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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검사, 마피아 되다-21화 (21/325)
  • 21화. 진면목 (2)

    회장 이철호에게 대놓고 핀잔을 던지는 사람이 과연 이 나라에서 몇 명이나 될까?

    권용일이 유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아이고. 그쪽이 애새끼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고? 저 새끼 꼬락서니를 보니, 나이도 좀 먹은 것 같은데…. 너, 올해 몇 살이냐?”

    이강혁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저 마음,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는다.

    고작 깡패 두목이라는 영감이 감히 왕 앞에서 저렇게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조차도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강혁도 좀 그렇겠는가?

    “회, 회장님.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일단 앉아라.”

    부회장 이강혁은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당장이라도 고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것처럼 보였다.

    “인사드려라. 권용일 사장이다.”

    권용일은 허리를 쭉 펴고 팔짱을 낀 채 이강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대로 인사를 받겠다는 표현. 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고개를 숙일 천성의 핏줄이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왕처럼 받들어지던 놈이 아닌가?

    “회장님. 말씀해 주십시오. 도대체 이 깡… 아니,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거참. 인사 한번 받기 더럽게 힘드네. 이놈아. 내가 너보다 20년은 더 살았어.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뭐? 이 사람?”

    이강혁은 권용일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회장 이철호만 바라보았다. 나도 이철호의 대답이 참 궁금했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뭐란 말인가?

    “인사드리라니까! 지금 애비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기대했던 불호령은 권용일이 아니라 이강혁한테 떨어졌다. 그는 망치에 한 대 맞은 듯이 멍한 얼굴빛을 띠었다.

    여전히 권용일은 저 자세로 상대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고개나 숙이라는 자세였다.

    결국, 세자는 왕의 명령에 입술을 앙 다문 채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허허. 그래그래. 원래 이럴 땐 용돈이라도 줘야 하는데, 나이도 있고 하니 안 줘도 되지?”

    이 양반, 상대를 놀려 먹는 거 하나는 최고다. 지금쯤 이강혁 속이 몇 번은 뒤집혔을 것이다.

    “이번 여의도에서 있었던 일, 권 사장한테 다 들었다.”

    이철호가 운을 떼자, 이강혁은 할 말이 많았는지 목소리부터 높였다.

    “웬 깡패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여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적합한 절차에 따라 검찰과 경찰이 곧 움직일 겁니다.”

    권용일을 노려보는 이강혁의 눈빛이 매서웠다.

    저건 경찰과 검찰을 동시에 움직이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다. 역시, 제대로 일을 벌이려는 건가?

    그런데 다음으로 나오는 이철호의 말이 참 놀랍다.

    “거기서 멈춰라. 내가 벌써 그쪽에다 얘기해 놨으니, 더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아, 아버지!”

    참다못한 이강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철호는 그런 아들에게 호통을 치기보다는 눈을 무섭게 치켜뜬 것으로 대신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이강혁은 작게 신음을 뱉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권 사장과도 이야기를 끝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여의도에서는 손을 떼.”

    “하, 하지만….”

    “지금 애비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냐?”

    “…아닙니다.”

    세자가 꼬리를 내리자, 황제는 다시 권용일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제 자네도 그만하지?”

    “내가 뭘? 내가 누구처럼 나랏일 하시는 분들 들쑤시고 다녔나?”

    “자식새끼가 맞고 들어오는 걸 애비라는 사람이 계속 보고 있을 순 없잖나?”

    여기서 더 선을 넘게 되면 그땐 자신이 나서겠다는 이철호의 경고였다.

    “허허. 사실, 나도 이놈이랑 한 판 뜰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어. 우리가 남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왜 남의 일터에 와서 깽판을 쳤어?”

    “주인도 없는 땅이었잖나? 천성이 먼저 와서 깃발 꽂았으면 내가 이 친구를 말렸겠지.”

    권용일이 나를 가리키자, 이철호와 이강혁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이 어린 친구?”

    “그래. 이 당돌한 녀석이 글쎄, 어디서 똘마니들을 다 끌고 와서 나한테 협박을 하더라니까? 이 나이에 젊은 놈을 두드려 팰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권용일은 분수에 맞지도 않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대한민국 최대 기업의 건국 신화를 쓴 전설이 내게 흥미를 보이니, 조금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큰 형님. 제가 언제 협박을….”

