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죽여야 산다 (2)
“사람… 이요?”
“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철중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이미 존 반디 일을 제게 맡기지 않으셨습니까?”
맞다. 존 반디를 사고사로 위장하는 것을 강철중이 스스로 맡지 않았던가.
굉장히 내게는 예상외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도 강철중이 맡아 줄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절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청부살인이라는 건 지인을 통하는 것만큼 나쁜 게 또 없습니다. 꼬리를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런 말씀을 하시니, 왠지 더 믿음이 가는데요? 그래서, 강철중 씨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제 의뢰를 받으실 건가요?”
강철중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타깃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아, 물론 가격도 달라질 겁니다.”
“뭐, 그렇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죠.”
“아직은…?”
아차차. 내가 잠깐 말실수를….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요.”
“그럼, 그게 누군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난 케이스에 넣어둔 서류를 꺼내 강철중에게 건넸다.
“이름은 리 애트워터. 선거 전략가입니다. 아직 유명세를 타진 못했지만, 그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에요. 선거의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을 만큼.”
강철중은 의아하다는 어조로 내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을 사장님께서….”
나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사람을 죽여 달라고 하니, 강철중으로서는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이 될 부시와 관계성을 쌓기 위해서는 리 애트워터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리 애트워터가 누구인가?
그는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낸 킹메이커이며 네거티브 캠페인의 대가다.
네거티브 캠페인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보여 준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콘트라 사건이 터지고 레이건이 탄핵 직전까지 가면서, 보수 정당은 완전히 파탄 지경에 이른다.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온 부시로서는 당연히 절망적인 상황일 터.
상대 후보와의 지지율 차이가 무려 20%나 날 정도로, 부시의 당선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데 리 애트워터가 혜성처럼 나타나 부시를 구원한다.
흑색선전으로 상대 후보를 압살시키면서, 당당히 부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것이다.
무려 20%의 지지율을 뒤집고서!
물론, 그걸 곧이곧대로 강철중에게 말해 줄 순 없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 꼭 제거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강철중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렇게 이목을 끄는 사람도 아니니, 비싼 값이 들 것 같진 않습니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강철중의 성격이 참 좋다.
이것저것 다 물어보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철중 씨는 그런 점이 참 좋아요. 세세하게 묻지 않는 거.”
“그건 사장님도 마찬가지 시지 않습니까? 제 과거에 대해 전혀 묻질 않으시잖아요.”
강철중의 과거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다. 어차피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않던가.
언젠가 내게 말해 주면 고마운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서운하진 않다.
당장 나도 내 어머니, 동생에게조차 말 못 할 사정이 있지 않은가.
“그럼, 거래 성립이군요. 필요한 금액을 말씀하시면 바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오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철중은 화제를 돌리며 오늘 경기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마빈 해글러가 최강 미들급 챔피언이긴 하지만, 이미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그리고 도전자 무가비는 한창 절정이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했듯, 전 이번에도 해글러를 믿어 보렵니다.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최강의 챔피언이거든요.”
솔직히 해글러의 팬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를 응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가 내게 곧 가져다줄 돈다발을 생각하면 오늘부터 팬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왠지 오늘은 해글러에게 돈을 걸어야 할 거 같네요. 저도 적선한다 생각하고 딱 1만 달러만 걸어 보겠습니다.”
“하하. 그러세요, 그럼.”
강철중은 베팅을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오늘 저 양반, 꽁돈 좀 생기게 생겼다.
* * *
“가, 가라!!”
이런 강철중의 모습은 처음 본다.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해글러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가비가 위협적인 레프트 훅을 날릴 때마다, 철렁이는 그의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때앵-!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관중석에 울려 퍼졌다. 강철중은 링 위에서 싸운 사람처럼 크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긴장감이 팽팽한 경기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그런데 사장님. 정말 경기가 연장전까지 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만약 다음 라운드에서 해글러가 이기게 된다면….”
“하하. 그럼, 강철중 씨와 저는 오늘 운수대통하는 거죠.”
하지만 강철중은 아직도 무가비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해글러가 너무 지쳤어요. 무가비가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지 않습니까? 저건 진짜 겨우겨우 버티는 것 밖에 안 돼요.”
회귀 전에, 한국 방송국에서 보여 준 해글러와 무가비의 경기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도 해글러가 저 신인 선수한테 정말 많이 맞았다. 하지만 11라운드가 시작되면서 해글러와 무가비의 경험 차이가 드러냈다.
무가비는 11라운드에서부터 체력이 바닥났고, 그에 반해 해글러는 아직 강타를 날릴 힘이 남아 있었다. 결국, 무가비는 해글러의 묵직한 펀치에 맞고 쓰러져 생애 첫 KO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11라운드가 시작될 때까지도 관중들은 무가비의 승리를 점쳤다. 바로 강철중이 그러는 것처럼.
마침내 미들급 황제가 추락한다고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을 터.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곧 기대로 끝나게 될 것이다.
“다운-!!”
보기만 해도 간담 서늘해지는 강력한 라이트 훅이 무가비의 턱에 정확히 적중됐다. 그는 줄이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심판은 카운트를 세지도 않고, 해글러의 오른팔을 잡아 높이 올렸다.
“와아아아-!!”
해글러가 깔끔한 KO승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 * *
나는 적중금을 받기 위해 티켓을 들고 줄을 섰다. 내 옆에 있던 강철중은 아까부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내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강철중이 대답했다.
“사, 사장님. 도대체 사장님은 누구십니까? 혹시 미래를 보시는 그런….”
