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펜더스의 음모 1 >
강하진은 이번에 새로 얻은 혼돈 속성을 여러 방법으로 사용해 보았다.
사실 달의 펜던트가 가진 능력을 갈취했을 때 생긴 혼돈 속성 개방은 가능성만 열었을 뿐, 실제로 속성을 획득한 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사무엘을 비롯한 젝스터의 부하들을 구해주면서 완벽하게 속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이 품고 있던 혼돈의 씨앗에는 순도 높은 혼돈의 기운이 잠들어 있었는데, 그걸 뽑아낸 것이다.
[초감각]을 통해 몸에 새긴 강하진의 감각과 속성부여를 오랫동안 쓰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속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혼돈 속성에 대한 가능성만을 갖고 이뤄낸 성과였다.
그들이 품고 있던 혼돈의 씨앗은 혼돈의 힘이 사라지면서 순수의 씨앗으로 변했다.
[순수의 씨앗]
[다양한 가능성의 원천. 발아와 동시에 능력을 부여해준다.]
원래는 다양한 종류의 괴물 중 하나로 변해야 하는데, 그것이 능력으로 바뀐 것이다.
아마 괴물이 보유하게 될 능력 중 하나를 얻게 되는 듯했다.
사무엘을 비롯한 20명의 각성자들은 강하진에게 구원을 받은 순간, 복종을 맹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저지른 죄의 대가를 강하진의 명령을 따르면서 갚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그 20명의 각성자들이 눈을 번득이면서 강하진 앞에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대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거랑 내 명령을 듣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강하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어쨌든 제법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20명이나 생겼다. 게다가 이들은 강하진에게 절대복종하겠다고 맹세한 자들이다.
거짓 맹세가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맹세였고, 시스템에 기록된 맹세였다.
이들은 절대 강하진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젝스터의 권속으로 살았던 부작용 같네.’
하지만 젝스터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들보다 훨씬 더 독립적이었다. 어쩌면 타 차원 시스템으로부터 이쪽 시스템에 편입시킬 때, 강하진의 힘이 개입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시스템을 바꾼 셈이었으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강하진은 그 말에 상념을 털어내고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레벨도 제법 높은 편이었고, 그에 따른 능력치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가디언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또한, 이들이 가진 스킬들은 전투 보다는 잠입이나 교란, 암살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런 자들을 아주 잘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 가디언스에 한 명 있지 않은가.
“너희를 나보다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에게 데려다주지.”
다들 고개를 번쩍 들고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 어린 간절함에 강하진이 흠칫 놀랐다.
“저희는 마스터를 위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강하진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날 위해 더 잘 일할 수 있게 해주려는 거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날 위한 거니까. 그러니 지시를 잘 따르도록.”
그제야 그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 명인혁이 그곳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명인혁을 따라갔다. 이미 명인혁을 겪어 봤기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강하진은 그들을 처리한 다음 젝스터를 찾아갔다.
이제 젝스터만 처리하면 이번 일은 끝난다.
‘그의 친구들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이슨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니 잘 써먹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 * *
젝스터는 강하진이 사무엘 일당을 구해준 뒤로 제법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하진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강하진과 함께 있으면 오히려 큰 폐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하던 두 친구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강하진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통해 제이슨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젝스터의 눈빛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강하진은 그냥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왠지 젝스터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현재 멕시코의 상황은 아수라장이었다.
각성자가 두 파벌로 나뉘어 격렬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하나는 이번 재앙에서 도시에 괴물들을 묶어 놓던 각성자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존 각성자 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각성자들이었다.
당연히 후자가 더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숫자는 전자가 훨씬 더 많았다.
멕시코의 각성자들은 협회의 소수 권력자들이 모든 이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던 다수의 각성자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똘똘 뭉친 것이다.
수는 많았지만 기득권자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멕시코의 상황은 훨씬 더 금방 마무리 될 수 있었다.
들고 일어난 각성자들이 워낙 많아서 초반에 승부를 봤으면 협회가 그들을 막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데 그 중요한 시기에 협회를 도와준 자들이 있었다.
바로 디펜더스였다.
디펜더스는 가디언스의 성장에 굉장한 위협을 느꼈다.
현재 가디언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나라는 프랑스와 필리핀, 그리고 러시아였다.
또한, 이번 재앙에서 가디언스의 도움을 받은 나라들은 대부분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멕시코까지 가디언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 디펜더스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진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멕시코의 상황을 혼란으로 유도했다.
협회를 은밀히 지원해 멕시코의 각성자들이 똘똘 뭉치는 걸 방해한 것이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디펜더스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가디언스에 호의적이었던 나라들에 은밀히 가디언스를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러면서 가디언스가 아닌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전파했다.
