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용인 >
“새 포션의 인기가 정말 대단해요. 조만간 정산금이 갈 텐데······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강하진이 빙긋 웃었다.
“확실히 A-마켓이 세계적인 기업이라서 그런지 판매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요.”
“그럼요. 우리 A-마켓의 큰 장점이죠. 그래서 말인데······.”
강하진은 정아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굉장히 오랫동안 연구실에서 안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혹시 새 포션을 개발하신 건가요?”
“앞으로 포션은 더 만들기 어려울 겁니다.”
“예? 왜요?”
“아이디어가 없으니까요.”
정아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안 될까요? 예를 들어 버프 포션이라거나. 우리도 요즘 그걸 개발 중인데 잘 안 된다고 들었어요. 뭔가 힌트가 될 만한 시료 또 없을까요?”
정아연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아마 웬만한 남자는 저런 눈빛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어우러져 정말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으니까.
하지만 강하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어도 모르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앞의 두 포션은 그에 대한 정보를 회귀 전에 충분히 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포션은 아니다. 특히 버프 포션은 앞으로도 개발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명인수가 목숨을 걸고 정보를 뽑아내지 않는 한.
정아연은 씨알도 안 먹힐 걸 깨닫고는 얼른 말과 분위기를 바꿨다.
“그럼 이번에 연구하신 건 뭔가요? 저 정말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이번에도 우리 A-마켓을 이용해 주신다면 큰 성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아직 연구가 다 끝난 게 아니라서 딱히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나중에 끝나고 다시 얘기하죠.”
“아······.”
정아연의 눈에 떠오른 안타까움이 왠지 가슴에 푹 박혔다. 하지만 강하진은 고작 그 정도로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황수영이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할 사람도 아니었고.
“이제 볼일 다 봤으면 좀 비켜 봐요. 나도 얘기 좀 하게.”
황수영이 엉덩이를 슬쩍 들이밀어 정아연을 살짝 옆으로 밀어내 강하진과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는 자리를 확보했다.
“이번에 주신 정보, 정말 고마웠어요. 진짜 유용하게 써먹었으니까 나중에 저 부려먹으실 일 있으면 꼭 부르세요. 아셨죠?”
황수영의 말에 강하진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던전 브레이커는 이제 슬슬 거대 길드 반열에 오르기 위한 숨고르기 중이었다.
아마 이번 뉴타입 던전 공략 같은 일을 몇 번 더 겪고 나면 한국에서 손꼽히는 거대 길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의 조건 없는 도움을 예약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황수영이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 알기에 더더욱 기대가 됐다.
“그리고 혹시 사냥하고 싶으면 말해요. 외국 쪽에 던전을 섭외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외국에 던전을 섭외한다고요?”
“네. 요즘 다들 미친 듯이 사냥을 하는 바람에 던전이 모자라는 지경이 되었네요. 다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건지 갑자기 난리가 났어요.”
강하진은 그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회귀 전 기억 중 한 조각이 떠올랐다.
“외국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예? 갑자기 왜요? 한국에는 이제 던전 남은 게 별로 없다니까요? 저도 사냥을 해야 레벨을 올리죠.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손가락을 빨라는 얘기가 아니라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준비요?”
“갑자기 쏟아지는 던전을 닫을 준비요.”
그냥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말이었기에 황수영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건 정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강하진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꼭 사고가 터졌다. 그리고 그걸 미리 알고 대비하면 반드시 큰 이득이 따라왔고.
“정말 던전이 갑자기 쏟아질까요?”
정아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지난 번 재앙 때는 A-마켓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각성자 근처에 던전들이 우수수 생겨났기 때문에 각성자와 관계가 깊을수록 피해를 크게 입을 가능성이 높았고, A-마켓은 그 점에 있어서는 가장 위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A-마켓은 대부분 공개 던전 내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피해가 줄었지, 아니었다면 정말 쫄딱 망했을지도 모른다.
A-마켓 본사에 나타난 던전들 때문에 마켓의 수뇌부가 대폭 물갈이 되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다들 선방했다고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정아연은 심각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강하진도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던전이 잘 나타나지 않는 건 세계적 현상이 아니라 국소적 현상입니다. 아시죠?”
“맞아요. 그래서 외국 던전을 섭외하는 거고요.”
황수영이 살짝 끼어들어서 답하자, 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마 이 현상이 각 나라를 돌면서 일어날 겁니다. 시작이 한국일 뿐이죠.”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봤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심히 경청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물론 진짜 웃지는 않았다.
