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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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은 고개를 돌려 싱크대를 본다. 새삼 감탄한다. 화려하다. 머지않아 저 곳에서 돌연변이 괴생물이 나타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 메마른 화성에서도 박테리아가 산다던데, 이런 풍부한 유기물 가운데서 뚝딱뚝딱 생명체 하나 나타난다고 뭐 그리 놀랄 일이겠는가. 민성은 시선을 돌린다. 굳은 표정의 단발머리 중년 여성이 앉아 있다. 그녀는 민성의 어머니다. 민성은 조심스레 그녀를 부른다.
“엄마.”
“왜?”
“내가 설거지할게요.”
“네 아빠가 치우기 전에 건드리면 용돈 깎는다고 했지!”
벼락이 친다. 민성은 다급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붙여본다.
“그래-”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너 다음 주가 시험이지?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해! 요즘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데, 쓸데없이 노닥거리는건 그만두고. 남들처럼 외국어 두 개 세 개씩 하고 유학 가서 박사학위 따지는 못할망정, 대학이라도 그럭저럭 들어가야 게임을 해 보기라도 하지!”
어렵게 붙인 말은 냅다 떨어지고 잔소리만 중국 증시처럼 폭등해서 돌아온다. 민성은 찍, 하고 물러선다. 분노와 결합된 권력자의 정론만큼 강한 것도 드물다. 어떻게 기어올라 보려고 해도 손댈 구석이 없다.
“이 인간이 어디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시계를 흘깃 바라보며 민성의 어머니는 이를 간다. 벌써 돌아올 시간이건만 집안의 가장은 아직 소식이 없다. 휴대폰으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노닥거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장으로서 지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은 확실하다.
“휴.”
민성은 작게 한숨을 쉰다. 언제 이 쓸데없는 자존심의 소모전이 끝날지 모를 일이다. 늦어도 이번 주 안에 끝나길 바라랄 밖에. 설거지를 니가 했니, 내가 했니 따위는 몇 번을 생각해도 참 사소하고 시시한 문제인데, 도무지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으로 그쳐주지 않는다. 그 사소한 문제 위에 참 많은 것이 무겁게 얹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참 얄궂다. 무엇이 이 사소함을 무거움으로 바꿔버린 걸까. 민성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해 본다.
칼이 거두어진다. 칼날은 도심의 빛과 달빛을 반사하며 차갑게 빛난다. 아름답고 날카로운 곡선이다. 그 선의 유려함을 한결 강조하는 것은 그 강대한 검의 소유자다. 아직은 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릴, 지극히 아름다운 여성. 갸날퍼 보이지만 강철 같은 단단함과 빙산 같은 차가움을 함께 느끼게 하는 그녀의 손에서, 그 칼이 그리는 선의 유려함은 한층 강조된다.
“(멋진 검이었어.)”
그 소녀의 곁으로 가볍게 안착하며 한 소년이 말한다. 단정하고 준수한 소년이었다. 은결이다. 소녀, 쿠로사카는 그 말에 어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끄덕임을 눈에 담으며 은결은 곤혹을 느낀다. 역시 오늘 낮의 일 때문에 화난 것일까? 그녀는 점심 이후로 줄곧 분위기가 무거웠다. 은결이 전전긍긍하던 차에 쿠로사카는 고개를 가볍게 들며 말했다.
“(네가 사념체를 잘 유도해 준 덕분이야.)”
“(아, 음. 그래.)”
말을 찾기 바쁘던 은결은 기대하지 않았던 쿠로사카의 말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다시 흐른다. 은결의 머릿속은 다시 엉클어진다. 화난걸까? 그런 걸까? 지금도 오늘 점심때 옥상에서 그녀를 대했던 태도가 잘못되었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과해야 하는 걸까?
“(은결-)”
고민하는 사이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쿠로사카였다. 그녀도 쉽게 입을 연 것은 아니었던 듯, 토해지는 음절과 음절의 사이는 그녀의 검격과 달리 깨끗하지 못했다. 거친 마찰을 느끼게 하는 이 빠진 피오르드의 해안선 같은, 그런 느낌이 희미하게 풍겨온다. 은결은 반갑게 반응한다.
“(응?)”
“(너, 나한테 상상해야 한다고 말했지? 기억하고 있어?)”
“(응.)”
은결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예술을 이야기 하면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런 것 까지 상상해서, 예술이 그것을 발언하도록 허락해, 결국 현실로 귀환시켜야 한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그 말을 꺼내는 걸까. 은결은 희미하게 자신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그는 그 두근거림을 무시한다.
“(...그렇다면 됐어.)”
쿠로사카는 거기서 고개를 끄덕인다. 은결은 불안해진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평소의 그녀 같지 않다고 느껴진 때문이다. 무엇을 말 하려다가 마는 것일까. 역시 아직 화나 있는 걸까. 사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문제는 사과한다는 것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이다. 은결은 어떻게든 굳어진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고 싶었다. 불과 어제만 해도 비록 쿠로사카가 화내고 있더라도 분위기가 딱딱하진 않았는데.