디펜더스가 등장했을 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밑밥이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을 가디언스에서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명인혁의 정보망은 한국을 넘어서 신경망처럼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아직 전 세계의 정보를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는 안 되지만, 이상 현상을 캐치하는 건 충분했다.
명인혁은 바로 상황에 대응하고 강하진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래서 네 생각에 디펜더스가 언제 몸을 일으킬 것 같아?”
“당장은 힘들 겁니다. 뭔가 이름을 확 떨칠 만한 사건이 하나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긴 어려울 겁니다.”
“이름을 떨칠 만한 사건이라······.”
사실 그런 얼마 전에 일어난 두 번째 재앙이 제격이었다.
실제로 회귀 전에 가디언스가 확실히 이름을 떨치게 된 것도 그걸 이용해서였고.
물론 이번에는 그 과실을 현재의 가디언스가 독차지했지만.
두 번째 재앙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진다. 아무리 회귀 전보다 진행 자체가 빠르다고 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조용할 것이다.
강하진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명인혁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런 사건을 일부러 조성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직 디펜더스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확실히······ 그런 놈들이긴 하지.”
사실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긴 했다.
딱 두 번째 재앙이 터지고 난 다음 몇 달 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지다가 터진 일이었다.
그 몇 달 동안 가디언스는 착실히 인기를 다지기 위한 여론몰이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좀 시들해질 무렵 거짓말처럼 큰 사건 하나가 터졌다.
강하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기억을 되새기는 이유는, 당시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돌이켜 보니 이상한 구석이 많아서였다.
아마 명인혁이 방금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던전 공백기라는 건 생길 수밖에 없다.
회귀 전에도 분명히 공백기가 있었다.
던전 공습 직후가 그랬고, 각 재앙의 직후에 그랬다.
지구에 나타나는 던전이라는 것이 마르바스의 공격인데, 재앙을 일으킬 정도로 막대한 자원을 쏟는 건 마르바스 입장에서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큰일을 벌이기 전이나 큰일이 벌어진 직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 공백기가 길어지면 가디언스 입장에서는 별로 좋을 게 없었다.
지구의 위기를 해결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지 않으면 대중은 금방 가디언스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런 걱정을 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사건이 벌어지곤 했다.
강하진은 정말 운이 좋다고 여겼다.
그때는 그랬다.
“왠지······ 이번에 어디서 사건이 터질지 알 것 같군.”
“예?”
명인혁이 놀란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LA를 집중적으로 살펴.”
“LA말입니까? 미국의?”
“그래. 이번에는 미국이야. LA 한복판에서 일이 터지는 건 아니고 좀 떨어진 곳에서 일을 벌일 거야.”
회귀 전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일을 벌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수가 만들어질 테니까.
‘원래라면 소강상태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일이 터지겠지만, 그때랑 지금은 다르니까.’
아마 디펜더스가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일이 터지는 시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번에 그 일이 애초에 강하진의 기억과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다면, 한 가지 확신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여러모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강하진은 태블릿에 미국 지도를 띄웠다. 그리고 LA부분을 확대했다.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에 정확히 위치를 짚어낼 수 있었다.
“이쪽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LA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이로군요. 이런 곳에서 괴물이 나타나면 아주 위협적일 거 같습니다.”
“괴물이 아니야.”
“예? 괴물이 아니면······.”
“던전이지.”
“여기 던전이 열린단 말입니까?”
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좀 티 나게 확인하는 거야.”
명인혁이 눈을 번득였다.
원래 자신이 하는 일은 은밀함이 생명이다. 한데 티 나게 활동을 하라는 건, 이것이 역정보라는 뜻이었다.
“상대는 당연히 디펜더스일 테고······ 그렇다는 건 마스터께서는 던전을 만들어내는 원흉이 디펜더스라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강하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건 너무 나간 결론이었다.
“그건 아니야. 던전을 만드는 존재는 따로 있으니까.”
명인혁이 묘한 시선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마치 누가 던전을 만드는 건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건 나중에 얘기할 때가 있을 거야. 일단은 이쪽에 집중하자고.”
“네. 그럼 시키신 대로 디펜더스에 역정보가 흘러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건 교묘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정보라는 걸 상대가 조금이라도 눈치채면 아예 다른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명인혁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이런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인재였다.
그냥 믿고 맡기면 된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시작해. 상황 계속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네. 수시로 디펜더스 쪽 현황을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벌써 그쪽에 정보망을 깐 거야?”
“아직 모자랍니다. 그저 움직임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강하진은 혀를 내둘렀다. 디펜더스에 대해서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 정도나 준비했단 말인가.
겪을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그리고 명인혁을 확보한 건 이번 생에서 한 일 중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윤경민도 포함해서.
명인혁이 밖으로 나가자, 강하진은 다시 한 번 지도를 확인했다.
그때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확실히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굉장한 힘이다.
강하진은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디펜더스의 행보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