“멀리 뛰려고 웅크린 겁니다. 에너지를 응축해서 단숨에 터트리려는 거죠.”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던전 쪽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요.”
정아연의 푸념에 강하진이 대답했다.
“일종의 공격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공격하면 안 먹히는 게 당연하니 변초를 섞는 겁니다.”
“공격······ 이라고요?”
던전을 공격이라고 표현한 것이 약간 생소했던 모양이다. 정아연뿐 아니라 황수영까지도.
황수영은 이레귤러라서 뭔가 정보를 더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까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 던전이 왜 생기겠습니까? 그냥 존재만 하는 것도 아니고 터지기까지 하는데. 던전 안의 괴물들은 각성자에게 유독 공격적이죠. 그 다음은 그냥 인간이고.”
“그럼 강하진 씨는······ 누군가 지구를 공격할 목적으로 던전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냥 생각이 아니라 확신합니다.”
정아연은 멍하니 강하진을 바라봤다.
“그런 생각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움직이셔서······ 그런 결과를 내신 거군요. 근거가 확실해서 예측을 잘 하시는 거였어요. 그렇죠?”
사실은 미래에서 돌아왔기에 다 알고 하는 일이었지만, 알아서 저렇게 생각해주니 마음이 좀 편했다.
“정말······ 정말 대단하세요!”
정아연이 눈을 반짝이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마치 아이돌을 바라보는 소녀팬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자 황수영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럼 외국 던전 섭외는 취소할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하진 씨가 하는 말인데 믿어야죠.”
황수영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린 뭘 하면 돼요? 던전은 다 포기하고 훈련이라도 시켜야 하나?”
“좋은 생각입니다.”
최소한 던전 브레이커 정도만 그렇게 해줘도 던전 공습이 벌어지면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럼 전 외국 던전을 섭외하려는 길드에 협조를 요청할게요. 아무래도 다들 힘을 모으면 더 헤쳐 나가기 편할 테니까요.”
“우리 인혁이랑 같이 하시면 되겠네요. 요즘 실력이 크게 늘어서 제법 도움이 될 겁니다.”
“네. 명인혁 씨가 함께 해주시면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다름없죠. 저야말로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좀 더 이어졌다.
이내 두 사람 다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야 만족하고 돌아가지만, 아마 조만간 분명히 또 찾아올 것이다.
황수영이 먼저 나가고, 정아연이 그 뒤를 따라가다가 얼른 강하진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오늘 뭐 만드셨는지 나중에 따로 만나서 꼭 알려줘요.”
귓속말을 한 정아연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용케 그걸 본 황수영이 정아연에게 바짝 붙었다.
“무슨 말 한 거예요?”
“글쎄요.”
정아연이 거의 뛰다시피 도망쳤다. 하지만 황수영은 한국에서 첫 손에 꼽히는 각성자,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무슨 말 했냐니까요?”
“개인적인 얘기라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러네요.”
“두 분이 개인적인 얘기까지 하는 사이였어요?”
“알아서 생각하세요.”
두 사람이 그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면서 가디언스 본부를 나섰다.
강하진은 창가에 서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이번에 연구실에서 분명한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걸 공개할 수는 없었다.
강하진은 아공간에서 그림자, 최영진의 분신을 꺼냈다.
원래는 시체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분신은 아주 멀쩡했다.
그리고 생김새도 달라졌다.
더 이상 최영진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에서 좀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피부 곳곳에 비늘이 돋아 있었고, 머리에는 뿔까지 있었으니까.
이것이 충룡의 알을 이용한 연구의 결과였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가장 좋은 성과가 바로 이 분신이었다.
[그림자 용인]
[체력 : 80000, 마력 : 200000]
[그림자숨기(A), 그림자이동(A), 지켜보기(A), 음성전달(A), 영상전달(A), 에너지전환(A)]
[강하진에게 귀속되어 있다.]
우연히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걸 만들기 위해 들어간 충룡의 알이 무려 10개였다.
아마 다시 만들라고 해도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중간에 몇 번이나 우연과 행운이 개입되었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충룡의 알과 그림자 분신을 더 구하고 싶을 정도로.
일단 최영진의 분신이 갖고 있던 스킬 중 중요한 몇 개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보아하니 숙련도까지 그대로 이어받은 듯했다.
