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70화 (70/300)

#   70-희망을 위한 찬가 -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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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대낮의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은결은 ‘죄와 벌’을 떠올렸다. 소설의 초반에 주인공 라스콜니리코프는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에게 가난이 죄가 되는 논리를 듣게 된다. 뻔하다면 뻔한 얘기였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선 돈이 있어야 하는 사회에서, 모든 인간다운 교양이란 먹고사는 문제의 충족 다음에야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필연적으로 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이상, 빵조차 충족하지 못해 거기 매인 채 인간다운 가치를 추구할 수 없는 인간군상은, 인간의 모습을 하되 인간답지 않음으로 사회에 대해 하나의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가난은 죄가 될 수 밖에 없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음...”

갑자기 마르멜라도프를 떠올린 것은 은결의 눈앞에 버티고 선 집, 아니다, 저택의 우람한 모습 때문이다. 세연양의 집었다. 주변의 다른 집들도 다 그러했지만, 길게 이어진 담장과, 그 담장 너머로 풍성히 드리워진 아름드리나무의 싱그러운 초록색 잎들은 틀림없이 집보다 집에 딸린 정원이 더 클 것 같다고 예감케 했다. 그것은 세연 양의 넉넉하고 티 없이 맑은 성격과 겹쳐지며, 그녀의 선량한 성품이 이 분명한 물질 기반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물론 그것은 무의미한 생각이다. 그녀의 선함을 그의 환경에서 찾음으로서 그 선함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만일 그녀가 악했다면 그 악의 기원 역시 그녀의 환경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물질적 부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계속 그러한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르상티망(약자의 원한)에 불과하다. 르상티망으로는 진보를 꿈꿀 수 없다. ‘재산은 도둑질이다’라는 선언을 넘어서는 곳에만 진보가 있다.

‘더구나 진경도 이 집 사람이고 말야. 물적 기반과 개인의 성품 사이에서 필연적인 관계성은 찾아볼 수 없지.’

그리고 은결은 ‘흥!’하고 콧소리를 세게 냈다. 하여간 되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은결에게 감히 아버지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게 최대의 감정요인인건 물론이다. 다행이라면 그 쪽도 은결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 하다는 점 정도일까. 은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문설주의 인터폰을 눌렀다. 곧 ‘누구세요’하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은결이라고 합니다. 세연양 안에 있나요?”

-아가씨라면-

-이, 있어요!

뒤에서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싶더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서두를 필요 없는데.’하고 절로 한 마디 해 주고 싶어지는 느낌이다. 얼마 있지 않아 ‘삐-’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드, 들어오세요.’ 하고 세연이 말하는 것이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은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 했던 것 처럼 정원이 집보다 더 넓었다. 큰 개라도 한 마리 느긋하게 누워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 집이었다. 은결이 정문에서 깔린 돌길을 따라 집으로 가던 도중 저택의 문이 열리며 세연이 화급하게 걸어왔다. 잘 차려입은 사복이 그렇지 않아도 아름답던 그녀의 외견을 한층 강조했다. 그녀는 얼른 은결 앞에 와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은결은 조금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끼며 마주 인사했다. 어제 그녀에게 휴대폰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어보았을 때 많이 기뻐하는 기색을 보여 부담스럽게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한 이상이었다.

“으음, 옷이 예쁘시네요.”

“그, 그런가요.”

화제에 곤란을 느끼던 은결이 무난하게 그녀의 복장을 칭찬하자 세연은 많이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실은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복장은 어제 두 시간에 걸쳐 친구들과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겨우 완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연이 밝은 미소를 보이며 은결에게 물었다.

“점심 드셨어요?”

“아니요. 그렇지만-”

“그럼 우선 식사부터 하지요!”

세연이 얼른 말하는 바람에 은결의 말이 막혔다. 그는 사실 ‘-얼마 시간이 걸리는 일도 아니라서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연이 먼저 말해버린 이상,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기대에 뭉쳐 환하게 빛나고 있는 이상, 그걸 또 냉정히 떨치긴 어려웠다.

“...그렇게 하지요.”

은결은 용건만 보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도 너무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해 적당히 그녀에게 맞춰 대답했다.

