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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69화 (69/325)
  • 69화. 잊고 있던 약속 (2)

    이강찬은 나와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사람을 보냈다.

    줄곧 연락이 없다 갑자기 왜?

    혹시 저번 닌텐도 일 때문에 그런 건가?

    이강찬의 비서가 알려준 약속 장소는, 천성 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어느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여의도와 가까운 곳이라 나는 잠시 사무실에 들러 간단하게 일 몇 가지만 처리했다.

    성일환이 인천도 관리하게 되면서, 여의도가 좀 소홀해진 티가 났다. 물론, 황규혁도 여의도 관리를 하긴 하지만 그 양반은 영등포 때문에 일이 바쁠 테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내가 여의도 전체를 관리해야 할 것 같았다.

    장부를 보는 중에 조직원 하나가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부터 올린 뒤 말했다.

    “형님. 차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난 마시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그래. 먼저 내려가 있어.”

    “예, 형님.”

    현재 여의도 상황은 아주 좋았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장들은 호황을 맞이했다. 아마 단일 매출로는 여의도를 따라갈 만한 곳이 별로 없을 터.

    덕분에 내게 들어오는 액수도 컸고, 뒤에서 들어오는 검은돈도 날마다 늘어가는 중이다. 물론, 이들 전부를 받아 챙길 생각은 없다.

    어차피 권용일은 내가 무슨 돈을 받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일부러 들어오는 돈을 확인하는 건, 어떤 돈을 받아야 배탈이 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한 달에 내게 떨어지는 돈이 못해도 5천만 정도는 되니…. 굉장히 좋은 수입원이 아닐 수 없다.

    이 돈을 모아서 잘만 굴려 본다면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백 배로 뻥튀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옷부터 갈아입기 위해 사무실 안에 있는 장롱을 열었다.

    워낙 패션 쪽에 관심이 많은 성일환 덕분에, 고급진 양복이 장롱에 가득 걸려 있다. 전부 다 나 입으라고 사놓은 거 같은데, 이 양반은 패션 감각도 좋아서 차라리 이런 일 말고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일환 형님 땡큐.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런….

    내 사무실은 나이트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번화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헌데 대낮부터 검은 그랜저 세 대와 함께 덩치 큰 조직원 수십 명이 도열하고 있으니, 점심 먹으러 나온 회사원들부터 시작해 시민들의 이목이 전부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뭐야, 이거?”

    “형님께서 차를 대기시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는데?”

    “그래서 대기시켜 놓은 겁니다.”

    난 이름도 모르는 조직원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누구지. 이런 새끼를 내 비서랍시고 뽑은 사람이?

    “다 필요 없고, 한 대만 가도 충분해. 그러니까 다 물러.”

    하지만 이놈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꼭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뭐지? 지금 반항이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지금 누구한테 명령 질이야. 하나만 가.”

    “안 됩니다. 형님께서 어디 가실 때, 꼭 저희를 대동하라는 큰 형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큰 형님이?”

    “예. 죄송합니다.”

    젠장. 그 영감님은 또 이런 쓸데없는 짓을….

    “나중에 내가 큰 형님한테 잘 말할 테니까, 다들 돌아가. 사람들이 다 우리만 쳐다보잖아.”

    “혀, 형님. 그랬다가는 저희 다 죽습니다. 큰 형님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말단 조직원이라도 권용일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불복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애원하는데 내가 그냥 갈 순 없지 않은가.

    “젠장….”

    하는 수 없이 나는 차 뒷좌석에 탔다. 그러자 조직원들도 빠르게 각자 차에 탑승했다.

    “K 호텔로 간다. 어딘지는 알지?”

    “예, 형님.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확실히 예전보다 조직원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전에는 내 말을 듣긴 했지만, 좀 무시하는 태도가 보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최근에 대룡파와 인천까지 내가 접수하면서, 성일환보다 나를 더 깍듯하게 대하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강찬이 날 왜 부른 걸까.

