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왕과의 만남.
“노일영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기성세대 반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 백만 학도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노일영의 당선을 두고 명동성당에 모인 수백 명의 고등학생이 구호를 외치며 현 정부를 비판했다. 하지만 소수의 인원만 이 시위에 관심을 가질 뿐, 항상 그렇듯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티끌만큼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노일영이 당선된 순간부터 이미 승패는 보수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진보 정당에 싹싹 기고 있던 기업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것.
그에 반해 미리 노일영 라인을 타고 있던 화진파에게는 화려한 출셋길이 열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
“허허. 내가 네 덕분에 노일영 그 양반에게 감사 인사도 다 받아보고, 아무튼 이번에도 네가 크게 한 건 했다.”
권용일은 오늘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노일영이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 그는 직감했을 것이다.
대박을 터트렸다고.
“제가 한 일이 뭐 있겠습니까? 큰 형님이 지원해 주셨으니까 노일영 대통령이 고맙다고 연락을 주는 거겠죠.”
“가끔 보면 네놈은 겸손한 건지, 아니면 교만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얄미운 새끼.”
말은 그렇게 해도 권용일은 슬쩍 내게 찻잔을 건넸다.
“그래서, 조만간 미국으로 날아간다며?”
“예. 동생이 프로 복서로 데뷔하는 날이라서요.”
선거가 끝나고 대충 조직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나는 미국으로 갈 채비를 했다.
곧 있으면 태혁이의 데뷔전이지 않던가.
1월에 경기를 치른다고 했으니, 그전에 가서 응원도 하고 오랜만에 강철중과 김아름 얼굴도 봐야겠다.
그리고 태혁이의 경기도 중요하지만, 88년은 미국 대선이 있는 해이다.
콘트라 게이트로 크게 타격을 입은 부시 부통령을 구원해 줄 사람은 바로 나밖에 없다. 그를 돕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미국에 가긴 해야 한다.
물론, 선거를 진두지휘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그저 김아름을 부시 옆에 두고 하나씩 명령을 전달할 생각이다.
“으음. 그럼, 뉴욕에도 들르겠구나?”
이 양반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군.
뉴욕을 언급하는 걸 보면, 또 시간이 나면 권윤아를 만나라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윤아 씨를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워낙 일이 바빠서 그동안 미국에 가질 못했으니까요.”
“허허. 뭐, 꼭 그러라는 건 아니지만 네가 가끔 가주면 나야 좋지. 그 녀석도 기댈 만한 친구가 필요하니까.”
“예, 큰 형님.”
난 눈치껏 대답했다. 그리고 나도 권윤아가 싫진 않다.
성격도 괜찮고, 생각보다 순한 사람이다. 물론, 내가 그녀에게 접근한 건 어디까지나 화진파를 접수하기 위함이다.
권용일도 뻔히 그걸 알면서도 권윤아와 나의 관계를 말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가장 지독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신의 딸마저도 조직을 위해 이용하는 권용일이지 않을까?
혈육에 이끌려 조직을 홀라당 자식새끼한테 넘겨 줄 만도 한데, 권용일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참 대단하게 지독한 양반이다.
“너무 오래 있진 말고. 건설업도 할 일이 많다. 너 빠지면 곤란해. 그 양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아마 논공행상 같은 걸 할 거야. 그런 건 땅만 한 게 없거든. 분명 이번에도 신도시다 뭐다 해서 시작하겠지. 그때 우리 화진이 낚아채야 해.”
눈치 하나는 정말….
권용일 말대로 노일영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신도시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아직 시간이 남긴 했지만, 권용일은 본능적인 직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걸 또 눈치를 채다니.
하지만 저건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정부의 신도기 개발은 절대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모두 윗대가리들이 자기들끼리 해 먹는 그렇고 그런 땅 먹기 게임인데, 새로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이런 짓을 서슴지 않고 한다.