    “아이고, 이것 봐! 이놈이 이렇게 뻔뻔해요. 지금도 눈 부릅뜨고 늙은이 입부터 막으려고 하잖아.”

    이 양반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도 이렇게 나를 띄어 주는 건 썩 나쁘지 않다.

    이철호의 관심을 끄는 것만큼 좋은 수확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때론 이런 관심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힐 수도 있기에 걱정도 됐다.

    “아-. 이 친구가 그 친구였구먼. 그 연합인가 뭔가로 여의도를 뒤집어 놓은 그 어린 학생이.”

    “하, 학생?!”

    학생이란 말에 이강혁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철호는 한심하다는 듯 아들 녀석을 바라본 뒤, 내게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산이라고 합니다.”

    이철호는 슬쩍 권용일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이 영감탱이 옆에서 뒤치다꺼리하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좀 수틀리면 나한테 와. 좋은 자리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진심인지, 그냥 겉치레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아! 자꾸 내 새끼들한테 눈독 들일 거야?”

    “시끄러워. 아무튼, 자네는 종종 놀러 오게. 문전박대하진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흡사 학교 동창을 보는 것 같다.

    과연 둘 사이에 어떤 고리가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참나. 회장 노릇 하더니, 이젠 술 한 잔도 안 주고 내치려는구먼.”

    “찬물 안 뿌린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

    “어련하시겠소.”

    권용일은 볼일 다 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이 영감탱이가 또 심술부리기 전에.”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정해졌다.

    휴전협상이 체결된 것이다.

    * * *

    권용일과 저 꼬맹이 녀석이 회장실을 나가기 무섭게 이강혁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니, 회장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궁금한 게 한둘이 아녔다.

    저런 깡패 새끼가 날뛰는 걸 왜 가만히 지켜만 본단 말인가?

    “술 한잔할 테냐?”

    이철호는 동문서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위스키 한 병을 땄다.

    “아버지!”

    “한심한 놈.”

    이철호의 얼굴을 마주한 이강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저렇게 험악한 표정을 할 때면 항상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던가?

    “내가 던져 준 부회장이라는 타이틀을 하고 다니니까, 세상이 다 네 맘대로 돌아갈 것 같더냐?”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 위스키 병이 날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철호의 음성은 차분했다.

    “내가 항상 말했지? 까불지 말라고. 세상에는 날고 긴다는 놈들 천지야.”

    “아무리 그래도 저놈들은 깡패 새끼 아닙니까? 우리는 천성입니다. 왜 저따위 놈들을….”

    이철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차, 큰 실수를 했다.

    이철호가 제일 싫어하는 말대꾸를 하다니!

    “이런 등신 같은 새끼!”

    아니나 다를까, 이철호가 들고 있던 위스키병이 그대로 날아와 자신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프다며 낑낑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럼, 더 큰 게 날아올지도 모른다.

    “넌, 저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조사를 하기나 했어? 이 한심한 놈아! 내가 오늘, 네 목숨 살려 준 거다. 알아?”

    “예…?”

    목숨을 살려줬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화진은 나와 상생하는 관계야. 네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조사를 했으면 그걸 몰랐겠어?”

    상생이라니. 그런 깡패 새끼들과 천성이 말인가?

    “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놈들이랑 어떻게 상생을 한단 말입니까?”

    이철호는 이놈에게 준 부회장 명패가 아깝게 여겨졌다.

    하나를 말하면 적어도 둘은 알아먹어야 하지 않은가. 이놈은 일일이 다 설명을 해 줘야 한다.

    “멍청한 놈. 천성이 그깟 물건 팔아서 여기까지 잘 올라온 줄 알아? 손에 피를 묻힐 땐 과감하게 묻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부회장이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이강혁도 천성의 부회장이다.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대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영토가 넓어지고, 적들의 피로 땅이 비옥해진다.

    그제야 이강혁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었다.

    “우리의 칼잡이였습니까? 화진이?”

    “용병이라고 해 두자.”

    화진은 천성에 복종하는 자객이 아니다. 언제든 천성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용병이다.

    용병의 주인은 돈이지. 결코, 사람이 아니다.

    지금 천성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왕가를 이루었다. 이제 제국으로 발돋움하기까지는 조금 아주 조금 남은 상황. 이 상황에서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들이 일이라도 내면 그 꿈은 더 멀어질 것이 분명하다.