“아아. 억측은 거기까지. 너무 엇나가셨어요.”
“하,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강철중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해글러가 11라운드에서 무가비를 KO’ 시킨다는 내 예언이 정확하게 적중하지 않았던가.
“헌즈와 해글러 전도 정확하게 맞추시더니, 이번에도 또…. 이건 단순히 분석을 잘한다고 해서 맞추는 게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그런가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이걸 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그러니까 운이죠. 운 말고 다른 게 뭐가 또 있겠습니까? 제가 설마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도 가졌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강철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난 그런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설은 그만 쓰세요. 그냥 운이 좋았던 겁니다.”
“아…. 예.”
아직도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런 시선을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지.
“미스터 김!!”
그때 나를 부르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내게 베팅금을 받았던 응우옌이었다.
“이럴 수가! 미스터 김! 이번에도 미스터 김의 말대로 됐어요! 해글러가 11라운드에서 무가비를 꺾었단 말입니다!”
“하하. 운이 좋았어요. 그러니까 진정하세요.”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응우옌이 난리법석을 떨어 준 덕분에 주변 이목이 전부 내게 쏠렸다.
“이, 일단 진정을 좀….”
시커먼 얼굴이 붉게 상기될 정도로 흥분감에 휩싸인 응우옌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덩치 큰 백인 남성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 해글러가 11라운드에 이길 거라고 베팅을 했소?”
“저기 그게….”
내가 얼버무리기도 전에 응우옌이 불쑥 끼어들었다.
“예. 제가 직접 베팅금액을 받았는데, 여기 계신 미스터 김이 무려 30만 달러를 쓰셨습니다. 그것도 해글러가 11라운드에서 KO로 승리한다는 것에요.”
그 말을 들은 백인 남성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까지 경악 어린 탄성을 터트렸다.
“그게 정말이오!? 30만 달러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감탄사도 참 가지가지다.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탄사를 여기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단하군. 혹시 전문적으로 이쪽 일을 하고 계신 분인가?”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30만 달러를 맨정신으로 걸었겠나? 뭔가 확실한 분석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겠지.”
“설마, 경기를 조작한 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늘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경기 조작을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치열하고 처절했던 싸움이 아니었던가.
“자자. 모두 길을 열어 줍시다!”
“이 미라클맨이 얼마나 가져가는지 보자고!”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사람들은 과연 내 적중금이 얼마나 나올지 추측을 늘어놓으며 열광했다.
나는 그들의 성화에 이끌려 맨 뒷줄에서 가장 앞줄로 이동하게 됐다. 그리고 이번에도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어머. 혹시 저번에….”
해글러와 헌즈 전 때, 내게 적중금을 정산해 주었던 여자였다.
“예. 그때 제가 맞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을 하나 싶었더니, 역시 이번에도 고객님이셨군요. 표를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나는 표를 꺼내 여자에게 건넸다. 그녀는 저번보다 더 놀라움 가득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말 엄청나네요!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이렇게나 많은 금액을….”
“제가 운이 참 좋죠?”
“호호. 이게 정말 운인지 아니면 다른 건지 모르겠네요. 이런 금액으로 당첨되시는 분은 처음 봐요. 아무도 11라운드까지 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거든요.”
여자는 자기 돈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뛰는지, 몇 번 심호흡하며 스스로 진정시켰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무려 300배의 이익을 보셨어요. 30만 달러에 300배면… 9천만 달러네요. 거기서 수수료 10%를 제하면 8,100만 달러가 적중금으로 나올 겁니다.”
나와 여자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백인 남성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들 들었나? 미라클맨이 무려 300배나 땄다고 하는군!”
“그게 정말이야? 30만 달러에 300배면 9천만 달러잖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 베팅 금액부터 시작해 적중금까지 알게 될 줄이야. 자칫 여기서 나쁜 마음을 품고 덤비는 놈이 생긴다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나는 강철중에게 손짓하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들 좀 불러 주세요. 아무래도 오늘은 경호를 받으면서 가야겠네요.”
강철중도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걸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바로 준비를….”
“아. 여기 계셨군요.”
그런데 라틴계로 보이는 남성 하나가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강철중은 그런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무슨 다른 의도를 갖고 접근한 것은 아닌지 경계하는 것이다.
“하하.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 저는 여기 골드 아레나를 책임지고 있는 다니엘 멘디 로페즈라고 합니다.”
다니엘 멘디 로페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곳 골든 아레나를 책임지고 있다는 건 관리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곳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골든 아레나의 소유자이자, 이곳에 있는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강철중은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다니엘 멘디 로페즈라면 골든 아레나의 사장이 맞습니다. 골든 마피아 소속입니다.”
이제야 내가 아는 이름이 나왔다.
골든 마피아.
주로 카지노 산업으로 돈을 벌고 있는 조직이다.
연합체로 봐도 무방한 게, 이들은 일본의 야마구치처럼 열 명 정도 되는 중간 보스들이 있고, 이들 전체를 다스리는 최종 보스가 있다.
이들은 대기업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카지노 산업을 중점으로 하여, 마약과 청부업 쪽에는 큰 활동량이 없다.
다른 마피아 조직에 비해 잠잠하면서도 정치 로비 쪽에 깊숙이 관여된 곳이다.
카지노 산업이 로비로 먹고사는 곳이라, 조직 특성이 그렇게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로페즈.”
난 다니엘 멘디 로페즈가 건넨 손을 맞잡았다.
갑자기 이 사람이 내게 나타난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결코 이 만남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