대통령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에게 섭섭지 않은 보상을 해 줘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미국에 뿌려둔 씨앗이 워낙 많으니까.
* * *
“사장님.”
여전한 외모다.
아니, 전보다 훨씬 더 빛이 나는 듯한 얼굴로 김아름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 옆에는 강철중도 함께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사장님.”
“아. 멕시코에 계신 줄 알았는데….”
“사장님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바로 들어왔습니다.”
“괜한 수고를 하셨네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멕시코로 넘어갈 생각이었거든요.”
“멕시코까지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김아름과 달리, 강철중은 얼굴이 많이도 탔다. 그래도 저번보다 훨씬 더 활기찬 얼굴이다.
강철중은 내가 준 돈으로 멕시코와 미국에서 퇴역 특수 부대 출신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리턴 컴퍼니의 든든한 지원이 있으니, 강철중은 최고의 인원들로만 선발하는 중이라고 들었다.
말이 조직이지, 하나의 군사 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강철중도 특수 부대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런 쪽 일에는 아주 빠삭하다. 아마 조금만 기다리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직을 만들게 될 것이다.
내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무자비한 살인 병기로 변하는… 바로 그런 조직이랄까?
“파트너! 드디어 왔네.”
그런데 이건 뜻밖의 손님이다.
로이 루스테도 함께 와 있었다니.
“로이도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네요. 그동안 잘 있었어요?”
“하하. 말도 마. 누구 때문에 개고생만 하다가 겨우 목숨만 건졌으니까.”
콘트라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로이 루스테의 입지가 불리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와 손을 잡으면서 그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지원해 주는 건 전부 내 몫이었다.
좀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로이 루스테를 앞장세워 메데인 카르텔을 손아귀에 넣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장기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로이 얼굴을 보니, 메데인 카르텔에서 척살령을 내리진 않은 모양이다.
그럭저럭 위기를 잘 넘겼다는 것일까?
“어디로 모실까요?”
공항 밖을 나오자 이미 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나는 뒷좌석에 타서 김아름의 물음에 대답했다.
“태혁이가 있는 곳으로 가 주세요.”
* * *
“형!”
열심히 샌드백을 치고 있던 태혁이는 글러브를 벗어 던지고 내게 달려왔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캐리어에서 미리 꺼내온 것을 건넸다.
“이게 뭐야?”
“어머니가 해 준 닭갈비. 이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며. 그래서 내가 어렵게 가져왔어.”
“우와! 진짜?”
세관을 통과시킬 때 좀 까다롭긴 했지만, 그래도 동생이 먹고 싶다는 걸 주고 싶었다.
“그래. 이따 집에 가서 팬에 데워 먹어.”
“고마워, 형.”
경기 일정이 잡혔는데도 태혁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걸까.
오히려 내가 다 긴장될 정도다.
“곧 데뷔전인데, 안 떨리냐?”
“응? 뭐…. 그냥 그래.”
그냥 그렇다니.
이놈도 참 웃긴 놈이다.
“그냥 그렇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거?”
“그렇지. 나, 이길 사람은 아마 현역 중에 거의 없을 거야.”
그리고 이 밑도 끝도 없는 대단한 자신감까지.
정말 김태혁답다.
이런 녀석의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내가 아는 김태혁이라면 충분히 세계를 제패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 형이 데뷔전 때 응원 갈 테니까, 열심히 하고.”
“알겠어. 내가 1라운드에 끝낼 테니까, 돈이나 많이 걸어.”
1라운드에 끝낸 다라.
점점 기대가 되는 태혁이의 데뷔전이다.
* * *
“미스터 강한테 얘기는 들었어?”
로이는 자신이 운영하는 칵테일바에 나를 초대했다. 몇 번 와본 곳이라 익숙하긴 하지만, 리모델링을 좀 했는지 저번보다는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다.
“어떤 걸요?”
“네가 요즘 조직원들 모으고 있다며. 그것도 베스트들로만.”
로이는 강철중과 함께 멕시코로 가서 내 일을 도와주었다.
