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 1 >
“예? 프랑스요? 이렇게 난데없이요?”
윤경민이 황당한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황당할 법도 했다. 강하진이 다짜고짜 프랑스에 갈 거니까 가능한 길드원을 선별해 달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준비도 모두 윤경민이 해야 한다.
물론 이제 부하직원들이 잔뜩 있으니 그들에게 지시만 하면 되지만, 어쨌든 윤경민이 직접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언제요? 설마 오늘 당장, 뭐 그런 건 아니죠?”
“일주일 안에 프랑스에 도착해야 합니다.”
윤경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불만을 쏟아낼 법도 하지만, 윤경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건 빨리 서둘러야 할 일이다. 그는 부리나케 나가 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디언스의 프랑스행을 준비했다.
강하진은 다시 한 번 윤경민을 영입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 윤경민이 강하진을 찾아왔다.
“자, 이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윤경민의 말에 강하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준비 말입니까?”
“아공간 만들 준비요.”
“예?”
“마스터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데, 일은 잔뜩 벌였으니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시간 없으니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 자, 제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얼른얼른 해주세요.”
아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근본이 되는 핵심 재료를 강하진이 수급해 줘야만 한다.
그 뒤의 공정은 사실 어려울 게 없었기에 공장 돌리듯 진행하면 되고 말이다.
물론 장비에 아공간을 장착하는 건 유동훈이 직접 나서서 해야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디언스의 아공간은 명품을 지향하니까.
강하진은 강렬한 윤경민의 눈빛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자, 뭐 하십니까. 이렇게 마석도 잔뜩 준비했습니다.”
윤경민이 미리 준비한 아공간에서 마석을 좌르륵 쏟아냈다.
테이블 위에 마석이 잔뜩 쌓였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이걸 전부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정확히 몇 개가 필요한 겁니까?”
윤경민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거 전부 다 해야 하는 건데요? 요즘 아공간 쓸 일이 너무 많아서 이걸로도 모자랍니다. 얼른얼른 해주세요. 비행기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강하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맺혔다.
하지만 결국 자리에 앉아 마석을 하나씩 들고 손질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윤경민이 어찌나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걸 회피할 수가 없었다.
잠도 못 자고 밤을 지새운 끝에 결국 그 마석을 전부 아공간 밑재료로 만들 수 있었다.
강하진은 지쳐 늘어져 버렸다.
그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머리도 많이 써야 하고 마력도 굉장히 세밀하게 다뤄야 하기에 뚝딱뚝딱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력과 정신력 소모가 상당했기에 소파에 축 늘어져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윤경민의 스킬이 강하진에게 쏟아졌다.
갑자기 피로가 싹 날아가고 온몸이 쌩쌩해지는데, 갑자기 두려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위에 있던 작업이 끝난 마석들을 싹 쓸어간 윤경민이 새 마석을 좌르륵 쏟아냈다.
“아직 비행기 시간까지 많이 남았습니다. 얼른얼른 해주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강하진은 북극성 던전 안에서 가디언스의 길드원들이 왜 윤경민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는지 이제야 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겪으면 무서워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윤경민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데, 고작 하룻밤 샜다고 앓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으니까.
자신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윤경민의 평소 생활 태도에 새삼 또 다른 두려움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대단한 사람이야.’
어느새 강하진의 손은 다시 마석을 쥐고 있었다.
* * *
프랑스에 함께 가기로 한 가디언스의 각성자는 총 20명이었다.
물론 강하진과 황수영은 제외한 수였다.
공항에 도착한 강하진 일행에게 백인 한 명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프랑스 각성자 협회에서 나온 엔조라고 합니다.”
“강하진입니다. 가디언스의 마스터입니다.”
“안 그래도 윤경민 씨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 제 아버지께서 디펜더스의 파티에 참석하셨습니다. 윤경민 씨를 소개해준 분도 제 아버지고요.”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황수영이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윤경민이 예전 파티 참석자들을 잘 관리해서 같은 편을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만 대충 전해 들었는데, 이렇게 그 결과물을 보고 나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박물관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영국에서도 박물관을 한참동안 관람하셨다고요?”
그 말에 황수영의 얼굴이 또 창백해졌다.
설마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박물관 얘기를 들을 줄이야.
“우리 프랑스에는 루브르가 있지요.”
“기회가 되면 꼭 구경하고 싶군요.”
“제가 힘을 한 번 써보겠습니다.”
엔조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확실히 윤경민이 잘 구워삶아 놓은 모양이었다.
황수영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다행히 박물관 얘기는 그냥 말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화제였는지, 금세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사냥 때문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사실 저희 프랑스는 던전 관리가 제법 잘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끼어들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윤경민의 부탁이니 강하진이 굳이 원한다면 자리야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굳이 프랑스까지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국에도 충분한 수의 던전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그럼 어쩌시려고······.”
강하진의 대답에 놀란 건 엔조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황수영도 엔조와 똑같은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사냥하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전 분명히 그렇게 듣고 따라왔는데?”
“사냥 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닙니다.”
“그럼 일단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엔조의 안내로 호텔에 도착한 강하진 일행은 일단 여장을 풀고 잠시 쉬었다.
