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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86화 (86/325)
  • 86화. 죽여야 산다. (3)

    “브랜디를 한 잔 드릴까요? 아니면 마티니?”

    긴 꽁지머리를 한 중년의 남성 로페즈는 술잔을 하나씩 들어 보이며 말했다. 칵테일도 가능하다며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이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보인다. 하지만 각자의 손에 총기를 든 험상궂은 어깨들이 궁전처럼 넓은 사무실 안에 쫙 깔린 것을 보면, 그런 생각도 싹 사라진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저를 왜 이곳에….”

    왜 이 사람이 날 개인 사무실까지 데려온 것일까.

    얼굴만 보면 좋은 의도인 것 같기도 하지만….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가름해서는 안 되는 세계이지 않던가.

    이들은 웃는 낯으로 사람의 사지도 칼로 도려낼 수 있는 놈들이니까.

    “아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런데 성함이….”

    아차. 잠깐 생각이 딴 곳에 팔려 중요한 걸 잊었다.

    나는 얼른 명함 하나를 꺼내 로페즈에게 건넸다.

    “음…. 리턴 컴퍼니?”

    명함을 살피던 로페즈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예. 아마 들어본 적이 없으시겠지만….”

    “하하. 회사가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단지 미스터 김을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실, 저번에 헌즈와 해글러 경기가 있을 때 어마어마한 판돈을 쓸어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도박꾼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지요. 경기가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었어요.”

    그럴 만도 하지.

    나 같았어도 경기 조작을 의심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25만 달러를 걸었으니, 당연히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뭐…. 그땐 운이 좋았습니다.”

    내 대답에 로페즈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도 운이 좋았고요?”

    “하하. 사실, 도박이라는 게 다 운이지 않습니까? 물론 복싱 경기는, 분석이 철저하긴 해야죠. 거기다 운까지 따르면 더 좋고요.

    “그렇다면 이게 다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베팅이라는 것이군요.”

    딱히 내가 분석을 한다는 건 아니지만, 맥락상 그렇게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예. 그런데 전문가는 아닙니다.”

    “전문가는 아닌데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적중률이 높다니…. 이쪽 일에 재능이 있으시군요.”

    나는 로페즈의 의심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금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

    “혹시 제가 무슨 술수라도 부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로페즈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조작 경기를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어요. 프로모터들이 가끔 광고성 매치를 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승부를 조작하진 않으니까요.”

    복서들이 경기를 잡으려면 반드시 프로모터들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경기를 맺어 주고 홍보를 담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기 없는 복서들은 경기를 잡는 것도 힘들고, 설사 잡았다고 해도 파이트 머니가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복서는 프로모터가 알아서 찾아간다. 그리고 거액의 파이트 머니를 건네며 매치를 맺어 주는 것이다.

    세기의 대결이라 불린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도 몇 번이나 경기가 무산되지 않았던가? 이게 다 프로모터들의 술수다.

    이들은 대중의 호기심을 폭발시켜 티켓 값을 올린다. 그래서 몇 번이나 두 복서의 경기를 무마시키며 티켓 값을 천정부지로 올렸다.

    내 기억으로는,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 티켓이 우리나라 돈으로 1억이 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경기로 인해 몇조 원을 벌어들였다고 하니, 프로모터들의 활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이 정도로 많은 금액을 적중시키신 분은 아마 미스터 김 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골든 아레나를 찾아 주세요. 내 직원들에게 말을 해 놓을 테니, 미스터 김은 VIP로 골든 아레나를 이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내가 적중금을 엄청나게 벌었기 때문인가.

    로페즈의 호의가 굉장히 수상했다.

    내가 적중금을 엄청나게 챙겼다고는 하나, 로페즈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돈 때문에 내게 접근한 건 아니라는 것.

    “미스터 로페즈. 송구하지만, 저는 말 돌리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러니 직설적으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저한테 접근하신 이유가 뭡니까?”

    브랜디가 든 잔을 들고 있던 로페즈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하하. 이런. 제가 너무 대놓고 들이댄 건가요?”

    그는 브랜디로 목을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마빈 해글러와 헌즈 전을 적중시킨 주인공이 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요. 제가 복싱 하나는 정말 좋아하거든요.”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고? 그렇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리턴 컴퍼니 명함을 받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로페즈가 리턴 컴퍼니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메데인 카르텔과 아주 깊은 커넥션이 있고, 동시에 백악관에 있는 부통령과 라인이 깔린 곳…. 제가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순간 나는 제대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잠깐 잊고 있었다.

    골든 마피아는 정계의 인물들과 연관이 많은 곳이다. 그들은 정치적 로비를 이용해, 카지노 산업을 늘리는 데 총력을 다 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리턴 컴퍼니 이름을 뿌리고 다닌 거지?

    부통령인가, 아니면 올리버 노스?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한 겁니까?”

    “어떻게… 아신 건가요? 리턴 컴퍼니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요.”

    “골든 마피아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알다마다. 마피아 조직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세력을 과시하는 곳이다. 그런 곳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카지노 산업을 중점으로 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계에도 깊숙이 관련되어 있고요.”

    “하하. 잘 알고 있군요. 실제로 국회에 있는 의원들 몇몇은 우리 골든 마피아 소속이기도 해요.”

    골든 마피아 소속의 조직원들이 정계에 진출한 사례는 꽤 있다. 그들의 목표는 국회에 파견 나가 있는 조직원 중 하나가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일 터.

    “리턴 컴퍼니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대충 아실 텐데요?”

    “아뇨. 사실 잘 알진 못해요. 페이퍼 컴퍼니이지 않나요? 메데인과 연관이 있는 것을 보면 마약을 다루는 것일 테고….”

