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진면목 (1)
6월 7일.
서울대에서 전학련이 광주항쟁 및 군부독재에 대한 범국민 자유 토론회를 열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학생들이 정부를 향한 거센 비난을 서슴없이 날렸다.
이것을 곱게 볼 리 없는 정부는 당연하다시피 조폭들을 동원해 그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다음 날인 8일에는 전학련 의장을 긴급 체포했다.
한쪽이 들고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면, 정부는 그 불길을 잡느라 급급하다.
만일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시종일관 방관하며 부드럽게 대처를 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독재는 계속되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성일환은 싱거운 놈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의도를 수복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안정화를 하느라 화진파 조직원들이 상당수 동원 되었는데, 다른 일을 모두 제쳐두고 여의도에 자리를 잡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여의도에 지원해 주는 건 20명이 최대야. 괜찮겠냐?”
20명이면 확실히 인원이 부족하다. 그래도 추가로 계속 조직원들을 뽑으면서 충당을 해 준다고 하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더 필요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정말 나한테 이렇게 순순히 여의도의 관리를 맡기는 것인가?
나야 좋긴 하지만, 권용일이란 사람의 꿍꿍이가 심히 궁금하다. 도대체 나에게서 뭐를 봤기에 이런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단 말인가.
“너한테 여의도 관리를 맡긴단 얘기를 듣고 거품 무는 윗대가리가 많아. 조심해라.”
소위 말하는 윗대가리들은 성일환도 포함이다. 그런데 그는 내 걱정을 다 해 준다.
이 사람은 바보인 건지, 아니면 질투심이라는 게 없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저 하나쯤은 갈아 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가 보군요.”
“막 나가는 놈들이 좀 있긴 하지.”
아무리 오야의 명령이 있었다고 해도, 식구 담금질하는 건 조폭들의 취미 생활 아닌가?
화진파라고 해서 그 악취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담그고 나서 난 그런 적 없다고 나 몰라라 하면 끝나는 게 이쪽 세상이다.
나도 스스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미래는 나로 인해 바뀌기 시작했으니까.
천성이 가졌어야 할 여의도를 내 손아귀에 넣었을 때부터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앞으로 주변을 더 면밀히 살피며 내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세계에서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다.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게 이 세계의 법칙 아닌가?
그나저나 천성이 잠잠한 게 좀 이상하다. 우리가 안정화를 하기 전에 또 한 번 치고 들어올 줄 알았더니, 설마 여의도를 이렇게 포기한 건가?
깡패로 안 되면 정부를 이용해서라도 우릴 몰아낼 수도 있다는 건데.
천성이 경찰이나, 검찰을 움직이면 우리가 불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의 침묵이 생각보다 길다.
뭔가 왔으면 벌써 왔어야 했다. 내가 아는 천성이라면 이렇지 않을 텐데.
뒤에서 더러운 짓을 꾸미는 게 이놈들 특기가 아닌가.
일주일이 흐를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조금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놈들 속셈이 뭘까?
* * *
“허허. 이놈, 열이 뻗치긴 했나 보네.”
권용일이 너털웃음을 띠자, 성일환은 바짝 속이 타들어 가는지 얼굴빛이 영 아니다.
“웃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놈이 검찰이랑 경찰을 가리지 않고 들쑤시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예?”
“확 담가 버릴까, 그놈?”
“….”
성일환은 권용일의 안색을 가만히 살폈다. 그가 진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면? 일환이 네가 담그게?”
“저야 큰 형님 오른팔을 자처하는 놈 아닙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겁먹은 꼬맹이 녀석처럼 움츠러들어 있던 사람이, 지금은 단호한 얼굴빛을 띠고 있다.
시키면 정말 할 생각인가?
하긴. 권용일 옆에서 성일환이 손수 피를 묻힌 게 한두 번도 아닐 것이다.
타깃이 천성 그룹 회장의 첫째 아들이라고 해도, 성일환에게는 권용일의 명령이 천명과도 같아 보였다.
“됐어, 인마.”
권용일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그제야 성일환의 얼굴도 풀렸다.
“얼마나 심각해? 나라님이 우리 나와바리 확 뒤집어 깐 대냐?”
“아직 허락은 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천성이 그쪽에 뽀찌 주면서 벌인 일 아닙니까?”
성일환의 말이 맞다.
