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백호 2 >
라파시드의 패턴이 대단한 이유는 그것이 근원의 힘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강하진은 아직 근원의 힘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그저 시스템에 관계된 무언가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라파시드가 남긴 열 가지 힘을 다루는 법이 담긴 정보가 바로 라파시드의 서였다.
강하진은 지금 펼쳐진 이 함정을 세밀히 살폈다.
이걸 더 완벽하게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변수를 최소로 줄이려면 그래야만 한다.
사실 이 함정은 한꺼번에 여러 패턴을 동시에 그렸기 때문에 그저 최소한의 기준만 넘었을 뿐, 완벽하게 그려내지 못했다.
강하진은 그 부분을 세밀히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들고 복잡하고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그리려면 이 함정을 없애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강하진은 최대한 집중해서 패턴을 수정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려운 걸 시도할수록 큰 경험이 되고, 실력도 많이 오른다.
라파시드의 서에 대한 이해도가 좀 더 깊어졌다. 또한 패턴에 대한 숙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슬슬 패턴을 전수할 방법을 고민해 봐도 되겠어.’
사실 아직 그건 좀 무리였다.
패턴을 전수하려면 라파시드의 서를 완벽하게 통찰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늘 그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제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이걸 유동훈에게 전수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강하진이 펼치는 것보다는 훨씬 수준이 떨어지겠지만, 그걸 장비에 새길 수 있다는 장점은 그 모든 걸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매리트였다.
패턴 수정을 끝낸 강하진은 라파시드의 힘을 이끌어냈다.
일단 관통의 장을 통해 혈백호의 시스템 방벽을 꿰뚫었다.
그 과정에서 은폐와 왜곡의 장을 이용해 혈백호의 감각을 비틀고 속여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그와 동시에 아까 흡수한 계약의 끈을 분해한 후, 융합의 장을 써서 강하진의 시스템에 이어 붙였다.
그리고 끈의 나머지 한 쪽을 혈백호의 시스템 내부에 이었다.
이로써 계약의 끈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강하진은 폭발의 장을 썼다.
폭발이라는 건 무언가를 터트리는 힘이기도 하지만, 조절하기에 따라 증폭으로 쓸 수도 있었다.
물론 순간적인 일이지만, 이것은 계약이기 때문에 충분히 써먹을 만했다.
강하진은 폭발의 장을 이용해 계약의 끈을 순간적으로 증폭시켰다.
그 모든 과정이 평온의 장 안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고요한 상태로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조용히 끝났다.
혈백호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강하진에게 다가왔다.
강하진은 분명히 은폐와 왜곡을 통해 숨어 있었는데도 혈백호는 강하진의 존재 자체를 감각으로 포착한 건지 거침없이 강하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강하진의 다리에 뺨을 부볐다.
이러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고양이였다. 그것도 마치 빛이라도 나는 것처럼 새하얀 털에 점점이 검붉은 얼룩이 박혀 있는 특별한 고양이였다.
강하진은 혈백호와 자신 사이에 이어진 계약의 끈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주종 관계라기보다는 동료 관계에 좀 더 가까운 계약이었다.
제니퍼가 피의 거인과 했던 계약이 아마 이런 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계약 상, 강하진이 분명히 우위에 있었다.
강하진은 혈백호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라파시드의 서를 이용해 만든 함정을 지워버렸다.
“가만있자······ 이름을 하나 지어줘야 할 것 같은데······.”
강하진의 머릿속에 점박이나 얼룩이 같은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이름을 지었다간 왠지 혈백호와의 관계가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그냥 백호라고 하자. 괜찮지?”
혈백호가 마음에 든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르릉거렸다.
그리고 강하진의 품에 안긴 채 슬그머니 잠들어 버렸다.
강하진은 이름을 지어준 순간, 시스템과 혈백호, 그리고 자신과 이어진 계약의 끈이 훨씬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이름을 주고받는 것 자체에 뭔가 의미가 깃든 모양이었다.
강하진은 잠든 백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주 강력한 우군 하나를 얻었다.
아마 백호는 앞으로도 계속 강해질 것이다. [포식]이라는 희귀한 스킬을 갖고 있으니까.