    역시, 닌텐도 때문이려나. 하지만 그건 이미 파투났다고 생각했는데.

    “형님. 도착했습니다.”

    괜히 추측하기보다는 직접 만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나는 조직원이 열어준 문을 통해 밖으로 내렸다. 이미 다른 조직원들은 전부 내린 상태였다.

    저 덩치들 수십 명이 호텔 앞에 도열하고 있으니, 깜짝 놀란 호텔 직원들이 허둥지둥거리는 게 보인다. 그리고 관광을 온 외국인들부터 호텔 밖을 나오는 투숙객들까지 움찔거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아…. 이런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그냥 혼자 조용히 다녀오려고 한 건데.

    “호, 혹시 예약을 하고 오신 겁니까?”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옆에 있던 조직원들이 험한 인상을 쓰며 내가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예약 안 하면 우리 형님을 쫓아내기라도 하려고?”

    “이 새끼가 감히!”

    역시, 벌써 사고를 치려 든다.

    나는 손을 들어 조직원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강찬 실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레스토랑에 계시나요, 지금?”

    이강찬 이름이 나오자 지배인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김태산 님 되십니까?”

    “예. 바로 접니다.”

    “그렇지 않아도 실장님은 막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제가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예. 소란피워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지배인과 함께 호텔 안으로 향하던 나를 따라 조직원들도 들어오려 했다.

    “차 1대만 남겨놓고 나머진 전부 돌아가. 설마, 서너 명으로 날 못 지키겠다는 건 아니지?”

    나의 은근한 도발에 조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 결국 타협을 봤다.

    “예, 형님!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좀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조직원들도 해결했겠다. 이제 남은 건 이강찬인가.

    지배인을 따라 들어간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인테리어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21세기에 생기는 고급 레스토랑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리고 따로 마련된 룸 안에는 길쭉한 테이블이 있었는데, 이강찬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김태산 씨.”

    나는 반갑게 인사하는 이강찬의 손을 잡았다.

    “아.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국에 다녀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 만나 뵈려고 했는데 미국에 가 계신다는 말을 듣고 시일이 늦어졌습니다.”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나를 만나려고 했던 건가.

    “그랬군요.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연락이 와서 좀 놀랐습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원래는 당장이라도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일본 쪽 기업과 컨택을 하느라 시일이 늦어졌습니다.”

    파투난 게 아니었나.

    일본 쪽 기업과 컨택을 하고 있었다는 건 닌텐도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한국과 일본 간의 왕성한 교류가 없고, 한국은 투자 모델로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시기라 닌텐도 쪽에서 연락이 늦은 게 틀림없다.

    “그 말씀은 닌텐도 쪽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왔다는 건가요?”

    “그게… 좀 애매합니다. 그쪽에서는 우리나라 상황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니까요. 아무래도 반일 감정도 강하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 상황도 좋은 건 아니니….”

    “그럼, 아직 결정된 건 하나도 없다는 거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그쪽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쪽 시장이 어떤지 확인도 필요하고 말이죠.”

    젠장.

    이강찬이 왜 왔는지 슬슬 느낌이 온다.

    이 양반 설마….

    “그래서 말입니다, 김태산 씨. 대룡파의 일은 잘 해결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선불을 냈다는 소린데, 이제 김태산 씨도 값을 치르셔야죠?”

    “하하. 그, 그렇네요.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강찬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천성은 절대 돈을 떼어먹지도, 떼어 먹히지도 않습니다.”

    저 얼굴로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좀 무섭기까지 하다.

    “알겠습니다. 거래는 거래니까요. 그럼,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저와 함께 일본으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굳이 저와 가실 필요가 있나요? 협상을 하시려는 거면 전문가와 함께….”

    “그런 전문가들보다 김태산 씨가 훨씬 더 유능하다는 게 회장님과 저의 판단입니다. 닌텐도 이야기도, 결국 김태산 씨가 꺼낸 일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죠. 아! 물론 전문가도 데려가긴 할 겁니다.”

