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속 2 >
처음에는 연기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꾸준히 관찰한 결과 정말로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걸 확인했다.
젝스터는 놀랍게도 제이슨의 권속이 된 순간부터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까지의 기억만 싹 잃어버렸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강하진은 젝스터를 꽁꽁 묶었던 줄과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젝스터는 간절히 커피를 원했기에 흔쾌히 커피도 대접해 주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제이슨을 기억합니까?”
강하진의 물음에 젝스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그는 저희를 상당히 자주 찾아왔으니까요.”
“저희? 당신 혼자가 아니었습니까?”
젝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팀이었습니다. 제이슨이 제법 공을 들여 영입하고 있었죠.”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사실 우린 제이슨과 함께 할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끼리 자유롭게 지내는 게 훨씬 즐거웠거든요.”
누군가의 휘하에 들어간다는 건 간섭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또한 일정한 틀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젝스터는 그게 싫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거나 대단한 지위에 오르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그건 젝스터뿐 아니라 그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거절을 하려고 제이슨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요?”
“그게 끝입니다.”
강하진이 눈을 빛냈다.
“그 이후의 기억이 사라졌군요.”
“맞습니다. 솔직히······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이슨에게 피의 세례를 받은 이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강하진은 그를 서늘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제 현실을 알려줄 차례였다.
태블릿을 꺼낸 강하진은 갇혀 있는 젝스터의 부하들을 촬영하고 있는 CCTV영상을 보여줬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젝스터는 유심히 화면을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모르겠군요.”
“당신의 부하들입니다.”
“예? 저 사람들이 제 부하라고요?”
젝스터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저들은 이제 곧 괴물로 변할 겁니다.”
“예? 괴물로 변한다고요? 사람인데요?”
강하진은 젝스터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젝스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마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설명을 들은 젝스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아. 대체 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황은 확실했다. 제이슨이 이 일의 시발점이었다.
영입 제안을 거절한 젝스터를 권속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마 조사해보진 않았지만 젝스터의 친구들 역시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강하진은 제이슨이 권속으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만일 그게 쉬웠다면 무수한 권속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테니까.
영국에서 벌인 파티 같은 걸 개최할 이유도 없었을 테고.
아마 받아들일 수 있는 숫자에 제한이 있거나, 조건이 까다롭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저 사람들을 구해줄 수는 없습니까?”
젝스터가 간절한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지만, 만일 그게 정말이라면, 자신이 저들에게 괴물의 씨앗을 심었다면 그 죄책감을 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강하진도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였다.
시스템 침략자라는 칭호를 조금만 더 빨리 얻었다면 저들을 온전히 이쪽 시스템으로 되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일단······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은 해볼 겁니다.”
“부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젝스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걸 보고 있으니 멕시코에서 군대를 포섭해 포탄 세례를 날리던 자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피의 세례라······.’
정말 무서운 능력 아닌가. 권속이 되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인격마저 원하는 대로 바꿔 버릴 수 있다니.
“일단 좀 더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시죠.”
젝스터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진이 해준 말은 자신이 했던 일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 일부가 멕시코 군대를 포섭해 괴물과 싸우는 각성자 부대에 포탄을 퍼붓는 거였으니 그 전에 했던 일은 대체 얼마나 지독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만일 정말 지독한 짓을 하면서 살아왔다면, 아무리 그게 기억나지 않아도, 그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대가를 어떤 식으로든 치루는 게 맞지 않을까?
젝스터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강하진은 그런 젝스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곳에서 나갔다.
역시 이대로 포기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들을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왠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 * *
제이슨과 윌리엄, 제니퍼가 은밀한 공간에 모였다.
그곳에는 같은 디펜더스의 멤버인 스팬서가 없었다.
이것은 디펜더스가 아닌, 그 이전에 결성한 비밀모임이었다.
그러니 스팬서가 있으면 안 된다. 스팬서는 여기 들어올 자격이 없었으니까.
“자, 다시 얘기해 보지. 권속과의 링크가 끊어졌다고?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설명할 수 있나?”
윌리엄의 물음에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링크가 끊어진 권속은 젝스터야. 다들 젝스터는 알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제이슨이 제일 잘 써먹는 권속이었으니까.
제니퍼나 윌리엄도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을 젝스터에게 자주 부탁하곤 했다.
“뼈아픈 손실이군. 굉장히 쓸모 있는 권속이었는데.”
“일단 링크 쪽에 집중하죠. 그래서 링크가 어떻게 끊어졌는데요?”
“완벽한 소멸로 인해서 끊어진 건가?”
제이슨이 고개를 저었다.
권속의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범한 죽음이다. 이 경우 권속의 주인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줄 수가 있었다.
물론 주인은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레벨을 바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완벽한 소멸이 있었다.
그건 다시 권속을 되살리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권속의 영육을 유지하는 근원이 사라졌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즉, 근원만 무사하면 어떤 형식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권속을 되살리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건 제이슨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피의 군주인 제이슨이 가진 권능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완전한 소멸이 이뤄지면 링크가 끊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경우 주인인 제이슨은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윌리엄은 그 부분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것이고.
“심각하군. 그럼 정말로 그냥 링크가 끊어진 건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쪽 시스템이 개입하면 가능하지.”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건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는 뜻이야.”