다른 괴물을 사냥해 각성자들이 레벨을 올리듯, 백호는 다른 괴물을 포식해서 힘을 얻고 레벨을 올리고 또 격을 올릴 수도 있었다.
강하진은 잠든 백호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봤다.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찰을 나갔던 동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던전 코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 * *
강하진의 품에 안겨 잠든 백호를 보고 가장 기겁한 사람은 황수영이었다.
“으악! 그거 뭐예요!”
강하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백호라고 부르면 됩니다. 귀엽죠?”
“예? 귀엽냐고요? 네, 귀엽네요. 생긴 건 정말 귀여워요. 그런데 그거 행동은 그렇게 안 귀여울 걸요? 아까 저놈 앞발질 한 방에 온몸이 터져서 피를 철철 흘리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제 손바닥 다 찢어졌던 거 아까 안 보셨나? 보셨을 텐데?”
“지나간 일로 너무 열 내지 마시고 미래를 봐주세요.”
“예?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 강하진 씨 품에 안겨 있는 현재의 일인데요?”
물론 약간 흥분 상태이긴 했지만, 황수영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대충 파악했다.
그래서 사실 지금 하는 말 대부분은 농담에 가까웠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왜 그 괴물이 그렇게 얌전한 고양이가 된 거죠?”
“얌전한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죠. 지금은 자고 있으니까 얌전해 보이는 것뿐이죠.”
강하진의 말에 황수영이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러니까 그 위험한 걸 왜 데리고 있느냐고요.”
“제가 계약했습니다.”
“예? 계약이요? 무슨 계약이요? 서, 설마 테이밍?”
테이밍이라는 말에 강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뭐, 비슷하겠네요. 일단 동료 비슷한 관계가 된 건 맞습니다. 아마 앞으로 우리 일을 잘 도와주겠죠.”
황수영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백호의 힘을 이미 몸을 겪어봤다. 저런 괴물이 같은 편이라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도움이 될지 상상이 잘 안 갔다.
“앞으로 우리 던전 브레이커 따위 필요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나중에는 황수영 씨가 여기 백호보다 훨씬 강해질 텐데요.”
“어······ 그야 그렇겠죠?”
강함에 대한 황수영의 열망은 엄청나다. 거기에 가이아의 선택까지 받았으니 미래가 보장된 인재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투병사의 지휘관이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인재였다.
지휘관이 늘어나면서 강하진은 전투병사에 대한 새로운 힘을 하나씩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전투병사가 되면 1000레벨의 벽을 깨뜨리기 쉬운 상태가 된다.
지휘관이 되면 2000레벨의 벽을 깨뜨리기 쉬운 상태가 되고.
병사가 되고 지휘관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벽을 깰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깰 가능성이 월등히 높아진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대단했다.
노력만 하면 어떻게든 벽을 깰 수 있다는 뜻이니까.
“던전 브레이커 분들도 다들 인재입니다. 미래가 기대되는 분들이죠.”
“어······ 고, 고마워요.”
황수영은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대체 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자, 그럼 일단 코어부터 박살 냅시다. 이 던전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드네요.”
“이상한 느낌이요?”
황수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왠지 코어를 부수지 않아도 던전이 그냥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예? 정말요?”
사실 더 정확한 것은 이 던전에 자리 잡았던 13마리 괴물들이 각각 코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 괴물들을 모조리 백호가 포식하면서 코어의 힘도 하나로 모여들었다.
지금 백호의 몸속에 던전 코어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비요?”
“던전이 터졌을 때의 대비를 해둬야겠습니다. 코어는 확실히 확인하셨죠?”
황수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하진이 근처에 다가온 김지헤와 이지영을 보며 말했다.
“세 분이 같이 코어를 부숴주세요. 나머지 분들은 전부 밖으로 나가서 던전 폭발에 대비하겠습니다.”
“설마 코어를 부수면 이 던전이 터지나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안 그럴 수도 있지만, 강하진은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만일 던전이 터진다면 어떻게든 그 피해를 최소로 줄여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 있었던 하와이에 관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하와이에 허리케인이 몰려와 섬 하나의 표면을 싹 날려 버렸다는 기억이었다.
