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희망을 위한 찬가 - 시선 아래 승리자는 없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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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의 교실에서 짤랑, 하고 금속의 맞물리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새하얀 팔목에 걸린 팔찌의 모습이 아름답다. 긴 머리의 소녀는 득의만만하게 팔찌를 찬 팔목을 단발머리 소녀에게 내밀어 보인다. ‘어때!’ 라고 하는 모습이다. 주변에서는 환한 얼굴로 그녀의 팔찌를 칭찬했다.
“와, 어디서 구했어? 예쁘다.”
“저 계집애가 저러고 다니는데 나라고 질 수 있니. 집에 있는 걸로 하나 맞춰왔지.”
그리고 소녀는 후훗, 하고 콧대를 높인다. 아침부터 자랑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겨우 적당한 타이밍을 맞췄다. 단발의 소녀는 약간 심퉁 맞은 안색이 되어 차갑게 내밭는다.
“또 집에서 엄마 꺼 몰래 가지고 나왔구나.”
“아냐!”
긴 머리 소녀는 단번에 부정한다. 사실이다. 그녀는 대학생인 언니 껄 가져왔다. 결코 엄마 껄 가져오지 않았다. 뭣보다 세대 차이가 심해 엄마 껀 지금 고등학생이 착용하기엔 걸맞지 않다. 그런 면에서 여대생인 언니 쪽이 여러모로 안성맞춤이다. 단점이 있다면 몰래 들고 나간 게 들키면 잔소리가 심하다는 것이지만, 그거야 안 들키면 그만이다. 감으려는 것도 아니고. 세연은 그녀들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본다. 그녀의 옆에 있던 아이가 세연의 옆구리를 팔꿈치를 쿡 찌르며 묻는다.
“그런데 너도 좀 바꾸는 게 어때?”
“나?”
“그래. 올해 초 부터였던가... 그거 계속 끼고 있던 거 같은데... 나쁘진 않지만 너하곤 좀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좀 칙칙해 보이고 말야. 너는 좀더 화려하고 가벼운 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세연에게 말한다. 세연은 “아...” 하면서 자신의 팔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바라본다. 다소 종교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진 팔찌다. 못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젊은 여고생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앟는다. 하지만 세연은 웃으며 다른 손으로 그 팔찌를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으응. 나는 괜찮아. 이건 디자인 같은 거 하고 상관없이 소중한 거니까.”
“뭐, 종교적인 거야?”
“약간은 그런 거지만, 그런 거 하곤 좀 달라. 남자친구가 만들어 준 거거든.”
마지막 말을 하는 세연의 얼굴은 온기에 물렁하게 풀린다. 헤실헤실 떠오른 미소 주변으로는 대기 자체가 녹아 물러진 느낌이다. 친구들은 다시 전율한다. 앞으로 저 꼴을 얼마나 더 봐야 하려나. 옆의 소녀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산 것도 아니고 직접 만든 거라니, 음, 그렇게 예쁘진 않아도 솔직히 좀 부럽긴 하네.”
“그러게 말야.”
“그래도 세연이랑은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역시 좀 칙칙한 거 같은데. 이왕 세연이처럼 미인이 낄 건데 아깝잖아. 저런 거 만들 정도로 솜씨가 있다면 다른 걸로 괜찮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어때?”
단발의 소녀가 아쉽게 말한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동시에 순수하게 세연을 위하는 말은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함으로서 세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세연이 차고 있는 팔찌를 깎아 내리고자 하는 마음도 동시에 품고 있다. 그것은 세연에 대한 그녀의 호의와 상충되지 않는다.
“괜찮아. 이게 처음 선물 받은 건데다가 남자친구가 처음 만들어본 거였거든. 그러니까 좀 더 소중히 할 생각이야.”
세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사실 은결이 그 팔찌를 세연에게 선물한 것은 영감이라 할 만한 그녀의 인식을 억제하기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마련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역시 그런 부분을 생각하더라도 소중한 팔찌다. 이 팔찌는 그녀와 은결의 만남이 최초로 결실을 맺은 형태니까. 남들이 별로라는데도 상관없어 하는 세연의 태도에 옆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하기야. 나도 집에 옷하고 인형 하고 있는 것 중에 어떤 건 버리기 참 아깝긴 하더라. 디자인이 구식이고 해도 상관없이 말야.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게 잔뜩 묻어 있으니까.”
“나도 그런 거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쓰레기 같이 무의미한 거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그런 물건 말야. 너희도 다들 그런 거 하나씩 있지 않아?”
화제가 그렇게 옮겨가자 소녀들은 각자가 그렇게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 하나하나 주워섬겨 본다. 시대가 지났다고 해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해서 소중함이 희석되지 않는 물건들. 무척 드물지만 그래도 하나 둘 정도는 다들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물화될 수 없는 추억과 연결되어 풍화되지 않거나 풍화가 도리어 보석을 연마하듯 추억의 빛을 더하게 되는 가치를 가진다. 추억이 열거되며 그녀들은 꺄르르, 합창 같은 웃음을 교환한다. 메마른 가을의 저물어가는 따스함으로 교실은 젖는다.
“나도 어렸을 때 아빠가 생일선물로 사준 책이 한 권 있거든. 낡고 내용도 이제 내겐 무의미하지만 못 버리겠더라. 참 신기하지. 어째서 그런 것들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걸까.”
