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벌어진 일 2 >
최대길은 멍하니 손에 든 감정서를 몇 번이고 읽었다.
암시장을 오랫동안 운영해 왔고, 그동안 무수한 아이템을 봐 왔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칭호를 부여하는 아이템이라니!
게다가 그 칭호라는 것이 최대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무려 레벨을 1로 만들어주는 칭호였으니까.
즉, 일반인을 각성자로 만들어주는 칭호라는 뜻이다.
최대길이 오매불망 찾아다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자신을 각성자로 만들어줄 그 물건 말이다.
강하진이 갖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래서 그림자를 보낸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막상 직접 그걸 눈으로 보고 나니 탐욕이 불처럼 일어났다.
이제 이 탐욕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물건을 얻는 것 외에는. 아니, 물건을 얻을 필요도 없다. 자신을 위해서 강하진이 딱 한 번만 써주면 된다.
최대길은 고민에 빠졌다. 강하진이 던지고 간 제안 때문이었다.
강하진은 최대길에게 칭호를 써주는 대신, 이번 일본 던전 공습을 막는 일에 암시장의 힘을 써달라고 했다.
그냥 생색만 내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강하진은 아주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마치 암시장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다 파악했다는 듯이.
물론 모든 걸 파악한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암시장 전력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쏟아야만 한다.
다른 때라면 일고의 고민도 없이 걷어 차버렸을 제안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최대길은 몇 시간이고 고민과 계산을 반복했다.
한 번 고민하고 계산할 때마다 감정서를 한 번씩 읽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최대길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처음 한 걸음이 반드시 필요하지.”
어차피 처음부터 답은 나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대길은 안전하게 자신의 던전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물건을 떠올렸다.
자신의 청춘을 되찾아줄 보물 말이다.
신체 나이를 원하는 때로 고정하고 모든 질병에서 자유로워지며, 성장 잠재력까지 최상으로 올려주는 보물을 가지고도 고작 한 걸음을 못 내디뎌서 그림의 떡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레벨을 30까지 올려야 하는 조건이 있지만, 30레벨 정도야 산책하면서도 올릴 수 있다.
자신이 보유한 그 많은 장비와 자신을 서포트해줄 무수한 부하들이 있으니까.
어쩌면 그저 단순히 암시장의 주인이 아니라 지하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 각성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온 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최대길은 감정서를 마지막으로 찬찬히 읽은 후, 그것을 태워버렸다.
결정을 내렸다.
* * *
일본 정부가 내건 막대한 보상을 탐내는 자들이 속속 일본 진출을 결정했다.
그리고 일단 결정한 각성자들을 빠르게 일본으로 실어 나를 비행편이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이런 일은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세계 각국에서 각성자들이 일본 진출을 결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비행편을 준비해 열심히 그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다만 한국은 유독 분위기가 심하게 달아올랐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도록 조장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로비로 각성자 관리청까지 움직였으니 분위기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뜨겁게 달아오른 것에 비하면 또 막상 일본으로 건너가는 각성자의 수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은 수였지만, 분위기를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제영 그룹의 후계자인 조원영은 그 분위기를 민감하게 읽어냈다.
조원영은 잠깐 한국으로 귀국했었다. 그래서 일본 사태에 곧장 휘말리지는 않았다.
한창 일본에서 기반을 다지고 이제야 좀 시작해 보려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서 지금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데 그 짜증이 채 풀리기도 전에 이런 일이 또 벌어지니 이젠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조원영 앞에는 그룹의 각성자 관리실장과 정보실장이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전에 한 번 큰 실수를 통해 찍힌 이후 조원영만 만나면 기를 펴지 못했다.
“두 분의 무능함을 이렇게 또 한 번 증명하고야 마는군요.”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런 말 들으러 온 거 아닙니다. 대책을 들으러 온 거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보실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단 계속 소문은 흘리고 있습니다. 일본에 나타난 던전에 대한 정보를 조작해서 여기저기 뿌려 뒀습니다.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확신합니까?”
“예?”
“고작 던전 정보 조작해서 뿌린 걸로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입니다.”
