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몇 없는 VVIP (2)
“이거, 오랜만이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부회장님.”
뜻밖에도 내게 먼저 연락을 건넨 건 다름 아닌 천성 그룹의 부회장 이강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양반과 조만간 만남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일단 앉아. 여기 일식집 엄청 맛있는 곳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더는 이강혁의 얼굴에 적개심이 보이지 않는다.
저번에 내가 이강혁에게 뜻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로부터 이강혁은 나에 대한 적의를 버리고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이 양반에게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이강찬을 철저히 나락으로 빠뜨리는 일이다.
“요즘 통 안 보여서 나랑은 면식 없이 지내기로 한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잠시 해외에서 일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 뭐, 큰 건이라도 잡았나 보지?”
“그냥 그럭저럭 일하다 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강혁은 내 잔에 술을 채워주며 별 어울리지도 않는 관대함을 보였다.
“아니야. 뭐, 그런 시답잖은 일 가지고.”
그리고 그는 내가 술을 따라 줄 때 본론을 꺼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같이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야.”
상의라.
분명 일방적으로 명령을 할 게 뻔한 새끼다.
“말씀하십시오.”
“음…. 알다시피 닌텐도 사업이 굉장히 히트를 쳤어. 국내 판매량을 보면 뒤늦게 시작한 대마 그룹은 쪽을 찼다고 보면 될 정도야. 아무튼, 그거 때문에 내가 많이 곤란해.”
이강혁은 점점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가고 있는 이강찬을 매우 경계하는 모양이다.
지금 이강혁의 위치는 부회장이다. 그리고 이강찬은 최근에 실장에서 사장으로 승진이 되었다고 들었다.
누가 봐도 아직은 이강혁이 천성 그룹 회장 자리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이강혁은 너무 지나치게 이강찬을 경계하는 바람에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도 이 일에 책임이 있긴 하잖나. 강찬이를 꼬셔서 일본에 데려간 다음, 통 크게도 그 거래를 성사시키고 왔으니까. 아! 물론, 탓하는 건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벼룩 등껍질 마냥 속 좁은 새끼.
저건 내 책임이니 해결을 하라는 압박이다. 하지만 이강혁에게 무조건 고개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
서로 대등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쪽이 명령한다고 해서 따를 필요가 있는 사이도 아니다.
난 술잔을 내려놓고 이강혁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부회장님. 거두절미하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한테 바라시는 게 뭡니까?”
이강혁도 이런 걸 원했는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강찬이 이번에 새로 프로젝트를 하게 됐어. 건설 쪽 일인데, 딴지를 좀 걸어야 할 거 같아서.”
“제가 잘못 나서게 되면, 천성 그룹 회장님이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이 친구야. 우리 대왕님이 그런 거로 나서는 거 봤어? 그랬으면 여의도가 화진파 손에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겠냐고.”
멍청한 놈.
여의도 때도 이철호가 나서서 그나마 그렇게 마무리가 된 것이었다. 그때 조금만 엇나갔어도 이강혁은 지금쯤 흙냄새를 맡고 있었을 터.
이놈은 벌써 그때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은 모양이다.
난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철호 회장님의 개입은 없다는 겁니까?”
“그래. 내가 보증할게. 그리고 그만한 미끼를 던지면 될 일이야. 우리 회장님은 더 큰 이익을 좇는 분이거든.”
이철호의 성정이야 나도 잘 알고 있다.
자식들보다는, 먼저 회사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권용일과 많이 닮았다.
“이번에 이강찬이 건설업을 맡으면서 세력을 넓히려고 하거든. 그걸 좀 막아줬으면 해서.”
이강찬에 대한 소식은 나도 애들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듣고 있다.
“천성 그룹이 용우 건설을 매입해서 건설업을 더욱 활성화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이강찬 실장이…. 아니죠. 이젠 사장이군요.”
이강혁은 속이 좀 쓰린지 술잔을 바로 비워버렸다.