또한 용이 갖고 있는 스킬 중 상당히 유용한 에너지전환을 가졌다.
더구나 전혀 새로운 스킬이 두 개나 포함되었다.
스킬만 보고 판단하면 이놈은 명인혁에게 보내 정보 수집에 이용하면 딱이다.
그리고 이런 특수한 존재는 되도록 알려지지 않을수록 유리하다.
이 그림자 용인의 존재는 강하진과 명인혁 둘만 알고 있는 걸로 정했다.
나중에 혹시 이와 비슷한 존재를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그나저나······ 설마 충룡의 알을 몰래 빼돌린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 사람들을 시켜 회수한 충룡의 알은 모두 다섯 개였다.
하지만 그들 중 욕심이 생긴 누군가가 하나쯤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겼다면, 그 알은 어딘가의 연구소로 팔려갔을 것이다.
‘사고나 안 생겼으면 좋겠는데······.’
어둠 속에 있으면 언제 부화할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충룡의 알이다.
이걸 제대로 보관하려면 아공간에 넣거나, 아니면 사방이 빛으로 둘러싸인 장소에서 허공에 띄워 놔야 한다.
강하진은 일단 상념을 접었다. 그건 자신이 어떻게 손쓸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린 문제였으니까.
* * *
최영진의 침입은 예상대로 최대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최대길은 자신에게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부터 더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내 여기까지 침입한 최영진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에게 보안 책임자 자리를 주기로 약속했다.
최영진도 최대길을 이용할 일이 있으니 그러기로 했다.
물론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지만.
최대길은 더 꽁꽁 숨었고, 더 많은 가짜를 만들어 세상에 풀어놨다.
그걸 위해 막대한 자금이 소모되었지만, 최대길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영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강하진을 터는 문제를 해결해야 자신도 더 안전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최영진은 최대길이 지원해준 30명의 각성자와 함께 강하진의 집으로 향했다.
그 30명의 각성자는 암시장에서도 위험하기로 소문난 놈들이었다.
최대길도 어지간해서는 연락하지 않는 놈들이었는데, 이런 일에는 오히려 그놈들이 낫다고 판단해 최영진에게 보냈다.
물론 최영진도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최대길에게 돈을 받고 시키는 일을 할 뿐이었다.
예전 김지혜가 암시장과 연결해서 일하던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놈들이었다.
그리고 암시장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런 놈들 때문이기도 했다.
최영진도 그걸 알기에 이들을 완벽하게 믿지 않았다.
그저 이용할 뿐이다.
이들이 휘젓는 동안 자신은 원하는 걸 얻고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분신이 가디언스에 있다는 걸 얼마 전 확인했다.
그 뒤로 꾸준히 확인했는데, 위치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분신을 거기에 보관하기로 했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인 것이다.
이제 분신체를 찾아오면 끝이니까.
가디언스 본부 근처에 도착한 최영진은 다시 한 번 분신체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대로였다.
‘음? 그대로가 아닌 것 같은데?’
주기적으로 확인했기에 그 사이에 분신체가 이동한 모양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 느낌이 좀 이상했다. 분신체의 위치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시체가 살아 움직일 수는 없으니 누군가 분신체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최영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분신체에 무슨 짓이라도 하다가 소멸하면 진짜 큰일이니까.
“시작합시다. 화끈하게 부탁드립니다.”
최영진의 말에 각성자 하나가 피식 웃었다. 칼날 같은 눈매 때문에 굉장히 사나워 보이는 사내였다.
“화끈하게는 무슨. 우린 딱 돈 받은 만큼만 하고 빠질 테니까 그리 아쇼. 화끈하게 하다가 죽으면 다 내 손해인데 어떤 미친놈이 그렇게 해? 암시장 소속 각성자라고 너무 우습게 여기면 곤란해.”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최영진을 지나쳐 가디언스 본부로 향했다.
그 사내의 뒤로 나머지 각성자들이 우르르 지나갔다. 그들은 최영진을 지나칠 때 한 번씩 비웃음을 날리는 걸 잊지 않았다.
최영진은 담담하게 그걸 견뎌내고는 그들이 가디언스 본부로 들어간 순간 그림자가 되어 빠르게 이동했다.
줄어든 숙련도 때문에 예전 분신보다도 좀 못한 상황이었지만, 소란 속에서 분신만 찾아내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그림자가 된 최영진이 가디언스 본부 빌딩으로 매끄럽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