“대대적인 광고도 준비 중입니다.”
조원영이 코웃음을 쳤다.
“하! 광고요? 지금 우리 제영 그룹이 대놓고 친일하겠다고 광고하겠다는 말입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공격대를 조성해서 그 공격대의 임시 대원을 모집하는 식으로 준비했습니다.”
“우리 그룹이랑은 관계가 없는 공격대겠죠?”
“예. 어렵게 섭외했습니다. 연결 고리는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니 절대 밖으로 새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여차하면 끊어버릴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그건 잘했군요.”
“공격대의 규모를 크게 키워서 안전을 광고할 계획입니다. 일단 안전이 보장되었다고 하면 더 많이 지원할 것이 분명합니다.”
“얻어먹을 게 많으니 안전만 보장된다면 많이 움직이겠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일처리로군요. 앞으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정보실장이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기분 좋게 지켜보던 조원영이 다른 질문을 했다.
“한데 이번 일, 아무래도 자연스럽지가 않은 것 같은데, 두 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직적인 방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놈들인지 알아봤습니까?”
“일단 던전 브레이커는 확실합니다. 한데 벌이는 일 수준이 고작 던전 브레이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조원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던전 브레이커? 황수영 말이죠? 그건 정말 안 끼는 데가 없군요. 일단 거긴 내버려 둡시다. 어차피 해봐야 중소 길드 연합에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일 테니까.”
던전 브레이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은 존재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는 게 답이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그럼 그거 말고는 알아낸 게 더 없습니까?”
“A-마켓의 움직임도 좀 심상치가 않습니다.”
조원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긴 일본에도 지부가 있는데도 그런답니까?”
“그래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더 파보고 있습니다.”
“계속 파지만 말고 결과를 가져오세요. 이제 시간 얼마 없는 거 아시죠?”
“예.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예전에 우리가 공들이던 암흑가 놈들은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평소와 똑같습니다.”
“쓰레기들이 쓰레기 짓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놈들도 일본으로 보낼 방법을 강구해 보세요.”
“예.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조원영은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불안할 때가 많았다.
예전 지창기가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허무하게 무산되었을 때 시작된 불안감이었다.
그것이 암시장을 끌어들여 A-마켓을 견제하는 일이 크게 실패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오늘은 왠지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불안했다.
조원영은 창밖을 내다봤다.
쫙 펼쳐진 도시의 전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젠 그 생각과 기대가 신기루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막아낸다. 멋지게 막아내고 내가 일본 먹어치운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여길 차지할 것이다.
조원영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 * *
가디언스 본부, 강하진의 집무실과 이어진 회의실.
오랜만에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강하진과 명인혁, 그리고 윤경민이었다.
조만간 황수영과 정아연도 오기로 했다.
어쨌든 그들은 가디언스와 한배를 탄 입장이었으니까.
“우리 회의는 항상 이렇게 시간에 쫓기면서 시작하네요.”
윤경민이 푸념하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도 황수영과 정아연을 기다리면서 세 사람이 회의를 진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회의라는 게 원래 시간 끌어봐야 좋을 거 없잖습니까. 그냥 할 말만 딱딱 하고 끝내야죠.”
맞는 말이기에 윤경민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회의 시작하죠.”
강하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경민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A-마켓과는 별도로 유통망을 구축했습니다. 한국 쪽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은데 외국 쪽은 아직 검증이 더 필요합니다.”
드디어 A-마켓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다.
물론 당장 A-마켓과 갈라설 생각은 없었다. 정아연이 변절해서 뒤통수를 치지 않는 이상, 전략적 제휴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다.
A-마켓이라는 거대한 힘은 이용하기에 따라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러려면 A-마켓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일단 내부의 적을 다 쳐내야 한다.
“외국 쪽은 정아연 씨가 도와줬습니까?”
“네.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습니다.”
정아연이 도와줬다는 건 A-마켓이 가디언스의 유통망 개설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겠지만, 가디언스가 A-마켓과는 유통하는 물건이 거의 겹치지 않다는 점을 정아연이 적극적으로 어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강하진은 이제 A-마켓과 굉장히 밀접하게 엮여 있었다.