“그래. 그 새끼가 어울리지 않는 사장 자리를 꿰찼어. 그런데 그놈, 야망이 있는 놈이야.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자리까지 노리려고 하겠지.”
오호.
이강혁이 마냥 병신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이강찬이란 인간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건가.
그나저나 화진파를 이용해 용우를 건드린 다라-.
조폭을 써서 건설 회사를 방해하는 건 90년대까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솔직히 이런 일은 우리가 전문이라는 것이다.
이강혁이 사람을 아주 제대로 찾아왔다. 하지만 역시 걸리는 건 천성 그룹 회장 이철호다.
“용우 건설이라…. 그런데 회장님의 개입은 없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뭐…. 그렇지.”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아주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이거 왜 이러나. 우리가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김 사장, 자네가 위기에 빠지면 내가 어떻게든 구해 줄 거야.”
웃기는 놈이다.
이철호 회장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놈이 무슨….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용우 건설을 건드리는 순간, 이철호 회장은 분명히 나를 호출할 것이다. 자신의 영토를 침범한 도적놈을 가만두고 보겠는가?
그 이철호가?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말씀을 믿고, 제대로 사고 한번 쳐 보겠습니다.”
“하하! 내가 이래서 김 사장을 좋아한다니까? 아주 시원시원해.”
“저야 당연히 미래의 천성 회장님께 잘 보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저 오른팔처럼 써 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의 말에 이강혁은 아주 좋아 죽겠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우리 김 사장이 아주 유능한 인재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이런 인재를 쓰지 않으면 내가 회장이 될 수 있겠어?”
좀 띄워주니 좋단다.
난 거짓 하나 없어 보이는 미소로 이강혁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예, 회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거참, 나만 믿으라니까?”
내가 이강혁에게 원하는 건 이강찬을 철저히 나락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놈이 내게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이놈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지 않겠는가?
* * *
“아니. 바쁘신 양반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실까?”
황규혁은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툴툴거리며 받아주었다.
요즘 얼굴을 통 비치지 않으니, 삐지기라도 한 건가.
“죄송합니다, 형님. 일이 바빠서요.”
“아이고. 내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우리 화진파에서 중요한 일은 김 사장이 다 하는데.”
쩝. 이런 일에 시간을 버리려고 온 건 아닌데.
아무래도 기분을 좀 풀어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형님과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 하려고, 저번에 선물로 주신 잔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로얄 샬루트도 챙겨 왔으니, 좀 봐주세요.”
황규혁은 팔짱을 낀 자세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새끼. 아무리 바빠도 이 형한테는 얼굴 좀 보여라.”
이제야 풀렸나 보군.
난 그에게 잔을 건네며 대답했다.
“예, 형님.”
그러자 황규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예? 일이라뇨. 그냥 술이나 한잔 하려고 온 겁니다.”
“구라치지 말고, 인마. 네가 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그냥 오는 놈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놈이?”
나를 한두 번 겪어보는 것도 아니니, 황규혁은 아주 척하면 척이었다.
난 양주병을 내려놓고 조용히 운을 뗐다.
“사실은… 이번에 애들을 좀 동원하려고 합니다.”
“새끼. 역시, 뭔 일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애들을 동원해? 여의도에 있는 애들 쓰면 되잖아.”
“그렇긴 한데, 베테랑들이 필요해서요.”
황규혁은 한 번에 술을 입에 털어 넣은 다음, 내게 물었다.
“베테랑들? 그런 거라면 확실히 여의도에 많긴 하지. 좀 전문적인 일인가?”
“예. 건설사 하나 찌르는 거라서요.”
건설사 쪽을 치는 건 전문적인 일로 나뉜다.
그냥 무턱대고 조직원들을 끌고 가서 뒤엎어 놓는 게 아니라는 것.
자제를 강탈하거나, 혹은 공사판에 있는 노동자를 꼬드겨 아예 일을 정지시켜버리는 방법도 있다. 그 외에도 건설사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런 쪽의 일을 많이 해 본 베테랑이 아니라면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황규혁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건설사를 찌른다는 거냐?”
