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폭풍 속으로 (1)
“대학 생활은 어떠냐? 할 만해?”
“말도 마세요. 벌써 깡패 두목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하하! 들었다. 우리 애들이 너 데려다준다고 한바탕 난리 쳤다며?”
조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배웅해 준 것도 모자라, 강의가 끝나는 시간까지 맞춰서 달려오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내가 경서 연합의 회장 김태산이라는 걸 알아본 애들까지 있었다. 결국, 소문은 더욱 확산 중이다.
그 덕분인지, 선배가 후배를 모두 불러 똥군기 잡는 일은 우리 학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거 받아라.”
황규혁은 잘 포장된 박스 하나를 건넸다.
“입학 선물이야.”
입학 선물?
난 기대감에 박스를 풀어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잔들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작은 양주잔부터 칵테일 잔까지, 가지각색이다.
“이건….”
“네가 나이 핑계 대고 술 잘 안 마셨잖냐. 이제 맘껏 마시라고 주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이것들로 술 마시고 그래. 알았어?”
“….”
입학 선물이 술잔이라니.
참 놀라운 발상이다.
“감사합니다.”
“뭔가 표정이 별로인데, 설마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황규혁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으나 이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뭐, 이제 학교 다니느라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겠다.”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학교 갈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럼, 이거 한 번 봐볼래?”
기다렸다는 듯 서류 뭉텅이를 내 앞에 꺼내놓고 황규혁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대진 건설 인수하면서 나온 서류야.”
난 서류를 대충 훑어봤다. 이건 대진 건설의 장부였다.
검사 시절 때 이런 서류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척하면 척이었다.
“이 새끼들 어마어마하게 뜯어 먹었네요.”
“응? 뭐를?”
“환치기라고 아세요? 공사 자재들의 원산지를 속여서 돈 빼먹는 건데, 이놈들 꽤 많이 해 먹었어요.”
“그래? 넌 이런 것도 볼 줄 아냐?”
“뭐…. 여기 서류만 보면 알 수 있죠.”
장부를 조작하려면 좀 교묘하고 정교하게 해 놓던가.
이건 너무 수작이 빤히 보이게 써 놓았다.
황규혁이야 이게 다 뭔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하겠지만, 나 같은 사람들 눈에 찍히면 바로 견적이 나온다.
“그런데 왜 이 서류를 형님께서….”
“아. 그거 큰 형님이 너 보여 주라고 주신 거다. 나 보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역시, 영감이 내 능력을 테스트해 보려고 일부러 이런 걸 보낸 건가.
“그리고 그거 받는 대로 천안에 내려오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
“…예? 지금요?”
“왜. 안 돼? 어차피 학교도 안 간다는 놈이 뭘 한다고…. 여의도도 지금 당장 네가 다 관리할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빨리 가. 괜히 불호령 떨어지게 만들지 말고.”
이런, 오늘은 주말이라 집에서 좀 쉬려고 했더니.
이놈의 영감탱이가….
하지만 어차피 권용일을 한 번 만나보긴 해야 했다.
곧 있으면 그날이다.
지금 시기가 1987년 3월.
앞으로 3개월만 더 있으면 현 정부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 나라에 새로운 태양이 뜨게 될 것이다.
* * *
“부르셨습니까, 큰 형님.”
항상 장난스럽게 내 인사를 받아주던 권용일이 오늘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뭔가 일이라도 난 건가.
“일단 앉아라.”
“예, 큰 형님.”
그는 내가 착석하기 무섭게 서류 하나를 앞에 던졌다.
“이거 봤냐?”
영등포에서 봤던 그 서류다.
“예. 황규혁 사장이 준 걸 봤습니다.”
“어떻디?”
설마, 권용일은 이 서류가 뭘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권용일이 모를 리 없다. 그는 분명 전문가라도 고용해서 대진 건설의 뼛속까지 파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그냥 단순히 테스트?
굳이 내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대진 건설이 참 많이도 해 먹었더군요.”
“그래?”
이 양반, 또 모른 척 묻고 있다.
“예. 자재 원산지를 속이고 비자금을 두둑이 챙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회사를 인수하시기 전에 이것부터 해결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으니까요.”
각 그룹이 건설업에 발을 담그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비자금을 탈취할 수 있는 곳이 건설업이지 않은가.
80~90년대까지는 건설업과 금융업으로 대기업들이 비자금을 탈취해왔다. 하지만 시대가 디지털화되고 전산망이 생겨나면서, 금융업으로 비자금을 챙기는 건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건설업은 비자금 창고로써 제 임무를 다 하게 된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새끼들이 전부 나한테 덤터기 씌우려고 벌인 짓이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허. 그놈들 참.”
대진 기업이 영감님에게 싼값으로 회사를 넘기려는 이유가 다 있다.
문젯거리 전부를 이 영감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권용일이 바보도 아니고, 설마 그런 장난에 놀아나겠는가?
대진 놈들,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지독한 영감을 건드리다니.
“그런데 네놈은 허구한 날 밖에 나돌아다니면서 이런 건 또 어떻게 척척 알아보는 거냐? 공부도 안 하는 놈이.”
“저… 공부는 꽤 합니다.”
“예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권용일은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네가 말한 대로 이 새끼들이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라면… 조만간 이놈들부터 잡아야겠다.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냄새가 난단 말이지.”
“어떤 냄새요?”
“이놈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접근을 한 이유가 말이야. 뭐일 거 같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진 기업을 보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냄새가 난다. 이 정도 악취가 날 정도면 거물이라는 건데….”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권용일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권용일이 대진 건설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화진 건설을 시작하긴 하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설마 그때도 이렇게 누군가의 장난질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로 인해 미래가 바뀌면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어렵다.
