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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96화 (96/325)
  • 96화. 폭풍전야 (3)

    “넌 어떻게 된 게 학교를 나오는 꼴을 못 보냐.”

    “괜찮아. 교장한테는 우리 영감이 잘 말해 놨어.”

    “그리고 왔으면 나한테 먼저 보고를 해야 될 거 아니야. 난 네가 돌아온 줄도 몰랐네.”

    연욱이는 그동안 쌓여 있던 온갖 짜증을 다 나한테 부렸다. 아마 이놈, 요즘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 보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챙겨온 게 있지.

    “받아라.”

    “뭐야?”

    “네가 제일 갖고 싶어 하는 거.”

    연욱이는 내가 건넨 쇼핑백을 받자마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직감한 눈치였다.

    “짜식. 이번에는 내가 봐 준다.”

    “아예. 감사합니다, 검사님.”

    이놈은 나보다 내가 준 시가가 더 반가운지, 냄새를 맡아보며 그 향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크. 역시, 네가 가져올 줄 알았지. 잘했다.”

    “그거 가져오느라 돈 좀 썼다.”

    “내가 우리 태산이 고생한 거 다 알아. 잘했어. 장하다, 우리 동생.”

    “됐고. 고마운 거 알았으면 마실 거나 가져와.”

    오랜만에 연욱이도 만났겠다, 난 그동안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 주었다.

    남들한테는 하지 못할 말을, 이 녀석한테만큼은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뭐, 뭐? 누, 누굴 만나?”

    “J.W 부시.”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연욱이는 내가 부시 부통령을 만났다는 걸 굉장히 놀라워했다.

    “그 부시를 만났다고? 아니. 도대체 어떻게?”

    “뭐…. 콘트라 게이트가 터질 시기였잖아. 그걸 빌미로 만났지.”

    “그러니까 어떻게? 그 사건이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게….”

    콘트라 사건을 빌미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걸 설명하려면 내가 죽인 리 애트워터와 존 반디, 그리고 올리버 노스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을 세상 누구보다도 믿지만, 아직 연욱이는 검사 시절 때의 마음이 남아 있다.

    청렴함만이 세상의 정의라는….

    그 멍청한 신념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직 내 목적을 위해 세 남자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면…. 과연 연욱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메데인 카르텔이랑 관계를 맺어서 어떻게 연줄을 만들었지. 그리고 올리버 노스에게도 접근하고. 아무튼, 이래저래 해서 일이 잘 풀렸어.”

    “뭔가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 것 같은데….”

    “설명하자면 복잡해. 많은 일이 있었거든.”

    그래. 아직은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아니다.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연욱이는 비록 나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으나, 내 모든 악행을 밝힐 순 없다. 분명 이놈은 그걸 견디지 못할 거다. 그리고 내 곁에서 떠나려고 할 것이다.

    “뭐, 아무튼 몸 건강히 와서 다행이네.”

    “그러게.”

    “아! 그런데 네 어머니 가게 완전 대박 난 거 봤냐?”

    “봤지. 그렇지 않아도 체인점을 내야 하나 고민 중이야.”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화제가 돌려지면서 무거운 이야기를 피할 수 있었다.

    연욱이에게 미안하지만, 이 녀석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난 말을 아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 친구 연욱이와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도 있었다.

    * * *

    권용일은 대진 건설 인수에 들어가면서, 화진파는 화진 그룹이 되기 위한 발판 마련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학교에 다시 나가 마지막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곧 있으면 학력고사도 봐야 하고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았다. 더군다나 경서 연합이 서울 전역을 통합하면서 관리해야 할 것도 꽤 있었다.

    다행히 이세린이 내가 없는 동안 연합을 잘 이끌어 준 덕분에 큰 소음은 없었지만, 이제 연합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할 차례였다.

    처음에는 경서 연합을, 단순히 화진파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썼다.