배정된 방에 들어가 보니 상당히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황수영은 비행기를 제법 오래 탔음에도 쉬지 않고 강하진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우리 사냥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강하진이 씨익 웃었다.
“박물관 때문에 온 건데요?”
황수영이 배신당했다는 듯한 표정과 눈빛으로 경악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서, 설마 같이 가자고 하실 건 아니죠?”
“같이 갈 건데요?”
“왜, 왜요? 거기 저 같은 게 가봐야 도움도 안 될 텐데. 아시잖아요, 저 시끄러운 거. 박물관에서 떠들다가 쫓겨날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안 시끄럽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예?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런 거죠.”
강하진이 손가락을 휘휘 젓자, 황수영과 강하진의 주변을 마력이 부드럽게 감쌌다.
“이제 아무리 떠들어도 밖으로 소리가 안 나갈 겁니다.”
황수영이 입을 쩍 벌렸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솔직히 이럴 때마다 같은 각성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이러려고 절 여기까지 데려오신 건가요? 저 놀리려고요?”
“그럴 리가요. 혹시 도청 당할지 모르니까 준비한 겁니다.”
“도, 도청이요? 그렇게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는데요?”
“호의는 호의고 도청은 도청이죠. 엔조가 끼어든 일이 아닐 수도 있고.”
“도청 되고 있는 건 확실하고요?”
“그냥 조심하는 겁니다.”
황수영은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도청을 할 수 있다면 영상도 몰래 촬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입모양으로 말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괜찮습니다. 못 읽을 테니까.”
주변을 감싼 마력이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아마 영상 장비를 통해 촬영해도 제대로 된 화면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신다는 건······ 알려줄 말이 있어서겠죠?”
“조바심 내는 거 같아서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억울해서 그런 거지.”
“조만간 파리에 뭔가 사건이 하나 벌어질 겁니다.”
“예? 사건이요?”
강하진이 말하는 사건이라는 게 뭐겠는가. 다 던전에 관계된 거지. 그제야 황수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제 그런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걸 어떻게 이용할지만 알면 된다.
황수영은 이미 강하진과 얽힌 일은 그런 식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그게 편했으니까.
“던전이 생기거나 터지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걸 처리하는 일을 도울 겁니다.”
사실 회귀 전보다 무슨 일이든 벌어지는 시점이 빨라져서 시기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프랑스 사태는 비교적 시기 계산이 편한 편이었다.
북극성 던전과 나온 시기가 비슷했으니까.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건데요?”
“던전 하나가 나올 겁니다.”
“던전이요? 그런 거라면 굳이 우리가 올 필요도 없을 거 같은데······.”
“그런데 그 던전이 예상보다 좀 빨리 터질 겁니다.”
“예? 빨리 터진다고요?”
황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던전을 빨리 닫으면 될 거 아닌가.
“좀 많이 빨리 터집니다. 그러니까······ 대충 세 시간 정도?”
그 말에 황수영이 깜짝 놀랐다.
“예? 그럼 진짜 큰일 나는 거잖아요. 그거 미리 막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황수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걸 막으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던 황수영은 고개를 번쩍 들어 강하진을 바라봤다.
강하진이 그런 황수영을 보며 물었다.
“좋은 방법, 생각났어요?”
“아뇨. 생각해보니 전 그런 걸 고민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네요. 그런 건 역시 강하진 씨가 해야죠.”
황수영의 얼굴은 너무나 개운해 보였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강하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상황 봐서 부딪혀 보죠.”
이번에 던전이 나타나는 위치는 파리에 있는 뤽상부르 공원 한가운데였다.
그러니 공원에 각성자들이 잔뜩 모이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대응이 가능했다.
문제는 각성자들을 거기에 모을 방법이었다.
그리고 던전이 열릴 정확한 시기를 가늠하는 것도 중요했다.
‘던전이 열린 뒤에는 늦어. 그 전에 모아야 돼.’
강하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황수영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세요. 던전 어디서 나타날지 대충 알고 있죠?”
강하진이 그건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던전이 열리는 자리에 서 있으면 레벨 하나 올릴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들은 강하진의 뇌리에 뭔가가 번득 스쳐갔다.
* * *
엔조는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역시 윤경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게 답이었어!’
오늘 갑자기 강하진이 만남을 요청해서 호텔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강하진은 엔조에게 아주 놀라운 정보 하나를 넘겼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정도로 대단한 정보였다. 물론 아직은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대단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뉴타입 던전이 생성되는 자리에 서 있으면 레벨이 하나 올라간다니!’
그걸 직접 몸으로 확인한 증인도 함께 있었다. 바로 황수영이었다.
그녀가 왜 강하진을 따라 프랑스까지 왔는지는 엔조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최근 나타난 뉴타입 던전 때문이었다.
그 던전이 생기는 자리에 있다가 우연히 던전이 나타나는 바람에 바로 던전을 닫았고, 그 때문에 시끄러워져서 도망치듯 여기에 온 것이다.
황수영은 그때 던전이 생기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던전이 생기는 동시에 안에 들어갔고, 레벨도 하나 올랐다고 했다.
지금 엔조는 각성자 협회에 가는 중이었다.
협회에 알리려는 게 아니라, 협회장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협회장이 바로 엔조의 아버지였으니까.
저 멀리 각성자 협회 빌딩이 보였다. 엔조는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