로 공기가 아까운 놈이라는 것이다.
“큰 형님은 제 마음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일 순 없지 않습니까? 전 큰 형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큰 형님이 용서하라고 하시면 용서하겠습니다.”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야….”
권용일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권오준의 목에 칼날을 댔다.
“아, 아버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너 같은 새끼 둔 적이 없다.”
권오준은 오줌까지 지리며 살려달라 빌었지만, 권용일은 그저 차갑게 큰아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지.
설마 정말로 죽이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