“용우 건설이라고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용우 건설 이름이 나오자, 황규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용우 건설이 어디 나와바리인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
“천성 그룹이 매입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어코 그걸 치겠다?”
“예. 그쪽 부회장이란 양반이 건드려 달라고 부탁을 해서요.”
황규혁은 입에 넣던 술을 살짝 뱉을 정도로 놀란 반응을 보였다.
“부회장? 이강혁? 아니, 그 새끼가 갑자기 왜 너한테….”
“아. 예전 일은 다 풀었어요. 지금은 서로 돕고 사는 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왜 그런 새끼랑 어울려?”
“하하. 나중에 거하게 뒤통수 한 번 치려고요.”
내 대답에, 황규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마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뭐, 네가 병신도 아니고 천성을 함부로 건드리진 않겠지.”
“여의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탈 없게 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실 거죠?”
“내가 언제 네 부탁 거절한 적 있냐? 이 형만 믿어라.”
역시, 이럴 때는 황규혁만큼 든든한 지원군이 없다. 나는 다시 공손하게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허허. 그래. 어디 가득 채워봐라.”
오늘은 하루 종일 황규혁 옆에서 재롱을 떨어줘야겠다. 아무런 대가 없이 조직원들을 빌리는 건데,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안녕하십니까, 형님!!”
황규혁이 보낸 조직원 수는 20명.
이들은 여러 번 건설사들을 괴롭힌 경험이 있는 놈들이다.
용우 건설이 아무리 천성 그룹의 소유라고 해도, 이런 놈들이 꼬여 들면 굉장히 골치 아플 것이다.
그래서 건설사마다 조직에게 보호를 받곤 하는데, 상대가 화진파라면 대부분 꼬리를 내리고 철수하게 될 터.
그럼 편하게 용우 건설을 어지럽힐 일만 남는다.
“황규혁 형님한테 들었겠지만, 우리가 쑤셔야 할 곳은 용우 건설이다. 그러니까 다들 최선을 다해서 제대로 엎어 봐.”
“예, 형님!!”
생긴 건 매일 싸움이나 하는 황소들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이래 봬도 전문가들이다. 이미 이들은 조직원 몇 명을 용우 건설로 투입해서 물밑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용우에서 반응이 오는 데 얼마까지 걸릴까?”
“일주일 안에 뒤집어 보겠습니다, 형님.”
일주일이라.
생각보다 진행이 상당히 빠르다.
“일주일? 그게 가능한 거야?”
“건설사가 취약한 곳이 정말 많아서요. 이리저리 파고들면 그놈들도 정신 못 차릴 겁니다.”
일주일 안에 건설사 하나를 흔들어 놓을 수 있다니.
역시, 80년대에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이건가?
“어떤 식으로?”
“뭐, 건설사야 자제 삥땅 치는 건 다반사 아닙니까? 그런 걸 꼬투리 잡아서 신고해도 되고요. 아니면 아예 힘 좀 써서 중간에 자제들을 다 가로채면 됩니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을 규합해 건설사에 엿 먹이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죠.”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다.
21세기에 들어서도 80년대에 쓰던 방법이 꽤 잘 먹힌다. 왜냐하면, 건설사는 금융업처럼 디지털화가 된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산지를 바꿔서 비자금을 챙기는 수법은 건설사의 기본이지 않은가?
그런 자제를 중간에 빼돌리거나, 아니면 노조를 이용해 건설사를 흔드는 건 20세기나 21세기나 똑같다.
“지원은 아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예, 형님!”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명령만 하면 되니 마음이 아주 편하다.
과연 황규혁을 찾아가기 잘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황규혁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해야겠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끝이다.
나는 그저 이들이 어떻게 용우 건설을 흔들어 놓는지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용우 건설 소식을 듣고 진노하게 될 이철호 회장의 호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