내가 모르는 상황이 벌어질 땐 판단을 내리기가 참 어렵다.
이것이 나의 약점이려나.
“큰 형님의 뒤통수를 때릴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이 가는 놈들이 있다.
“오성파인가요?”
권용일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놈들일 가능성이 크지. 근데 오성파만 움직인 건 아닌 거 같아.”
오성파와는 언젠가 한 번 터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성파와 다른 놈들이 끼어 있다는 건가?
“다른 놈들이라면….”
“대한민국 땅에서 나 건드릴 사람이 오성파랑 또 어디 있겠냐? 저 탱크 위에 계신 분들이지.”
군부란 말인가….
하필이면 까다로운 군부한테 걸리다니.
하지만 갑자기 그들이 왜?
“군부와 사이가 틀어지신 건….”
“아니야. 네가 저번에 말했지? 군부랑 잘 쇼부를 봐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네 말이 맞다. 군부 쪽 애들이랑 손을 잡아야 우리도 먹고살 수 있는 거야.”
권용일은 군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저지르는 방산 비리를 권용일이 도맡는다면, 화진 그룹이 챙겨갈 이익은 굉장할 것이다.
“그럼, 갑자기 그들이 왜….”
“내가 군부 쪽 사람들이랑 전부 친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냐. 그쪽에도 파벌이라는 게 있으니까.”
쉽게 말해서 권용일과 친한 곳이 있다면, 반대로 적대적인 곳도 있다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 오성파에게서 돈을 받고 있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글쎄다. 아직은 생각 중이다. 그래서 널 부른 거고.”
내게 서류를 보여 준 건 단순히 테스트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나.
나도 좀 고민이 되긴 한다.
군부가 관련되어 있다면, 이건 그냥 무식하게 밀어붙일 수 없는 일.
“한 잔 줄까?”
“아, 예. 감사합니다.”
“너도 어지간히 고민이 되나 보구나. 술을 다 받고. 아니지, 이제 성인이니까 제대로 마셔보기로 한 거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허허. 일단 한 잔 받아봐라.”
난 권용일이 따라 준 술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이게 무슨 술이지?
양주는 아닌 거 같은데 굉장히 풍미가 좋은 것 같다.
뭔가 약초 맛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맛이 어떠냐? 너 한 잔 주려고 내가 아끼고 아껴둔 거 꺼낸 거야.”
“혹시 이거… 인삼 뿌리라도 넣으신 겁니까?”
“이놈아. 고작 인삼으로 만든 걸 내가 왜 아껴. 산삼이다.”
왠지…. 건강한 맛이 난다 했다.
그런데도 쓴맛은 크게 나지 않고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게 참 신기했다.
꽤 도수가 센 술을 마셔서 그런지,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민되던 문제가 천천히 풀리는 것 같았다.
“큰 형님.”
“그래.”
“대진 건설 인수 건은 최대한 미루실 수 있나요?”
“최대한? 언제까지.”
“앞으로 3개월만 시간을 끌어 주세요. 그럼, 방법이 나올 겁니다.”
권용일은 조금 고민하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3개월? 시간을 끌면 방법이 나온다고?”
“예. 3개월이면 군부 쪽에 큰 변화가 있을 겁니다. 그땐 저희를 치고 싶어도 치지 못할 게 분명해요.”
권용일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며 시가를 비비고 입을 술로 축였다.
“뜬금없이 3개월은 또 뭐고, 군부 쪽의 변화는 또 뭐냐?”
“현 정부가 무너질 기간이 3개월 남았다는 겁니다.”
“뭐야?!”
어지간히 놀랐는지 권용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성을 질렀다.
“진정하세요, 큰 형님.”
“아니. 그게 정말이냐? 정말 3개월 후에 현 정부가 무너진다고? 그 양반이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거야?”
“예. 당장 물러나진 않겠지만, 독재 정권을 마무리할 겁니다.”
“무슨 근거로?”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긴 하다.
아직 6월 항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현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정부가 국민들 손에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미 정부도 국민의 편입니다. 현 정부에게 대놓고 경고를 하고 있어요. 이대로 놔두다간 우리나라가 붕괴한다는 걸 그쪽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미국 때문에 우리나라 정권이 무너진다 이거냐?”
“수많은 국민이 들고일어나는 중입니다. 앞으로 이런 상황은 더 심해질 거예요. 그리고 미국이 압박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노땅들이 물러나려고 할까?”
난 저번 날 권용일에게 꺼냈던 말을 되풀이했다.
“큰 형님. 제가 저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현 정부는 일부러 독재 정권을 끝내려고 할 겁니다.”
“응? 아. 저번에 네가 그랬지? 현 정부가 일부러 물러나는 척하면서 진보 정당들이 서로 싸우게 할 거라고.”
“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만약 대통령이 독재정권의 끝을 알리게 된다면 누가 가장 선두에 서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거야….”
떠오르는 두 명.
흔히들 말하는 양김이 진보 정당의 영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현 정권이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서로 죽고 못 살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진다.
국가 원수라는 자리 앞에서는 아무리 깊은 동지애라도 전부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3개월?”
“예. 군부에서 저희를 도저히 신경 쓸 수 없을 때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미뤄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허. 네가 알아서 한다고? 정말 네가 해결할 수 있는 거냐?”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권용일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태산아.”
“예, 큰 형님.”
“내가 저번에 말한 것 때문에 무리하는 거라면….”
저번에 말한 거라면 혹시 막내딸 이야기인가.
난 권용일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큰 형님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전 항상 똑같이 행동할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지 하는 것. 그게 바로 제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다.
이게 다 권용일이 준 산삼주 덕분인가?
차라리 이번 일을 계기로 현 정부에 확실한 입지를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건 오히려 오성파가 날 도와주는 꼴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