“그야 추억이 깃들어 있으니까 그렇지.”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왜 추억이 그렇게 중요하게 작용할까, 그게 신기하단 말야. 똑같은 새 물건이 있다고 해서 그걸 바꿀 수 있냐면 ‘아니올씨다.’ 잖아. 별반 다를 게 없다면 새 걸로 바꾸는 게 훨씬 나을 텐데 말야.”
“음- 그것도 그런가.”
소녀들은 잠시 답도 나오지 않을 생각에 잠긴다. 세연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한 이야기를 하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생각하고, 본래무일물에 이어 외화를 생각하고, 외화에 이어 소외를 생각한다. 자성(自性)없는 사물의 가치는 외화라는 연기(緣起)의 한 양태에 연관되고, 그래서 소외가 없기에 그토록 소중해 질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 결국 사태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자기자신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렇다면 완벽한 독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입 밖에 꺼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팔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은결이 만들어준 팔찌를 쓰다듬어 본다.
수업시간이다. 쿠로사카는 흘깃 옆 자리의 은결을 바라본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흑판을 바라보고 있다. 가장된 성실함으로 자신에게 무의미한 정보를 그저 흘려드는 은결의 모습을 보며 쿠로사카는 다시 차오르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마음’이 시선에 대한 걸작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었으면서.
안타까움은 그러한 말이 되어 당장이라도 되어 은결을 향해 흘러내릴 것 같다. 그는 정말로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게 명료하게, 그렇게 자세하게, 그렇게 깊게 텍스트를 바라보면서, 지금 이 순간의, 지금 눈앞의, 현실에 대해서는 어째서?
은결은 쿠로사카의 시선을 느낀다. 그는 점심시간에 그녀를 대했던 자신의 태도에 지금도 마음이 쓰라림을 느낀다. 그녀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쿠로사카가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착각하고 있다.
은결은 그렇게 판단한다. 그는 왜 쿠로사카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깊이 마음을 파고들었다면, 사태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은결은 그것이 겨우 텍스트에 함몰되었을 뿐인 ‘착각’이라고 믿는다.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 ‘텍스트는 텍스트일 뿐’이다.
텍스트는 세계가 아니다.
선생님이 그의 친구를 바라보았듯, 여우가 나를 바라본다고? 은결은 그런 판단을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은 지나치게 텍스트에 함몰되어 현실을 모르는 판단이라고 믿는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는데. 여우는 나 보다 성적도 높고, 교우 관계도 좋다. 더구나 최근의 몇 가지 좋은 성취는 나 덕분이었다고까지 말한다. 나는 그저, 그저--- 그러니까 그런 그가 자신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없어야 한다.)
수행은 타자를 치던 손길을 멈추고 자신의 책장을 돌아본다. 영어, 불어, 독일어, 일어, 키릴어-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언어로 된 다양한 책들이 책장을 메운다. 창고에 넣어둔 책까지 합치면 그는 적어도 30여개 정도의 언어로 된 삼만 권 이상 되는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물론 가지고 있는 것 만이다. '읽어 본' 텍스트로 범주를 확대하면 언어의 숫자와 책의 권수는 훨씬 더 불어난다.
“......”
천재. 다른 말로 자신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무엇을 하든 세계최고가 될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힘을 잃어버린 지금도 그 당시의 성취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그러나 재능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재능은 우연이란 이름의 하늘이 준 것이고, 노력 없이 얻은 재능으로 세계 최고가 되어 부귀공명을 누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재능의 낭비라고 그는 줄곧 생각했다. 그건 정의로운 일이 아니었다. 정의로운 재능의 활용은 그것이 공동체에 기여할 때만 이루어진다.
“.....”
한때 과학자가 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나노 기술을 공부하고 싶었다. 반세기이상 연구를 진전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나노 기술이 현실이 되어 자본주의가 지탱 불가능하게 될 정도로 막대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는 것을 보고 싶었다. 화폐를 가지고 무언가를 교환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풍요로운 사회. 축적과 부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세계. 폭포수 같은 생산력. 가난이 사라진 세계.
그리고 폰 노이만의 게임 이론을 알았다. 수행은 단번에 그 이론의 아름다움과 광대한 가능성을 이해했다. 결국 그는 독자적으로 그것을 발전시켜 죄수의 딜레마에서 시작해 내쉬 평형등의 거기서 확장되는 각종 결과와 모델들을 독자적으로 이끌어냈다. 게임 수 n을 무한으로 확장했을 때, 죄수의 딜레마에 안정은 존재하는가? 없다면 왜? 있다면 왜? 그리고 수행은 과학자가 되려던 생각을 접었다.
“......”
수행은 고개를 돌린다. 그는 외국어로 가득한 책 사이에서 드물게 한글로 된 책을 본다. 그 책의 이름은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추천해 주신 겨울바른 님과 신필님의 추천에 감사! 겨울바른님은 몇 번이고 저를 낚다가 이제야 추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 ㄲㄲㄲ
*이 글은 신이라던가 사후세계에 대해 ‘침묵’하는 거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없다고 말해도 이 글의 문제의식은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가 붕괴합니다. 그저 모르는 거죠. 그런 것들은 확실성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크게크게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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