...집으로 들어간 은결은 세연과 함께 점심을 들고 난 뒤, 세연에게 그녀의 방으로 안내 받았다. 그녀의 방까지 가는 길은 썰렁했다. 집에 그녀와 가정부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예요.”

환히 웃으며 세연은 2층의 한 방문을 열었다. 침대가 하나, 책상이 하나, TV가 하나, 컴퓨터가 하나, 옷장이 하나 있는 조금 넓지만 소탈한 방이었다. 은결은 으음, 하고 무의미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이성의 방에 들어와 보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미래야 동생이고 쿠로사카의 경우는 그저 썰렁해서 남자고 여자고 상관없는 방이었으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들어가 본 이성의 방은 역시 익숙해지기 힘든, 기묘한 청량함과 향기로 충만해 있었다.

“......”

세연은 은결을 방안에 들여놓고 곧장 간단한 간식거리를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은결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그 방에 홀로 남아 고요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대한 어색함도 담겨 있었지만 그보다는 탐색하듯이 정교하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곧 시선을 바쁘게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아주 용담호혈이군.”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소탈한 여자아이의 방이었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렇지 않았다. 방의 어디 한 구석도 영적 결계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결계의 수준 역시 모두 높은 것이었다. 심지어 몇 가지 결계에서는 수행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진경과 함께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니 그 사이에 이 곳에 왔었던 모양이다. 이거라면 얼마 전에 싸웠던 그 라이칸 슬로프라도 막을 수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세연은 세상에서 영적으로 가장 안전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겪었던 경험을 생각하면, 그리고 현재 그녀의 체질을 생각하면 이만한 처치는 넘치는 것이 아니다.

‘카미만 아니면 말야...’

결론이 거기에 이르면 은결은 어쩔 수 없이 이 방에 설치된 모든 고등 술법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한숨밖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은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연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은결은 문을 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어렵사리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 위로 음료수가 담겨진 큰 컵 둘과 쿠키가 담긴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쿠키는 시중에서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따로 빵집에서 샀거나 직접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간식을 들며 간단히 담소를 했다. 한 동안 대화를 이어가던 가운데 세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쿠키- 어떤가요?”

그녀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은결에게 물었다. 그 태도에서 은결은 이 쿠키가 세연이 직접 만든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글쎄요. 조금 설탕이 많이 들어간 것 같긴 하네요.”

“그, 그런가요...”

은결의 평에 세연은 울상을 지었다. 세연을 달래듯 은결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잘 만든 쿠키네요. 조금만 더 하면 굉장히 맛있게 완성될 겁니다.”

그제서야 표정을 펴며, 세연은 다시 조심스런 태도로 은결에게 말했다.

“저기, 그럼 언젠가 쿠키 만드는 법, 가르쳐주지 않으실래요?”

“그건-”

‘곤란합니다.’하고 단호히 자르려던 은결의 말이 멎었다. 적어도 앞으로 5개월 정도는 그녀와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해선 친분을 쌓아둬야 했다. 그녀와 일정수준 이상의 친분을 쌓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싶었다. 나중이 조금 쓰라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연 본인을 위해서였다. 은결은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의 속내를 덮으며 세연에게 답했다.

“그렇네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함께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죠.”

“에헤헤...”

세연은 어리게 웃으며 기뻐했다. 은결은 그녀의 시선을 피해 손가락을 튕겼다. 세연의 방이 현실감을 잃었다. 이 방에서 워낙 다양한 결계가 지극히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펼쳐진지라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자신의 결계를 펼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길었다. 세연의 표정이 더불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의 순결하게 아름다웠던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지루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뒷골목의 깡패같은 표정이다.

“이 씨발 개잡종같은 새끼야. 무슨 용무지?”

“카미면 카미답게 좀더 품격이란 것을 갖추는 게 어때?”

눈을 뜨자마자 거친 욕설이었다. 지난번 은결에게 당했던 것이 대단히 불쾌했던 모양이다. 은결은 눈살을 찌푸리며 충고했다. 카미는 그의 말을 조롱과 더불어 무시했다.