    하지만 세력이 커지면서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내가 있는 동안은 경찰이 나설 정도로 막장 전횡을 보이진 않겠지만, 내가 졸업하고 차기 연합회장이 나오게 되면 경서 연합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어차피 애들이 이끄는 연합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이지 않은가?

    이 정도로 연합 세력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온 게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해체인가, 아니면 졸업생들을 기반으로 화진파 내에서의 내 입지를 다질 것인가?

    난 후자를 택했다.

    내년이 되면, 경서 연합 출신 중에 실력이 있는 애들을 추려 화진파로 데려올 생각이다.

    그리고 나도 슬슬 어떤 대학에 들어갈지 결정할 때가 왔다.

    “먼저 연락을 주셔서 놀랐습니다.”

    “저도 선뜻 연락을 받고 나와 주실 줄은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이강찬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요즘 안 본 사이, 얼굴이 핼쑥해진 게 어지간히 형들한테 공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저번보다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데,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아. 그런가요? 하하. 요즘 이리저리 일이 많아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눈 밑이 어둡다.

    난 직설적으로 이강찬에게 물었다.

    “형님들 때문이십니까?”

    이강찬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태산 씨에게 뭘 숨길 수가 없겠네요. 맞습니다. 형님들 때문이죠, 뭐.”

    내 예상이 맞았다.

    이강혁이라면 이강찬을 가만히 놔두고 볼 리 없지. 난 이강혁이 더욱더 이강찬을 무너뜨려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난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고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닌텐도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그걸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아주 반응이 좋습니다. 이미 북미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더군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판매량이 굉장히 높아요. 이게 다 태산 씨 덕분입니다.”

    생각보다 작업 진척이 빠르다. 제품은 내년쯤에 나올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천성인가?

    “다행이네요.”

    “예. 회장님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두 분 다 대단히 좋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곧 있으면 학력고사죠?”

    “그렇습니다만…?”

    “대학교는 어디 갈지 결정하셨나요?”

    “아뇨. 아직 입니다.”

    이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쓸어내렸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저희 천성에서 지원하고 있는 대학교를 혹시 아시나요?”

    “천강 대학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혹시라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천강 대학교로 오십시오. 장학생으로 추천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각종 편의도… 봐 드릴 거고요.”

    편의라면 내가 수업에 빠져도 교수들이 불이익을 줄 수 없다는 소리다.

    천강 대학교라….

    그 정도의 편의를 받는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 아닌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명문대 순위 안에는 들어가는 곳이다. 그리고 천성 그룹에 들어가려고 목표를 정한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천강 대학교로 들어간다.

    그래야 교수들이 천성 그룹에 꽂아 줄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 말씀해 주시면 제가 그쪽에 말을 해 놓겠습니다. 그럼, 쉽게 입학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실장님.”

    “아닙니다. 우리가 앞으로 안 볼 사람도 아니고, 서로 도와주면 좋죠.”

    이강찬은 내가 그의 확실한 아군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뭐,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않은가?

    그를 절벽에 밀어 버리는 것도 나고, 그 절벽 속에서 꺼내 주는 것도 내 역할이니 말이다.

    * * *

    폭풍전야와도 같은 86년의 해가 끝이 났다.

    학력고사가 끝나고, 연욱이는 곧바로 본 사법고시에 당당히 합격장을 들고 나왔다.

    이제 이놈은 당분간 못 볼 것 같다.

    사법연수원에 잡혀가면 몇 년은 썩어야 하니까. 거기다 군대도 가야 하고….

    아. 그러고 보니 군대가 있었구나.

    시발….

    오랜만에 욕이 절로 나온다.

    “어이구. 우리 아들이 대학도 다 가고. 이 어미는 정말 오래 살아야겠다. 우리 아들이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사는 것도 봐야 하니까.”

    어머니는 눈물까지 흘리시며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셨다.

    아들이 대학에 간다는 걸 이토록 좋아해 주실 줄이야.