“우리 말고 다른 시스템 침략자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그것 역시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가 없군. 일단 우리의 존재가 그 증거이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하는 게 좋을 거야. 놓치는 게 있어선 안 돼.”
“그 부분은 일단 내가 알아보지.”
“저도 알아보죠.”
제이슨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새로운 권속 적합자를 찾아야 돼. 알다시피······ 권속이 꽉 채워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제법 크니까.”
그건 피의 군주인 제이슨의 특성이었다.
윌리엄과 제니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다 같이 알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이참에 보험을 좀 들어놓는 게 어때요?”
“보험?”
“한 번 일어났으니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벌어지기가 훨씬 쉬워지지 않겠어요? 그러니 미리미리 준비해 둬야죠.”
그 말은 권속 적합자를 미리 확보해 두자는 뜻이었다.
언제 링크가 끊어지더라도 바로바로 보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후우. 레벨도 잔뜩 올려둬야겠어.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대가로 지불할 레벨이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 능력치도 확보해 둬야 하고.”
“동의해요.”
“그럼 당분간은 사냥에 집중하는 걸로 하지. 물론 맡은 일에도 소홀하면 안 되고.”
“당분간 바빠지겠네요.”
이들이 권속을 들일 때도 대가로 레벨을 지불해야 한다.
들인 권속에게 힘을 내려줄 때도 당연히 레벨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고.
레벨이라는 것은 격이다. 자신이 쌓은 격의 일부를 이용해 권속을 만들고, 권속을 다루는 것이 바로 이들의 힘이었다.
그러니 높은 레벨을 확보하는 건 필수였다.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겠네요.”
“그리고······ 가디언스가 활개 치는 걸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고.”
제이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에 젝스터가 맡았던 임무가 바로 가디언스의 중심인 강하진을 없애는 일이었다.
한데 그걸 실패한 것도 모자라 링크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강하진이라······ 그놈 주변부터 일단 조사해 봐야겠어.’
제이슨과 윌리엄, 제니퍼가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마 이번 일에 강하진이 어떤 식으로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 *
강하진은 젝스터의 권속이었다가 풀려난 20명의 각성자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확인하는 데 무려 3일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그동안 사냥도 안 하고 두 번째 재앙의 마무리까지 가디언스에게 맡긴 채 집중한 것이다.
일단 멕시코를 정리한 뒤로 상황이 어려운 나라는 거의 없었다.
몇몇 나라가 위험하긴 했는데, 그곳은 던전 브레이커가 도움을 주었다.
한국을 완벽하게 방어하는 데 성공한 던전 브레이커는 가디언스를 도와 어려운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강하진이 더 이상 두 번째 재앙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얻은 시간을 오직 젝스터의 권속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데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강하진은 힌트 하나를 얻어냈다.
바로 그들이 품고 있는 혼돈의 씨앗이었다.
혼돈의 씨앗이 발아하면 그들을 부정함에 물들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혼돈의 씨앗이 발아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그걸 제거하거나.
그래서 강하진이 시도한 것이 바로 혼돈의 씨앗을 감지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강하진에게는 이번에 새로 개방한 속성이 있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혼돈’ 속성을 개방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영국 박물관에서 과거의 잔재를 편입하러 갈 때, 달의 펜던트라는 아이템의 능력을 흡수했고, 거기에 혼돈 속성을 개방하는 옵션도 함께 얻었다.
비록 그저 개방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단 속성에 대한 감지력이 월등히 높아지니까 말이다.
속성을 개방한 것과 속성력을 얻은 것은 좀 차이가 있었다. 속성력을 얻으려면 그에 관한 힘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리고 강하진은 이번이 바로 그걸 해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강하진은 20명의 각성자 중에서 사무엘에게 집중했다.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그가 가진 혼돈의 씨앗이 가장 확실하게 느껴졌으니까.
아마 가장 큰 혼돈의 씨앗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무엘은 매일 찾아와 자신을 앞에 두고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는 강하진 때문에 사실 굉장히 불편하고 거북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있기에 그걸 거부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또한 어차피 이제 곧 괴물이 될 텐데, 이런 식으로라도 뭔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신 괴물이 되기 전에 죽여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강하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무엘이 괴물로 변할 일은 없을 테니까.
사무엘은 가만히 앉아 강하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강하진의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갔다는 걸 그냥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강하진이 손을 뻗었다.
사무엘은 흠칫 놀랐지만 가만히 있었다.
강하진의 손이 사무엘의 가슴에 닿았다.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강하진의 손이 서서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사무엘은 그걸 참아냈다. 이제야 죽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무엘은 강하진의 손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좀 신기했다.
어느새 강하진이 그의 심장을 뽑아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한데 강하진이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은 심장이 아니었다.
보라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기운의 덩어리였다.
“어?”
사무엘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확인했다. 멀쩡했다. 심장을 뽑힌 사람 같지 않게 상처 하나 없었다.
사무엘이 놀란 눈으로 강하진의 얼굴과 그가 손에 든 보라색 덩어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내 보라색 기운 덩어리가 강하진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강하진이 사무엘을 보며 씨익 웃었다.
사무엘은 그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해방감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