“좆같은 소리하고 쳐 앉아 있네. 꼴같잖은 인간의 기준으로 감히 나를 재단하려 들지 마라. 나는 인간 이상의 존재고, 그럼으로 그 따위에 구속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은결도 어차피 자신의 말이 먹힐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담백하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쨌든 좋아. 내가 찾아온 이유는 아버지에게 영적 자장이 펼쳐져 있지만 그게 너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 점을 설명하기 위한 거니까. 참고로 말해두지만 억지로 그 자장을 벗기려 하면 너도 손해야. 아버지는 천재고, 그 부자연스러움에서 무언가 눈치챌지도 모르니까. 일부러 세연양의 몸을 잃을 필요는 없잖아?”

“...쳇. 그럼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불만스런 기색이었지만 은결의 설명에 납득한 듯 다른 제안을 요구했다. 은결은 자신의 설명이 들어먹힌데 안심하며 말했다.

“파훼 술식을 전해주지. 나머지는 직접 아버지에게 접촉해 보면 알 수 있을거 아냐.”

파훼 술식은 단순히 어떤 결계를 해제한다는 차원을 넘어 그 술식의 기초 원리에 대한 정보도 담고 있다.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괴물 같은 능력을 보여줬던 수행을 생각하면 카미인 푸른 이빨로서도 꽤 흥미로운 정보였다. 그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카미와의 교섭을 끝내고, 은결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세연에게 말했다. 세연은 매우 아쉬워하며 은결이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굳이 배웅하겠다고 집밖으로 나섰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이르러, 세연이 조신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이번 주 토요일에 저랑 같이 K대학 축제에 가지 않으실래요? 오빠가 다니고 있는 대학이기도 해서...”

“아,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선약이 있어서 곤란합니다.”

은결은 세연의 제안을 듣고 잠깐 놀란 표정을 하곤 이내 거절했다. 그날은 미래와 가기로 했으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었더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의 거절에 세연은 무척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미안합니다.”

“아, 아뇨.”

세연이 은결의 사과에 만부당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때마침 버스가 왔다. 도천 시로 가는 버스였다. 은결은 몸을 움직이며 가벼운 미소로 그녀에게 그날의 마지막 말을 건냈다.

“버스가 왔네요. 그럼 다음에 보죠.”

“예...”

세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결을 보내고는 한 동안 멀어지는 버스를 쳐다보다 한숨을 쉬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한동안 두 사람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근처의 친구와 수근수근 거리더니 세연에게 접근해 왔다. 아무래도 세연이 은결에게 차인 것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려는 것 같았다.

“저기, 이봐요-”

세연이 걸음을 멈추며 낮게 말했다.

“꺼져.”

남자는 흠칫, 동작을 멈추고 세연에게서 멀어졌다. 등골이 잡아 뽑히는 것 처럼 서늘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생일을 까먹고 안 챙겼군요. 컴퓨터도 겨우 수복됐고, 아, 비참. 응원을 합시다. 흑흑

*글을 쉽게 쓰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데, 제가 글을 쓰며 추구하는 다른 측면에 충돌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하게 되는 경우가 적잖게 있습니다. 그건 문장의 미학적 완성도랄까, 그런 부분이죠. 미학적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거고, 최소한 읽으며 독자가 즐길 수 있는 레토릭을 구사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문장이 쉬우면 곤란합니다. 기본적으로 문장을 미학적으로 작성하기 위한 방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주장한 ‘낯설게 하기’에 있고, 낮설게 함이란 평상시 쓰이지 않는 단어와 구조를 사용함으로서 문장을 구성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번역투에서 ‘뽀대’를 느끼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낮설게 하기의 현상입니다. 물론 최대한 피해야겠죠.) 결국 친절한 글과 미학적인 글은 일정부분 충돌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고, 이 글이 완전히 쉬운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제가 레토릭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클라우스 학원은 안 팔려서 책으로 낼 생각이 출판사에 없는 모양입니다. 저야 손해 보는 입장도 아니고, 안 팔린다면 억지로 출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머지 부분도 다 공개했고. 하지만 1, 2권을 사신 분들에게 죄송하죠. 나중에 원하시는 분들이 한 2~300분 정도 생긴다면 자비로라도 출판해 완결을 내고 싶다는 생각은 합니다. 표지는 담백하게 제목만 찍힌 갈색으로 말이죠. 아 물론 현실화의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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