“(저기말야-)”
이번에는 쿠로사카가 조금 놀란 눈치로 은결을 바라본다.
“(앞으로 부를 때, 이름으로 해도 괜찮을까? 알고 지낸지도 이제 반년쯤 되어 가고, 계속 성으로 부르면 좀 서먹하잖아. 어때?)”
은결은 불안을 밀어내고 웃으면서 제안한다. 괜히 과장되게 친한 척 해 보려는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렇게 친분을 드러내 보여서 분위기를 풀어 보고 싶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서리 돋은 말을 되돌려 올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되면 무거운 분위기를 일소에 붙일 수 있으리라.
“(마, 마음대로 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은결은 경악한다. 자칫 “어!”하고 반사적으로 큰 소리를 낼 뻔 했다.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겨우 그것을 막는다. 쿠로사카는 시선을 돌린 채 은결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은결은 조심조심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확인한다.
“(괜, 찮아? 정말로?)”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은결이 좀 더 침착했더라면 허리춤의 키리야미를 쥐고 있는 쿠로사카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으리라.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경악은 이내 부드러운 기쁨 가운데 스미듯이 녹아간다. 화나지 않았구나. 화가 났더라도 이제는 다 풀렸겠구나― 그런 확신이 안도감이 기쁨과 뒤섞인다. 은결은 어색하게 코 밑을 훔치면서 웃었다. 그의 풀린 웃음을 들으며 쿠로사카는 엄격하게 말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만둬.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응. 유리에.)”
은결은 쾌할하게 답한다. 쿠로사카의 전신이 다시 움찔 떨린다. 어딘가 간지럽고 뜨거운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후회와 비슷한 감정도 물씬 물씬 솟아났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은결은 아직 입에 어색한 세 글자 발음을 다시 중얼거려 본다. 유리에.(百合絵) 확실히 예쁜 이름이다.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 그러니 금방 익숙해 질 수 있으리라. 은결은 자기에게 확신을 주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절로 웃음이 걸린다.
-...그때 뱀이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였다.
여자가 그 나무의 과일을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자가 그 과일을 따서 먹고 자기 남편에게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몸을 가렸다...
거기까지 읽고 여우는 눈 사이를 엄지와 검지로 감사고 꾹꾹 누른다. 몰려 응결된 피로가 그 충격에 물러져 풀려지는 듯한 감각이 기분을 조금 상쾌하게 해 줬다. 여우는 눈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피곤하네.”
그리고 여우는 책을 덮었다. 없는 용돈 털어 산 성경이다. 헌책방에서 샀는데도 꽤 비쌌다. 인터넷에서 창세기만 뽑아 프린터 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왕 이 책이 서양문명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나중에라도 틈틈히 교양삼아 읽어볼까 해서 한권 샀다. 하지만 비싼 돈 들여 산 것 치고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디 양이 얼마 되지도 않고 해서 창세기를 꽤 여러 번 읽어 봤지만 여전히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어디 여기에 지식이 인간의 의무라는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것일까?
“모르겠구나-”
하지만 은결은 그렇다고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안다는 얼굴로. 그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아는 것 같다. 높은 곳에서, 이곳을 돌아보지 않고. 저렇게 높게- 오늘 점심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은결은 내 말을 긍정했다.
“-------”
아니다. 그럴리는 없다. 은결이 비록 책을 좀 읽었다고 해도 그래봐야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리는 없다. 그는 대단하지 않다. 응. 대단하지 않다. 그러니까, 그가 읽어낸 것을 내가 읽어내지 못할 리는 없다. 이리세가 이야기한 것은 이 안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
여우는 한번만 더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성경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친다. 시야에 한가득 들어차는 조밀한 글자들은 이런 문장과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지구는 아무 형태도 없이 텅 비어 흑암에 싸인 채 물로 뒤덮여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활동하고 계셨다.
그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여우는 유명한 한 구절을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본다.
“그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나타났다...”
역시 잘 모르겠다. 마음이 답답하다.
*추천해 주신 용님께 감사. 그저 열심히 적어볼 뿐입니다. 이 글은 출판이야 어쨌건 상관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봐 줬으면 기쁘겠네요. 꼽사리 추천해 주신 jin마스터 님에게도 감사~
*드디어 호칭 교체! 완결도 다 와가는데 슬슬 바꿀 타이밍이기는 했죠.
*수행의 연애담 뭐 이런 자질구레한 것 까지 쓰려면 꽤 분량이 많을 테니 아마 힘들겠죠. 근데 그보다 문제되는 것은 수행 젊은 시절 자세히 다루면 국보법에 의거, 잡혀갈 우려가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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