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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6화 (26/325)
  • 26화. 마법의 가루 (4)

    “야! 너 이 새끼….”

    “아, 오셨어요?”

    황규혁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술을 병째로 벌컥 들이켰다.

    “네놈은 어떻게 하루도 조용히 있는 날이 없냐? 이번에 또 뭐라고 입을 털었기에 큰 형님이 아편굴을 다 닫으라는 명령을 내리신 거야!”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님. 워낙 사안이 급한 거 같아서요.”

    “아니, 지금 보고 체계를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 사단을 나게 했냐고!”

    황규혁이 저렇게 흥분하는 건 오랜만에 본다.

    영등포에서 운영하는 아편굴로 재미 좀 보고 있었을 텐데, 내가 거기다 찬물을 끼얹었으니 쌤통이 나긴 할 것이다.

    “젠장. 큰 형님까지 넘어간 마당에 내가 강제로 열어 버릴 수도 없고.”

    “딱 일주일만 참아 보세요. 그땐 저한테 감사하게 되실 겁니다.”

    “어떻게?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꿍꿍이야?”

    “정말 일주일만 기다려 보시라니까요? 지금 버시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벌게 되실 겁니다.”

    “그게 진짜라면 내가 너한테 큰절 한 번 올린다.”

    “진심이시죠? 저 기억력 좋습니다.”

    황규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진정이 된 걸까?

    “태산아.”

    “예, 형님.”

    “솔직히 난 네놈이 뭘 하든 지지해 줄 생각이야. 지금까지는 네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한 번이라도 삐끗 나면 내가 널 도와줄 방법이 많지 않아.”

    갑자기 이 양반이 진지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충고라도 할 셈인가?

    “물론, 네가 실수할 때도 있겠지. 그땐 난 유하게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다른 놈들은 그렇지 않을 거야.”

    “다른 형님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사람들은 널 주목하고 있다. 당장 널 솎아내려고 가지치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지금은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만, 네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모가지다.”

    황규혁보다 위치가 높은 간부들이 날 주목하고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기간에 쌓은 공적이 많아 권용일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지 않던가? 더군다나 그 영감이 내게 여의도를 맡기겠다고 선포까지 했으니, 날 좋게 볼 리가 없다.

    황규혁 말대로 그들 중 날 단번에 담글 수 있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권용일의 관심이 내게 있으니, 칼을 뽑지 않은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놈들의 칼이 날 무참히 찌를 것이다.

    “네가 일 벌이는 건 좋은데, 스케일이 너무 큰 게 문제야. 조금은 소소하게 벌일 수 없겠냐?”

    하긴. 영남파에, 여의도. 거기다 아편굴까지 건드렸으니 가면 갈수록 건수가 커진다.

    내게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데, 조심할 필요가 있긴 하겠다.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앞으로 뭔 일 벌일 땐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 줘라. 어디 심장 벌렁거려서 살겠냐?”

    내가 말도 없이, 권용일한테 다이렉트로 꽂은 것 때문에 삐지긴 좀 삐졌나 보군.

    “예, 형님. 그것도 조심하겠습니다.”

    “그려. 한잔할 텨? 이거 꽤 비싼 건데.”

    “저 술 안 하는 거 아시면서….”

    “얌마. 형이 한 잔 주는 건 받아야지.”

    이 사람은 내가 올 때마다 술을 권하는 것 같다.

    술은 끊기로 했는데, 오늘 이 사람 기분도 풀어주고 해야 하니 딱 한 잔만 받을까?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이 주시는 잔인데, 당연히 받아야죠.”

    “그래. 한 잔 쭉 마셔봐.”

    오랜만에 마셔보는 술이라 심장이 다 두근거린다.

    젠장. 역시 나란 놈은 금주하기 글렀다. 술을 보면 이렇게 좋아하니.

    “황 사장. 안에 있나?”

    잔에 술이 반쯤 채워졌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푸근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혀, 형님!”

    황규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누군데 저러지?

    황규혁이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오-. 이 친구가 바로….”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그래그래. 듣던 대로 인물이 확 폈네, 응?”

    “감사합니다.”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이 사람의 얼굴을 보자 나도 황규혁처럼 안색이 저절로 굳어졌다.