    아직 이 나라의 최고는 금양 그룹이 아니던가? 그들을 몰아내려면 구린 짓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때 용병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네가 끝까지 갔다면, 저놈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을 것 같냐?”

    설마 했지만, 조금 전 그 능구렁이 같은 노친네를 만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저놈들이 작정했다면 무슨 짓이라도 벌였을 것이다.

    의뢰를 받고 칼을 쓰는 게 저놈들의 생업 아니던가?

    순간, 이강혁의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천성의 부회장이 된 이후로, 세상 누구도 감히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자신 위를 날아다니는 사람도 많다.

    “아직 천성은 무적이 아니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항상 조심해라. 방심했다가는 그날로 저 세상 가는 거야. 알겠어?”

    다시 부드러워진 이철호의 음성에 이강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직 천성은 무적이 아니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아직은!

    * * *

    “잘 배웠냐? 네놈의 그 멍청한 얼굴을 보니까,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보며 이 양반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참, 양파 같은 사람이다.

    까면 깔수록 새롭다. 하지만 회장실 밖으로 나오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니, 대충 짐작이 됐다.

    “천성과 화진이 손잡고 같이 레이스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철호 회장의 반응을 보고 눈치챘다.

    적들을 암살하는 자객.

    화진은 이미 이때부터 천성이 용병처럼 쓰던 칼잡이였다는 걸.

    “하나를 알려주면 두 가지 이상을 알아들으니, 참 마음에 들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내가 왜 이걸 몰랐지?

    화진이 천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대기업 간의 비즈니스 관계라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화진파가 화진 그룹이 될 수 있었던 건, 스폰서도 스폰서지만 천성의 더러운 것을 뿌리부터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내 실수다.

    “아직 세상은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

    권용일의 말이 맞았다.

    지금 세상은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시대다.

    그러니까 저 조폭들이 거리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천성도 이런 조폭들과 손을 잡는 것이고.

    “물론, 이것도 몇 년 안 남았어. 그러니까 유통기한 끝날 때까진 계속 써야 해.”

    권용일의 통찰력도 참 대단하다. 이 사람은 주먹의 시대가 곧 끝난다는 걸 알고 있다.

    “서민의 삶에 질이 올라가면 공권력도 강해진다. 우리 같은 깡패들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게지.”

    지금 깡패 두목 중 권용일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현 정권이 끝나면 그들도 같이 파멸된다는 걸 모른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내 생각이 맞는 거 같냐?”

    이 양반은 내게 또 시험 문제를 던져 준다.

    과연 내 대답을 이 양반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현 정권이 끝나면 엄청난 피바람이 불게 될 겁니다. 조폭을 없애고 치안을 확립한다는 것만큼 정부에게 더 좋은 명분이 있을까요?”

    “국민들에게 인기 좀 얻겠다고 깡패를 잡는다? 나쁘지 않구나.”

    이미 여러 차례 정부에서 시행한 일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수박 겉핥기식이었다.

    다음 정권부터는 진짜 피바람이 분다.

    “줄을 제대로 잡고 있던 조직은 살겠지만, 대부분은 갈기갈기 찢어지겠죠.”

    “그럼, 줄을 제대로 잡고 있는 조직만 살아남는다?”

    “아뇨. 간신히 호흡기만 달고 있을 겁니다. 진짜 살아남으려면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골탈태?”

    “예. 대기업을 보세요. 저놈들이 우리보다 더 악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국민이 손가락질은 좀 해도, 저들을 솎아낼 생각은 안 합니다. 저들의 외형은 대기업이니까요.”

    “네가 말하고 싶은 건, 깡패들이 제대로 양복 입고 회사원 노릇을 해야 한다는 거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서민의 삶에 질이 올라가면 공권력도 강해집니다. 그럼, 조직이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우리도 질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가면을 써야 합니다.”

    “가면을 쓴다?”

    “우리의 시작이 어디인지, 국민들도 모르게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기업이라는 가면으로요.”

    내 대답은 끝났다. 이제 이 영감의 반응이 중요했다.

    “하하하-!”

    이 사람은 박장대소하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넌, 내가 이제까지 봤던 놈 중에 제일 나쁜 놈이다. 아-! 제일 음흉하기도 하고.”

    권용일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어찌 이리도 비범할꼬.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말이다.”

    다행이다.

    이 늙은이가 생각한 대답을 정확하게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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