얼마를 뿌렸는지는 모르겠다만, 경찰과 검찰 모두 이번 일을 못 본 척 넘겨 버렸다.
판을 깔았던 건 천성이라는 소리다. 물론, 자신들이 깔아놓은 판에 훼방꾼이 등장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권용일은 이제 내게 바통을 넘겼다.
갑자기 날 천안까지 불러 놓은 이유가 책사 놀음을 시키려고 했던 건가?
“천성이 계속 들쑤시면 결국 경찰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천성의 무기는 돈이다. 그놈들이 작정하고 돈을 뿌리기 시작하면 경찰은 반드시 움직인다.
“그렇지? 그놈들이 돈 지랄을 해대면 짭새들도 못 배기겠지?”
“돈에 장사 없습니다. 그게 경찰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대가 80년대 아닌가?
경찰들이 저지르는 비리야 21세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깡패들 잡는다는 명분으로 경찰들이 나서면 골치 아파진다.
“이놈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어쩔 수 없구먼. 그 양반 첫째 아들 이름이 뭐라고?”
“이강혁입니다.”
천성 그룹의 부회장 이강혁.
그가 이번 여의도에 판을 깔았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진 인물이다. 지금쯤 배알이 꼴려 경찰한테 돈다발을 뿌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새끼를 족쳐야 우리가 무사하다는 거지?”
“사실, 이번 여의도 일 할 때부터 각오했던 일입니다. 맡겨만 주시면 뒤탈 없는 애들로 잡아다 놓겠습니다.”
“뒤탈이 없는 애들? 그 짱깨 놈들 부르려고?”
“아니면 소련 쪽에 연락을 넣어 볼까요?”
짱깨? 소련?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됐어. 이 나라에서 총질하는 건 군인으로 족하다. 쌩뚱맞은 곳에서 총소리 들렸다가, 나라님 귀에 들어가 봐. 광주 사태가 여의도에서도 일어난다.”
“총보다는 역시, 회 치라는 말씀이시군요.”
이 두 양반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설마, 이 사람들은 정말 천성 그룹 회장의 첫째 아들을 죽일 생각인가?
권용일이 총질은 안 된다고 한 건,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봤을 때 총을 사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군대를 이용해 국민의 심장에 총을 쏜 군부다.
이들이 깡패들한테 총질하는 걸 두려워하겠는가? 그것도 총기를 써서 천성 그룹의 사람을 죽인 놈들한테?
우리나라가 외국처럼 맘대로 총을 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총기만큼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민감한 곳이 아닌가?
그래서 성일환이 총보다 칼이 낫겠다고 한 것이었다.
칼 좀 쓰는 조선족들을 밀항시켜서 조용히 이강혁을 담근 다음에 손을 터는 것.
전형적인 조폭들의 오리발 수법이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러다가는 이강혁이 찍소리도 못하고 죽게 생겼다.
그 뒷감당을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 양반들이….
“일단 칼잡이 놈들 준비시켜.”
“예, 큰 형님.”
정말 할 생각이다.
권용일의 명령이 떨어졌고, 성일환은 바로 밖을 나가버렸다.
“넌 나랑 어디 좀 가야겠다.”
“예?”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나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왜, 천성이라고 해서 내가 못 담글 줄 알았더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이철호 회장의 첫째 아들을 담그는 순간, 화진파는 천성의 숙적이 된다. 그리고 그건 화진파의 멸망을 뜻하기도 했다.
아무리 천성이 대한민국의 행정부를 장악하진 못했다고 해도, 그들이 사방에 돈을 뿌리기 시작하면 화진파는 숨이 막혀 죽게 될 것이다.
“허허. 당돌한 녀석일세. 아무튼, 넌 나 좀 따라와라.”
이 영감을 막아야 하는데,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화진파가 이렇게 파멸의 길로 갈 줄 알았다면, 난 여의도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난 권용일과 함께 차량 뒷좌석에 앉았다. 내가 그의 옆에 궁둥이를 붙이기 무섭게 질문이 날아들었다.
“쫄았냐? 내가 천성이랑 제대로 맞짱 한번 뜬다고 하니까?”
표정관리가 제대로 안 된 건지, 아니면 그냥 짐작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의 말이 사실이긴 하다. 내가 계획한 일들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봐 좀 두렵긴 하다.
“아니라고 하면 안 믿으시겠죠?”
“그놈들 무서워할 이유가 뭐 있다고?”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한 건가?