    왠지 날이 서려 있는 말이다.

    먹튀는 안 된다는 건가.

    끝까지 책임을 지라니.

    일이 잘 안 풀리면 내게 책임을 물기라도 하겠다는 거 같은데….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퍼토리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일본이냐.

    권용일에게는 못 간다고 못을 박아놨는데….

    내가 이강찬과 함께 일본에 갔다는 소리를 듣는 날엔, 그 양반 화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벌써 한숨이 나오는구나….

    “김태산 씨.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아-. 별일 아닙니다. 일본에는 언제쯤 갈 생각이십니까?”

    “다음 주 수요일. 가능하십니까?”

    “이미 티켓을 잡아 놓으신 건가요?”

    “전세기로 이동할 겁니다.”

    맞다. 이놈들 대기업이지.

    이들에게 항공사 일등석은 서민의 사치일 뿐이다.

    진정한 부자에게는 전세기가 있지 않던가.

    “알겠습니다. 그럼, 수요일까지 준비하면 되겠네요.”

    “예.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미리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이강찬과 식사를 하면서 몇 번이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일본에 가서 닌텐도와 협상하는 일만 달랑할 순 없지 않은가.

    내가 일본에 간다는 사실을 권용일이 아는 순간, 그는 내게 일본 업무까지 맡길 것이다. 그렇다는 건 야쿠자들도 상대해야 된다는 건데….

    젠장. 이번만큼은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가 미국에 갈 생각이었는데, 이강찬이라는 복병이 나타나 뒤통수를 쳐버렸다.

    * * *

    “네가 가겠다고?”

    “예…. 가겠습니다.”

    “허허. 죽어도 못 가겠다고 한 녀석이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라도 있더냐?”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권용일은 한숨을 푹 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잔을 건넸다.

    “일단 한잔해라.”

    오늘은 웬일로 권용일이 술을 따라준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네가 정 원치 않으면 나도 보낼 생각 없다니까? 정말이야. 네가 안 가도 돼.”

    “아닙니다. 어차피 일본 갈 일이 생겨서요.”

    “응?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권용일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내가 간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은 것이다.

    “천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더러 일본에 가서 닌텐도 회사와 쇼부를 보라고 하더군요.”

    “닌텐도?”

    “저번에 천성과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내지 못한 값을 지금 치르랍니다.”

    권용일도 내가 천성과 거래를 한 덕분에 대룡파를 흡수했다는 걸 알고 있다.

    “허허. 썩을 놈들.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원.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이왕 가는 거 네가 하는 수밖에.”

    권용일은 능청스럽게 나를 위로하는 척했다.

    “이게 다 운명인 거다. 네가 일본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게지. 그러니까 맘 편하게 먹고 다녀와. 그렇지 않아도 내가 너 보필할 사람도 불러놨어.”

    “…예?”

    날 보필할 사람?

    그런 사람을 미리 불렀다는 건, 아무리 거절을 했어도 나를 무조건 일본에 보내려고 했다는 건데.

    “강철중을 미국에서 불러들였다. 그놈이 너랑 합이 잘 맞던데? 일본 가서도 잘해 줄 거다.”

    “그러셨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절 일본에 보내려고 하신….”

    “이놈이! 사람을 뭐로 보고! 내가 설마 그랬겠냐!”

    자신이 조금만 불리하면, 소리부터 지르는 게 권용일의 스타일이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 양반은 처음부터 날 보낼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백 번 거절했어도 백 번 설득해서 끝끝내 보냈을 것이다.

    “허허. 어쩌겠냐? 그쪽에서 가라고 하면 가야지. 가는 김에 잔 업무 한다고 생각해. 대신, 수고비는 두둑이 챙겨 주마.”

    오늘따라 권용일이 크게 웃는 것 같았다.

    저리도 기분이 좋을까.

    그에 비례해 내 한숨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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