    이 사람이 여기에 올 줄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허리만 숙이고 있을 거야? 목마르다. 나도 한 잔 주면 안 되겠냐?”

    “아!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황규혁은 후다닥 움직여 상석에 앉은 남자에게 잔을 건넸다.

    “오, 우리 황 사장 꽤 비싼 술 마시네?”

    “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는 멋들어진 양복을 벗어두고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크-. 맛 좋구먼.”

    무려 로얄 샬루트 30년산이다. 맛이 안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군침이 목 뒤로 넘어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 맛있는 걸 왜 그동안 못 팔게 막았는지 모르겠어. 그렇지?”

    황규혁이 아니라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저건 내게 말하는 것이다.

    “예. 소주 회사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을 어지간히 정부에 쏟아부었을 겁니다.”

    “그래. 그 새끼들이 뽀찌 먹이는 바람에 우리가 이 맛 좋은 걸 그동안 몰래 들여와야 했잖아.”

    정부는 84년까진 100% 원액의 양주를 우리나라에서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소주, 맥주, 그리고 막걸리 같은 싸구려들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던 기업들이 온갖 돈을 끌어모아 양주 수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양주가 한국에 들어오면 그날로 자신들이 쪽박을 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양주는 더 귀한 술로 서민들에게 인식이 되었고, 최근 들어 규제가 풀어진 양주는 300%가 넘는 세금이 붙는 바람에 그야말로 노블레스 위스키가 되었다.

    지금 저 양반이 마시고 있는 로얄 샬루트 30년산은 외국에서도 비싸게 팔리는 고급술이니, 한국에서는 몇 배로 더 비쌀 것이다.

    “자네도 술은 좀 마시나? 한 잔 줄까?”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 사람한테서 잔을 받고 싶진 않았다.

    “괜찮습니다, 형님.”

    “허허. 그려. 그럼, 우리 황 사장이 대신 한 잔 받아.”

    “예, 형님.”

    황규혁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얼굴로 잔을 받았다.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 내가 한 번 찾아와 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이거 마시고 풀자고 우리.”

    “아닙니다, 형님. 제가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니야 아니야. 황 사장이 나보다 더 바쁜 몸인데, 내가 발걸음 해야지. 허허허.”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목소리였지만, 내게는 마치 독사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뭘 하려는 거야? 돈 잘 들어오던 가게를 위에서 다 닫으라고 하니까. 내가 참, 곤란해. 이러다가 다른 놈들에게 돈줄 다 뺏기는 건 아닌지 원.”

    하소연하고 있지만,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저 눈빛은 나와 황규혁을 동시에 살피고 있었다.

    특히 나를 바라보는 저 사람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다.

    “그게….”

    황규혁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도움을 청하는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저 양반은 아편굴이 왜 문을 닫는 건지 그 내막을 모르지 않던가.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 건가.

    “단속 때문입니다. 이 주일 안에는 다시 여시게 될 겁니다.”

    “단속?”

    “예, 형님.”

    “그거야 항상 있는 일 아닌가? 어차피 다 보여주기식으로만 잡을 텐데?”

    “큰 형님께서는 이번엔 좀 다를 것 같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 나한테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없나?”

    집요하군.

    그래도 최소한 간단하게 설명은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난 권용일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함축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 핏덩이들 엿 먹이자고 우리까지 싸잡아 엎으려는 거다?”

    “그렇게 보시는 게 맞을 겁니다.”

    “하-! 그것참. 그런 건 내가 또 생각을 못 했네.”

    이 남자는 또 잔에 술을 채운 다음 입에 머금었다.

    “보는 눈이 대단한데? 큰 형님이 왜 그렇게 널 예뻐라 하는지 이제야 좀 알겠네.”

    “아닙니다, 형님. 그냥 막내라고 귀엽게 봐 주시는 겁니다.”

    “누가? 우리 큰 형님이?”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어깨를 몇 번 쳐댔다.

    “우리 막내 녀석이 농담도 할 줄 아는구먼.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큰 형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야. 능력 없는 놈은 벌레보다도 못하게 보시니까.”

    할 이야기가 끝난 건가?

    그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번 일이 잘 됐으면 좋겠네. 나도 주머니 두둑해지면 너한테 크게 한 번 사마.”

    “말씀이라도 감사드립니다.”