워낙 큰 사건이었는지라 연일 뉴스에서 떠들고 헬기와 드론을 동원해 하와이를 촬영해서 내보냈다.
그때 화면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허리케인이 진짜 무섭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던전이 터지면서 마력 폭발로 인해 주변이 싹 쓸려 나가면 그런 광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감췄어.’
제니퍼가 백호를 데리고 나갔을 테니,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제니퍼는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도 그냥 저지른 것이다.
“준비에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러니 한 시간 후에 코어를 부수세요.”
넉넉하게 한 시간이다.
강하진은 그 말을 남기고 던전에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A-마켓의 각성자들이 보였다. 그들 중 몇 명이 다가왔는데, 강하진은 그들을 더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던전을 중심으로 라파시드의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력 폭발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폭발의 방향을 위로 틀어버리면 어떨까?
강하진은 반사의 장, 흡수의 장, 왜곡의 장, 분해의 장, 평온의 장을 이용했다.
마력 폭발을 하늘로 날려 보내기 위해 반사의 장을 이용해 힘의 방향을 바꾸고, 왜곡의 장을 이용해 주변의 공간을 위쪽 방향으로 왜곡했다.
반사하지 못하고 남은 잉여의 힘을 왜곡해 위로 보내는 것이다.
그조차 넘어선 힘은 흡수의 장과 분해의 장을 이용해 대기 중에 흩어 버리도록 조치했다.
마지막으로 평온의 장을 이용해 주변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했다.
패턴을 모두 설치한 강하진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모든 각성자들을 주변에 빈틈없이 배치했다.
저 던전 안에는 아무 괴물도 없지만, 만일 던전의 특성이 안에 있는 괴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 처음 나타났던 뉴타입 던전처럼 다른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방식이라면, 폭발 이후 괴물들까지 나타날 것이다.
그놈들은 직접 싸워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 폭발하고 나면 라파시드의 패턴은 모두 망가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뭐······ 회귀 전에도 하와이의 재난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른다. 그때 괴물이 나왔고, 그 괴물을 제니퍼를 비롯한 당시의 가디언스에서 모두 처리했을지도.
잠시 후, 던전이 폭발했다.
콰우우우우우우우!
거대한 마력 폭발이 일어났지만 그 폭발의 힘은 모조리 위로 쏟아졌다.
마치 하늘이 꿰뚫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다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침 그곳에 있던 구름이 마력 폭풍에 직격당해 구멍이 뻥 뚫리다 못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더니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지름 100미터짜리 거대 던전이 터지면서 생겨난 마력 폭풍을 완벽하게 막아낸 라파시드의 패턴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흩어져 버렸다.
강하진은 그걸 보며 자신의 실력이 더 올라가면 저 정도 폭발을 견디고도 멀쩡한 패턴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력 폭풍이 사라지자, 괴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회귀 전에도 괴물이 나왔던 것이다. 아마 마력 폭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괴물에 당해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재난 이후의 사진 외에는 아무 증거도 없었던 것 아니겠는가.
강하진이 힐끗 주위를 둘러보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다들 난리였다.
특히 가디언스와 던전 브레이커의 길드원들은 던전에 왔는데 아직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못한데다가, 그나마 전투라고 한 것도 혈백호를 막느라 당하고 도망친 기억밖에 없어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상태였다.
이번 기회에 그 짜증과 스트레스를 모조리 날려버리겠다는 의지가 그들의 눈빛을 통해 고스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하죠.”
강하진의 버프가 모든 각성자들에게 공평하게 쏟아졌다.
그들은 갑자기 솟아나 끓어오르는 거대한 힘에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함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악!”
전장의 함성을 내지르며 가디언스와 던전 브레이커, 그리고 디펜더스의 각성자들이 괴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어느새 눈을 뜬 백호가 몸을 훌쩍 날렸다.
-크워어어어어!
작은 고양이답지 않은 위압감 넘치는 거대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이내 백호는 한 줄기 새하얀 선이 되어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하진은 회귀 전, 하와이에서 터진 던전을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아주 확실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