화진파의 보스라고 이렇게 사리분간을 못 할 줄이야.
아직 화진파는 조폭이다. 천성처럼 그룹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렇게 무작정 일을 치르게 되면 화진파는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만 봐도 알겠다. 내가 뭔 개 짓거리를 하는 거 아닌가 싶지?”
이 사람은 관심법이라도 부리나?
사람 속을 참 잘 꿰뚫어 본다.
이렇게 통찰력도 좋은 양반이 왜 이번 일은 이따위로 처리하는 건지 모르겠다.
“천성과 화진은 이미 전쟁을 시작했다. 네가 여의도를 넘보면서부터 말이야.”
결국, 이 싸움은 내가 시작했다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연욱이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내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 같다.
“그래도 허구한 날 전쟁만 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어요. 좀 쉬엄쉬엄해야 먹고 살지. 그러니까 저기 북쪽에 있는 놈들도 30년 넘도록 조용하잖아.”
“휴전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까?”
“그래. 그런데 휴전이란 건 서로 목숨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없으면 이뤄질 수가 없어.”
이강혁 목숨으로 천성과 협상을 해 보겠다는 얘기다.
글쎄.
그 천성이 순순히 화진파의 요구대로 따라 줄까? 그리고 이 협상은 어디까지나 이강혁의 목숨 줄을 제대로 쥐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일단 가 보자. 그 양반이 뭐라고 하나 들어는 봐야지.”
“예?”
그 양반이라니? 지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휴전이란 건 오야끼리 맺는 거야. 똘마니들끼리 휴전해서 뭐해? 오야가 그만하자고 해야 멈추지.”
천성 그룹의 오야는 부회장 이강혁이 아니다. 그는 화진파의 인질이 될 상대지, 오야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천성 그룹 회장 이철호를 말하는 건데, 지금 이 길로 그 사람을 만나겠다는 건가?
권용일은 아직 깡패 두목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을 그룹 회장인 이철호가 왜 만나준단 말인가?
* * *
“뭐야, 이거?”
“말씀하신 보고서입니다.”
“야 이 새끼야. 그걸 지금 내가 몰라?”
이강혁은 개떡 같이 말하면 항상 개떡 같이 알아듣는 놈 때문에 화가 났다. 이런 놈이 자신의 비서라는 게 한심할 지경이다.
“왜 이것들이 수사 불가라고 도장을 찍은 거야?”
경찰과 검찰이 화진파 조사를 꺼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고서에도 수사 불가라는 말이 나와 있지 않은가?
이미 이들과 컨텍을 한 전략실에서 나온 보고서이니,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경찰과 검찰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중간에서 자른 모양입니다. 경찰도 그렇고, 검찰에서도 이번 일을 마뜩잖아 합니다.”
“그러니까 왜? 내가 그 새끼들 입에 돈 쑤셔 넣으라고 했잖아!”
“그렇게 해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더 위에서 자른 듯합니다.”
“더 위?”
이강혁은 전화기를 그대로 비서에게 던져 버렸다.
“야 이 새끼야! 내가 그 위야. 누가 나보다 더 위에 있는데? 화진파 새끼들 빽은 하나님이라도 되냐?”
“그게….”
우물쭈물하는 비서의 면상을 보는 게 더 화딱지가 났다. 저놈을 패놔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것 같았다.
“넌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짝!
이강혁은 사정없이 비서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부회장님.”
노크를 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인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다.
여의도 일로 부르는 건가.
다른 놈도 아니고 깡패들한테 여의도를 뺏겼으니, 회장의 잔소리가 벌써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제기랄.”
부회장은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서 있는 비서를 한 번 노려봤다.
“너, 아직 나랑 얘기 안 끝났다. 기다리고 있어.”
“예….”
“한심한 새끼.”
이강혁은 저놈을 오늘이라도 당장 잘라야겠다고 결심한 뒤, 비서실장을 따라 회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서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면 될까?
그는 회장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정중히 인사부터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비록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이 천성이라는 왕국의 왕이지 않은가?
아무리 세자라도 왕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회장실 안에 손님들이 와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 좀 들어 보이는 영감 하나와 어린놈 하나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독 저 영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너, 너는…!”
곧 상대를 알아본 이강혁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허허. 젊은 친구가 말버릇이 없구먼. 그쪽은 애새끼들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는 자신이 쥐 잡듯이 털고 있던 화진파의 두목 권용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