    남성은 내 옷매무새를 잡아주며 말했다.

    “앞으로 큰일 많이 할 텐데, 몸조심해야지, 응?”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내게는 협박처럼 들렸다.

    “역시, 젊음이란 참 좋은 거야. 다 늙은 나는 따라가기가 벅차구먼. 좀 쉬엄쉬엄해.”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그려. 이번 일 끝나면 제대로 술 한잔하자고.”

    “알겠습니다.”

    남성이 차에 타고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황규혁은 그제야 접었던 허리를 폈다.

    “저분이 누구신지 모르지?”

    모를 리가 있겠나?

    아마 황규혁 당신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다.

    “예. 처음 뵙는 분입니다.”

    “그래. 마포와 포항 일대를 맡고 계시는 이진용 형님이시다. 저분 얼굴 잘 기억해. 겉으로는 저렇게 잘 웃고 계시지만, 우리 조직에서 제일 무서운 분이시다.”

    “형님께서도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았습니다.”

    황규혁은 구태여 내게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하지. 일환이 형님도 저 형님한테는 뭐라 말을 못 할 정도니까.”

    권용일의 오른팔이라는 성일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남자, 이진용.

    내가 이 남자를 잘 알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훗날 화진제출과 건설 등을 맡아 권용일의 첫째 아들을 지지하고, 성일환을 숙청한 사람이 바로 저 독사 같은 양반이다.

    내가 화진파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아마 이진용일 것이다. 그리고 이진용은 날 경계하고 있다. 이미 대놓고 내게 협박까지 하지 않았던가.

    몸조심하라고 말이다.

    그건 이번 일이 조금만 수틀리면 자신부터 칼을 뽑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번 일이 잘되면 날 더 경계하게 될 것이다.

    이진용이 다녀간 후에도 간부 몇 명이 더 황규혁 사무실에 들렀다.

    어떤 놈은 협박하기도 했고, 또 어떤 놈은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놈들은 이진용에 비교하면 파리 새끼들에 불과했다.

    그래도 갑자기 화진파에서 슈퍼스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 * *

    “마약?”

    연욱이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 내게 몸을 돌렸다.

    “어. 아편굴 사건, 기억나냐?”

    “군인들이 애새끼들 잡아 처넣으려고 함정 판 거?”

    이놈은 점점 더 기억력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그거.”

    “뭐, 대충 그림 나오네. 그걸로 공이라도 쌓게?”

    “그러려고. 덤으로 마약 몇백 킬로도 얻고.”

    마약이라는 말에 연욱이 안색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미쳤냐? 그 마약으로 뭘 하려고?”

    “뭘 하긴. 팔아야지.”

    “야, 김태산!”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연욱이는 언성을 높였다.

    “뭐하자는 거야, 지금?”

    “뭘?”

    “그 마약, 네가 판다고?”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팔게 되어 있어.”

    정부에서 압수한 마약 중 절반이 사라졌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절반이 어디로 갔겠는가?

    공무원 놈들끼리 서로 나눠 가진 게 분명했다.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새끼야!”

    “너야말로 똑바로 들어, 장연욱!”

    연욱이는 아직도 검사 시절 때 가지고 있던 청렴한 정의를 버리지 못한 것인가.

    물론, 나도 그 시절의 마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깨닫지 않았던가.

    정의란 것은 결국 승자의 것임을.

    “내게 더는 청렴함은 필요 없어. 난 정상에 서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쓸 거야. 그게 살인이든, 마약을 팔아 돈을 벌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아.”

    “태산아!”

    “검사 때 가졌던 그 마음, 이미 버린 지 오래야. 하지만 넌, 그 마음 잊지 말고 살아. 모든 더러운 오물은 내가 다 쓸게. 너는 대한민국 유일하게 깨끗한 공직자가 되는 거야.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잖아.”

    연욱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마음 나도 백번 헤아린다.

    저 녀석은 날 고기방패로 쓰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 약속할게. 네가 정말 검찰총장이 되면 네가 잡고 싶어 하는 새끼들, 다 가져다 바칠게. 그리고 네가 총장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자, 잠깐. 총장보다 더 높은 자리라니?”

    “연욱아.”

    난 연욱이의 양어깨를 붙잡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이 녀석에게도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

    “넌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대통령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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