    “맞습니다. 골든 마피아와는 좀 동떨어진 곳이죠.”

    이 정도 말했으면 로페즈도 슬슬 본심을 드러낼 거로 생각했다.

    과연 그는 시가를 하나 꺼내 물더니, 내게 접근한 이유를 밝혔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리턴 컴퍼니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순 없지요.”

    그는 길게 연기를 내뿜은 뒤 말을 이었다.

    “거래하고 싶습니다. 그쪽 회사와.”

    “…거래요?”

    거래라. 도대체 어떤 것을?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지금 백악관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긴 한데, 당최 그걸 알 길이 없어요. 알다시피 우리는 정보로 먹고사는 곳입니다. 한발만 늦게 돼도, 카지노 산업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지요.”

    카지노 산업은 법에 제재를 많이 받게 되는 곳이다. 그런 곳인 만큼 정치적 로비가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들도 모르는 법안이 통과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카지노 산업에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보를 사려는 것이다.

    그들도 눈치가 있는 터라 백악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정보를 구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때에, 내가 이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이다.

    기연인가, 아니면 악수인가?

    “미스터 로페즈.”

    이건 도박이다. 내게 악수가 될지, 아니면 신의 한 수가 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확률은 반반.

    난 당당히 베팅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로페즈는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지 자세를 고쳐 잡고 내 앞에 몸을 기울였다.

    “백악관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를 듣고 싶군요.”

    “백악관에서 일어나는 일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씀은 백악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은근한 물음에 난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로페즈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가볍게 쳤다.

    ‘역시, 타고난 겜블러이시군요. 이거, 내가 못 당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수로 백악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모른다는 걸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상대가 어떤 패를 가졌는지 추측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패는 철저히 숨기는 게 게임의 기본 법칙이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지요. 백악관에서 이번 레바논 인질 사건과 더불어, 이란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내 예상대로 골든 마피아도 이번 이란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다. 카지노 산업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중간하게 이라크가 중간에 있는 것. 그 뜻은 석유 산업에 끼어들어, 한 몫 챙길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꼭 석유 문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떤 정보든 최대한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좋다. 그래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입니다, 미스터 로페즈. 우리 회사는 백악관과 함께 손을 잡고, 그 일을 유하게 추진하는 중이지요.”

    로페즈는 두 눈동자를 반짝였다.

    자신이 원하는 게 내게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제 제가 물을 차례군요. 내가 이 정보를 준다면 당신은 어떤 걸 저희한테 주시겠습니까?”

    “아아. 어렵군요. 그쪽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지만, 우린 그쪽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지 않습니까?”

    맞다. 저들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하다.

    “돈을 융자해 주셨으면 합니다.”

    “융자?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오?”

    “그런 일이라면 은행을 가면 될 텐데?”

    “은행에서는 절대 내어 줄 수 없는 금액이기 때문이죠. 거기다가 저희는 내세울 만한 담보도 없습니다. 은행에서는 다룰 수 없는 물품들만 갖고 있어서요.”

    리턴 컴퍼니가 다룰 만한 건 마약밖에 없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로페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런데 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거래를 한다? 너무 싸게 주시는 거 아닐지….”

    “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꽤 큰 금액이라서 말이죠.”

    이제야 로페즈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긴장하는 것이다. 과연 내가 얼마를 부를지.

    “흥미롭군요. 큰 금액이라. 30만 달러로 9,000만 달러를 버신 분이, 융자를 받아야 할 정도의 금액입니까?”

    “하하. 10%를 수수료로 때 가서 8,100만 달러밖에 없습니다.”

    “이런. 그거 아주 도둑놈들이군요. 10%나 때 가다니!”

    내가 얻은 적중금에서 900만 달러나 때 간 사람이 말은 잘한다.

    “아무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억 달러를 융자해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2, 2억!?”

    “예. 안 되려나요?”

    2천만도 아니고 2억을 불렀다. 우리나라 환율로 따지자면 2천억이다. 하지만 21세기 기준으로 따지자면 1,2 조원에 가까운 돈이다.

    로페즈는 지금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농담이라면 여기서 웃는 거로 끝내겠소.”

    “2억을 빌려주시면 2억 5,000만으로 갚겠습니다. 어떻습니까?”

    “5,000만을 더 얹어서 준다?”

    “예. 어차피 거래니까요. 그냥 원금만 갚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예의상 5,000만은 붙여 드려야죠.”

    로페즈는 목이 타는지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안도감을 주기 위해서, 추가 사항을 더 넣어야겠다.

    “기한은 1년 6개월. 그 안에 갚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갚지 못한다면 매년 이자를 10% 붙이도록 하죠.”

    “미스터 김. 리턴 컴퍼니가 유령 회사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내가 그 거래를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죠. 유령회사죠. 그런데 메데인과 백악관은 우리 회사를 받아들였습니다. 왜일까요?”

    로페즈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무튼, 거래를 받아들이는 건 오롯이 미스터 로페즈의 몫입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냥 사기꾼인지, 아니면 정말 알짜배기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제가 미스터 김에게 말린 것 같군요.”

    로페즈는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야. 바로 사무실로 오도록.”

    짧게 지시를 내린 다음 로페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변호사를 불렀습니다. 계약서는 써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마피아이긴 하지만, 하나의 기업체이기도 해요.”

    알고 있다. 그런 이면적인 모습으로 골든 마피아가 오랫동안 카지노 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건넨 것이기도 하고.

    “저야말로 환영입니다. 저도 계약서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겠군요.”

    로페즈는 내게 정보를 물어보기 전에 다른 것을 먼저 물어봤다.

    “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갑자기 2억 달러는 왜 융자해 달라고 하신 겁니까?”

    난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그걸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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