포션의 로열티도 그렇고 강화석의 재료인 레모노의 송곳니도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유동훈 씨가 주도해서 제작 중인 특별한 장비들도 거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아마 판매 시작하면 제법 시끌시끌할 겁니다.”
윤경민이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어딘가 악동 같은 미소였다.
그렇게 미소를 짓던 윤경민이 갑자기 정색하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어찌나 표정을 싹 바꾸는지 순간 섬뜩할 정도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딱 하나 아직 안 되는 게 있습니다.”
강하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윤경민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분명히 마스터께서 예전에 약속하셨지요?”
강하진이 대답하지 못하자, 윤경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잘못 기억하는 건가요? 분명히 아공간을 제작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주시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 전에 다양한 시제품도 준비해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윤경민이 양손을 쫙 펼쳐 보였다.
“이렇게 제 손에는 아무것도 없네요.”
윤경민이 보내는 눈빛의 압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일본 일이 마무리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 당장은 시간을 빼기가······.”
“그때는 꼭 부탁드립니다. 이제 저 좋자고 하는 일이겠습니까? 다 우리 길드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마스터께서 모범을 보이셔야 다들 믿고 따라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윤경민은 같은 말을 다른 단어로 바꿔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고, 강하진은 몇 번이나 알겠다고 대답을 해야만 했다.
다음에는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다.
간신히 윤경민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강하진은 얼른 명인혁을 바라봤다.
명인혁은 강하진과 윤경민의 모습에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보고를 시작하려고 했다.
한데 그때 황수영과 정아연이 도착했다.
어차피 명인혁이 할 보고는 일본에 관한 거였기에 두 사람이 합류한 다음 보고하는 게 더 편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정아연과 황수영이 자리에 앉자, 명인혁이 보고를 시작했다.
“조원영이 입국했습니다.”
강하진이 눈을 빛냈다.
“제영 그룹이 일본에 각성자를 보내려고 작정하고 움직이는 중입니다.”
“그걸 주도하는 사람이 조원영이고?”
“네. 요즘 광고로 시끄러운 태양 공격대가 바로 제영 그룹이 만든 곳입니다.”
그 말을 들은 네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그게 제영 그룹이 만든 공격대라고요?”
“네. 맞습니다.”
사실 태양 공격대는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공격대였다.
공격대라는 개념 자체가 재앙 이후에 조금씩 생긴 거라서 역사가 오래될 수가 없었다.
한데 난데없이 규모를 키우더니 대대적인 광고까지 동원해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있으니 다들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많은 곳에서 그들의 뒤를 캐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캐면 캘수록 나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A-마켓의 뛰어난 정보력을 이용하는 건 물론이고 사설 정보조직까지 이용해 그들의 뒤를 캤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한데 명인혁이 그걸 밝혀낸 것이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건가요?”
명인혁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동생이 알아낸 겁니다.”
명인수가 알아냈다는 말을 바로 이해한 사람은 강하진과 윤경민뿐이었다.
정아연과 황수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명인혁을 바라봤다.
“동생이라면 인수 말하는 거지?”
황수영의 물음에 명인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도 인수랑 몇 번 던전에 들어가긴 했는데······ 설마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였다.
“공격대에 각성자들이 합류하는 걸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저 방해하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요즘 제영 그룹의 견제가 심해져서 쉽지 않습니다.”
때 아닌 정보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제영 그룹은 방해 세력을 알아내려고 하고, 명인혁은 그들의 추적을 뿌리치면서 방해까지 해야 하니 일이 쉽지 않았다.
한동안 그에 관한 얘기가 오갔다.
그러다가 문득 황수영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보태준다면 일본 사태,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지금 세계 곳곳에서 각성자들이 나서고 있는데.”
중요한 건 각성자의 수였다. 뉴타입 던전이 무려 150개나 되니 그걸 동시에 공략할 수 있을 정도의 각성자만 있으면 막아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혹시나 터지더라도 각성자가 많으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강하진은 그 물음에 단호히 대답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다들 강하진이 왜 저렇게 확신하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진 강하진의 말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끝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