    안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제 우리 태산이, 여자 친구만 생기면 되겠구나. 그렇지?”

    “…예? 아-. 예.”

    내가 왜 뜨끔 하는 거지.

    갑자기 권윤아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건 기분 탓일까.

    “아무튼, 다녀올게요.”

    “그래, 우리 아들. 잘 다녀와!”

    “어머니도 오늘은 식당 일 좀 쉬시고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같아요.”

    “엄마는 일 안 하면 몸이 굳어서 안 돼. 잠깐만 보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저렇게 말해 놓고도 밤늦게까지 있으시겠지.

    난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조용히 학교에 갔으면 좋겠는데….

    “나오셨습니까, 형님!!”

    과연.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예상대로 방해꾼들이 잔뜩 붙었다.

    “뭐야. 어머니 있을 땐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형님. 그래도 오늘 형님이 대학교에 가신다는데 저희가 나서지 않을 수가….”

    “끙. 누구야, 이번에는?”

    “…예?”

    “성일환 형님이야, 아니면 황규혁 형님이야? 그것도 아니면 큰 형님?”

    “그, 그게….”

    당황한 조직원들이 말을 떨며 애써 내 눈을 피했다.

    내가 볼 땐 영감 아니면 성일환의 짓이 분명하다.

    “얼른 가자. 어머니 나오시기 전에.”

    “아, 예. 형님! 다들 얼른 타!”

    “예!”

    조직원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 명이다.

    그것도 다섯 대가 넘는 차량이니, 누가 보면 대통령이라도 오는 줄 알겠다.

    “형님. 그럼, 천강 대학교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대신, 교문 들어가기 전에 내려줘. 괜히 주목받으면서 걷긴 싫으니까.”

    “예, 형님.”

    되도록 사람들 눈을 피해 가고 싶었다.

    캠퍼스 생활 첫날부터 주목을 받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 난 잠깐 눈을 붙였다.

    저번 이강찬이 내게 제안을 해 준 덕분에 나는 천강대학교로 진학했다.

    수업에 불참해도 교수들이 내게 F는 절대 주지 못할 터.

    출석 일수를 채우지 않아도 알아서 졸업이 되는 아주 좋은 시스템이 아닌가?

    괜히 다른 학교를 다니면서 로비를 해야 하는 귀찮음이 줄어드니 말이다.

    권용일이 건설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앞으로 나도 바빠질 것이다.

    대학교 강의 때문에 시간을 빼앗길 순 없다는 뜻이다.

    “도착했습니다, 형님.”

    조직원의 목소리에 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교문 밖이지?”

    “예, 형님.”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내가 밖으로 내리려고 하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조직원이 후다닥 먼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아, 땡큐.”

    천강 대학교라.

    내가 또 대학을 다닐 날이 오다니.

    “다녀오십시오, 형님!!”

    수십 명의 조직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거리를 지나던 이들의 이목이 전부 내게 쏠렸다.

    “…얼른 다들 돌아가. 빨리!”

    “아닙니다, 형님.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됐으니까, 다들 얼른 돌아가!”

    저놈들이랑 말씨름하기 보다는,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난 서둘러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지긋지긋한 놈들….

    내가 저지하지 않았다면 저놈들은 내 수업까지 참관해 눈을 번뜩였을 것이다.

    “야. 방금 저 사람 봤어?”

    “아까 보니까 깡패들인 거 같던데….”

    “뭐야, 설마 깡패 두목 아들인 거 아니야?”

    예상대로 방금 전 일을 목격한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오늘은 어쩔 수 없나. 내일은 모자라도 쓰고 와야겠다.

    난 오리엔테이션이 잡혀 있는 강의실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런데 막상 강의실에 도착하니, 또다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저, 저거.”

    “김태산?”

    “설마 진짜 그 김태산이야?”

    이런.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경서 고등학교 출신들인가, 아니면 경서 연합 출신?

    아무래도 조용히 학교 다니기에는 그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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