아무래도 이쪽 계열 마피아들을 모으는 일이다 보니, 네임드인 로이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로이는 내게서 돈을 받아가 메데인 카르텔 내부에서의 힘을 키우는 중이었다.
“그만큼 지켜야 할 돈이 많으니까요. 물론, 메데인 카르텔 카포보단 아니겠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마약을 전부 처분하게 되면 무려 30억 달러라는 돈이 쏟아진다.
30억 달러.
한화로는 3조 원.
실로 어마어마한 가치가 아닌가?
하지만 메데인 카르텔의 카포, 파블로 에스코바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그는 마약을 팔아 무려 수백억 달러의 돈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이니까.
“미스터 강의 수완이 꽤 좋더라고. 특수 부대 쪽에 인맥도 많은 거 같고. 그래서 그런지 네가 모은 조직원들의 퀄리티가 상당히 좋아. 이건 뭐 조직원이라기보다는 그냥 특수 부대라고 해도 될 거 같아.”
강철중이 그만큼 일 처리를 잘 했다는 뜻이다.
“로이는 요즘 어때요? 상부에서 로이를 죽이려고 난리 치지 않았어요?”
반쯤 농담 섞인 내 물음에 로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도 마.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랑 약 같은 거를 전부 바치니까 살려는 주더라고. 그래도 메데인 카르텔 내부에서 은밀히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좀 있어서 말이야.”
“지금 자기자랑 하는 거예요?”
“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
대충 들어보니, 차근차근 메데인 쪽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두는 거 같긴 하다.
하지만 느긋하게 할 시간은 없다.
“서두르세요, 로이. 조만간 기회가 올 거니까.”
“기회라면…?”
“곧 대선이에요. 대통령이 바뀌고 나면, 뭐부터 할 것 같아요?”
“잘 모르겠는데?”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내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건 리턴 컴퍼니의 소유주님께 달린 거 아니겠어?”
이 사람은 내가 리턴 컴퍼니의 실소유주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리턴 컴퍼니가 콘트라 게이트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나는 로이에게 이미 말을 해 둔 상태였다.
이번 대선의 승자는 반드시 부시가 될 거라고.
“기회는 정말 짧은 순간에 올 겁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승패를 결정하게 될 거예요. 전 로이가 잘 해낼 거라 믿습니다.”
“하하. 걱정하지 마.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 최선을 다해 볼게.”
로이의 대답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는 잔을 들이켜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말이야. 조만간 멕시코로 갈 거지?”
“예. 그래야겠죠? 제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해서요. 강철중 씨를 믿긴 하지만, 제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완전히 믿는 건 없어요.”
“올바른 자세네. 그래도 미스터 강은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사람인 건 맞아.”
로이를 강철중 옆에 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강철중은 로이를 감시하고, 로이는 강철중을 감시하게 하는 것.
어차피 둘 다 부딪힐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둘은 은밀히 서로를 경계하는 중이다. 그래도 강철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가 듬직하다는 것이겠지.
“음…. 그런데 멕시코로 가면 좀 껄끄러운 일이 하나 있을 거야.”
로이는 어울리지 않게 무게를 잡으며 천천히 잔을 흔들고 있었다.
뜸을 들이는 것 보니, 말하기 좀 어려운 주제인가?
“뭔데 그래요? 어서 말해 봐요. 갑자기 왜 그러는지.”
내 말을 들은 로이는 깊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곧 멕시코로 카포가 올 거야.”
카포라면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말하는 것이다.
멕시코야 원래 그의 무대이니, 그곳을 방문하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단지, 현재 미국 정부가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좀 위험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요?”
나는 별생각 없이 말을 받으며 블루 오션 칵테일을 입에 머금었다.
“카포가 왜 멕시코에 오는 줄 알아? 네가 미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다음 로이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잔을 엎을 뻔했다.
“카포는 널 만나고 싶어 해. 멕시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